메뉴 건너뛰기




조회 수 92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예수 그리스도 고백
                                                                                                                     정연복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1) 만약 예수에 관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어떤 사람에게 2-3분 안에 요약해서 말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예수는 오랜 동안 그럭저럭 생존을 유지해오다 점점 더 심하게 억압을 받게 된 피점령지의 농민들 사이에 살았다. 이것은 구조적 불평등과 불의의 세계였다. 그러한 세계에서 그는 대안이 될 만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고, 또한 그것을 삶으로써 살아냈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여 그것을 더불어 나눴다. 그 비전은 무상의 치유와 나눔의 식사가 있는 공동체, 하느님 앞과 서로의 앞에서 평등한 공동체다. 그는 여성과 어린이와 남성, 그리고 나병환자와 적빈자(赤貧者)와 정신 질환자들을 똑같이 초대했다. “와서 함께 먹고 고침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경험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주십시오”라고 말이다.

이 새로운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의 모습, 즉 시이저가 아니라 하느님이 이 세상을 직접 다스리시게 될 때의 온 세계의 모습이다. 그것이 곧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는 주기도문의 의미다.

그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의 비전 때문에 죽었다. 이 세상의 기존 체제에 대한 그의 예리한 도전은 어느 때든 그를 체포할 수 있는 이유가 되었겠지만, 특별히 성전에 대한 그의 상징적 파괴행위가 유대교와 로마의 고위 당국자들로 하여금 그를 즉각 처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그런데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사건은, 이 문제의 유대인 농부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예수와 함께 있을 때부터 자신들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경험했던 사람들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그 능력을 경험했다. 이제 그 능력은 더 이상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지 않고, 예수 안에서 하느님을 본 사람들에게는 어느 곳에서나 가능하게 되었다.

신중한 중립적 역사가 요세푸스가 1세기 말에 다음과 같이 보도한 것은 이 때문이다: "처음에 예수를 사랑하게 되었던 사람들은 그에 대한 자신들의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종족은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나의 초상화다. 예수는 무상의 치유와 공동 식사를 제공함으로써, 기존하는 사회의 교권 체계와 가부장적 체계에 대해 “아니오” 할 수 있는 공동체를 선언하고 창조했다.
 
그는 새로운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중개인으로 단순히 해석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속 유랑했고,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중보자(mediator)가 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나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는 어떠한 중보자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그는 중보자(중개자) 없는 하느님 나라를 선언했다.

2) 예수는 복음서 이야기 전체를 통해 흔히 사랑이라는 것의 일반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던 분으로 분명히 묘사되어 있다. 예수는 어느 누구라도 종교, 문화, 제의, 질병 따위로 인해 하느님의 사랑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살아냈다.

복음서들에 따르면 그는 한결같이 열정적으로 그렇게 살았다. 마치 그의 사랑의 원천이 인간의 한계 너머에 있는 것 같았다. 그 사랑은 생명을 주는 사랑이었다. 예수는 나에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하신 생명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주님”, “그리스도”라 부르며, 내게 하느님을 보여준 분이라고 고백한다.

3) 부활절 이전의 예수는 우리가 역사적 연구를 통해 분별할 수 있는 것처럼 비범하고 사람을 사로잡는 인물로서, 우리가 그를 한 번 보기만 하면 그를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게 한다.

정경의 예수(canonical Jesus)는 1세기 말엽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의 체험 속에서 예수가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보여준다. 정경의 예수 이야기들은 그 역사적 사실성과는 독립적으로 우리의 삶에 강력한 은유적 이야기로 다가오며 기독교적 비전과 정체성을 형성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부활절 이전의 예수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 둘 다 중요하다. 역사는 신앙이 환상이 되는 것을 막아준다. 그리고 신앙은 역사가 단순한 골동품 연구가 되지 않게 한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44 우리가 하나님의 훈련하심을 믿게 하여 주소서. 제임스앤제임스 2013.09.24 954
343 ‘성서무오설’ 이라는 오래된 교리는 재검토하여 교정되어야 / 산들바람 나누리 2013.09.24 917
342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제임스앤제임스 2013.09.25 1229
341 ‘사람의 아들’ 예수 / 산들바람 나누리 2013.09.26 1070
340 우리 모두가 어울리는 행복을 나누게 하소서. 제임스앤제임스 2013.09.26 1016
339 사도 바울이 이해한 예수 / 산들바람 나누리 2013.09.26 997
338 오클랜드의 봄에는 조금 천천히 돌아서 가보고 싶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3.09.27 1041
337 우리의 시험은 일시적인 것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제임스앤제임스 2013.09.28 970
336 복음서 기자들이 이해한 예수 / 산들바람 나누리 2013.09.28 933
335 오클랜드 한인들이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에 간섭하여 주소서. 제임스앤제임스 2013.09.28 973
334 ‘예수에 대한 신앙’ 을 넘어 ‘예수의 신앙’ 을 가져야 / 산들바람 나누리 2013.09.28 926
333 우리의 마음에 사랑으로 가득하게 하여 주옵소서. 제임스앤제임스 2013.09.29 949
332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 정강길 나누리 2013.09.29 885
331 Let Us Hear God’s Words Of Wisdom Here In Auckland. 오클랜드 여기에서 지혜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제임스앤제임스 2013.09.30 1124
330 이웃종교와의 대화 / 정강길 나누리 2013.09.30 852
329 오클랜드에도 마음도 풍성한 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3.10.01 1124
328 선한 것에서 선한 것이 나며 / 정강길 나누리 2013.10.01 1033
327 오클랜드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축복으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제임스앤제임스 2013.10.02 1212
326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자신도 없었고, 되고 싶지도 않았지만 / 산들바람 나누리 2013.10.02 1232
325 오클랜드에서 살아가는 곳마다 사랑과 진실과 평화가 자리를 잡게 하여 주옵소서. 제임스앤제임스 2013.10.04 1205
Board Pagination Prev 1 ...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 37 Next
/ 37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