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조회 수 78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정연복/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매일 낮 열두 시쯤 그 찌는 듯한 열기 속에서 하나님은 내게 오신다. 200그램 죽의 모습을 하시고."
(인도의 한 여성 신자)
 


그녀의 이런 하나님 고백은 전통신학에서 이야기하는 전지전능하고 거룩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을 깔아뭉개는 신성모독적 발언인가?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200그램 죽'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느끼는 그녀의 소박한 생활신학은 세련된 종교언어로 추상적인 신학적 개념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들의 이론신학보다 열등한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그녀의 하나님 고백 한마디 한마디에 담겨 있는 뜻을 조용히 묵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매일 낮 열두 시쯤 그 찌는 듯한 열기 속에서."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느 날은 존재했다가 어느 날은 존재하지 않아도 그만인 명멸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매일' 하나님을 느낀다.
그 느낌이 있기에 그녀는 가난하고 고달픈 삶 가운데서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그녀를 하루하루 살게 하는 구체적인 생명의 힘이다.


"하나님은 내게 오신다."


그녀의 생활신학은 1인칭이다. 그녀는 하나님에 '관해서' 3인칭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그녀의 하나님 고백은 단순한 말장난이나 신학적 유희가 아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울부짖었듯이,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내게' 오시는 하나님이다.
저 하늘에 초연한 모습으로 계신 초월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매일' '내게' 오시는 다정한 하나님이다.


"200그램 죽의 모습을 하시고."


그녀의 신학은 추상적이며 관념적이지 않다. 물질적이며 구체적이다.
그녀의 신학은 거창하고 현란하지 않다. 그야말로 작고 소박하다.
그녀는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세련된 종교언어를 동원하거나 교리를 들먹이지 않는다.
그녀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명하기 위해 머리를 짜낼 필요가 없다.


그녀는 그녀를 살게 하는 '200그램 죽'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느끼고 체험한다.
그녀의 삶과 하나님은 아무런 거리를 두지 않고 밀착되어 있다.
하나님은 '200그램 죽의 모습'으로 그녀의 삶과 동행한다. 아니, 하나님은 '200그램 죽의 모습'으로 그녀에게 말없이 먹혀 그녀의 여린 생명을 지탱시켜 준다. 하나님은 그녀의 밥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밥이다. 하나님은 공허한 관념이 아니다.
하나님은 배를 곯는 사람들에게 밥으로 오셔서 그들을 살리시는 물질이다.
하나님은 세상살이에 지쳐 절망한 사람들에게 희망으로 오셔서 그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정신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별 볼일 없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정한 친구로 오셔서 그들의 멍든 가슴을 어루만지시는 따뜻한 손길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그들의 삶의 원동력이 되신다.
하나님은 예수, 성령, 노동자 전태일, 마더 테레사 수녀, 문익환 목사, 그리고 '200그램 죽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생명과 사랑과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이루어 가신다.     


다시금 묻는다. 하나님을 고백한 이 말이 신성모독인가?

대만의 민중신학자요, 문화신학자인 송천성은 말한다.

"삶 자체가 신학의 원자료다.
신학은 삶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 요인들을 다루어야 한다.
신학적 두뇌로만 이해할 수 있는 추상적 개념들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문제라면 그 어떤 것도 신학에 부적당하거나 중요성이 없다고 판결해선 안 된다.
신학은 하늘이 아닌 땅과 씨름해야 한다.

…살아 있는 인간 상황과 무관한 신학이라면 그것은 이론신학일 뿐이다.
이런 종류의 신학은 머리를 기쁘게 해줄 수 있을지언정 영혼을 울리거나 가슴을 찌르는 신학이 될 수 없다.

…아시아의 신학이 밥을 거부한다면 그 신학은 영양실조에 걸리고 병이 들고 말 것이다."


신학만 그럴까?
신앙도, 목회도, 예배도, 선교도 '하늘이 아닌 땅과 씨름해야' 하는 게 아닌가.
나의 신앙, 나의 목회는 혹시 '밥'을 거부한 나머지 '영양실조'에 걸려 있지나 않은지 깊이 반성할 일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504 신앙에세이 : 사랑의 주님. 지금은 남태평양의 여름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5.12.04 193
503 신앙에세이 : 새해에는 우리에게 자신을 버릴 수 있는 참지혜와 참용기를 주옵소서. 제임스앤제임스 2014.01.11 1412
502 신앙에세이 : 성령충만으로 우리의 죄의 속성을 없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9.06.24 188
501 신앙에세이 :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6.07.30 166
500 신앙에세이 : 오클랜드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조율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제임스앤제임스 2019.01.12 194
499 신앙에세이 : 오클랜드의 세상에서 광야처럼 단련해주심에 영광의 기도를 드리게 하옵소서. 제임스앤제임스 2014.05.03 865
498 신앙에세이 : 오클랜드의 이민생활에서 크리스챤으로 살기 위해 하나님과 동행해야만 살아 갈 수 있었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7.03.03 266
497 신앙에세이 : 오클랜드의 추억 속에서도 주님의 은총이 가득한 계절이 되었습니다. 1 제임스앤제임스 2015.08.01 314
496 신앙에세이 : 우리 크리스챤 한인들이 행복하고 활기있는 오클랜드의 삶을 살아 가고 싶었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7.05.05 249
495 신앙에세이 :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세상의 문화를 따른 비슷한 믿음은 진짜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7.06.16 285
494 신앙에세이 : 우리 크리스챤들은 모두 좋은 교회를 소망하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9.03.30 177
493 신앙에세이 : 우리 크리스챤들은 언제나 주님의 은혜로 가는 길에서 살겠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9.07.08 141
492 신앙에세이 : 우리 크리스챤들은 완벽주의를 시도하는 과정으로 불행을 초래하지 않아야 합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9.02.18 146
491 신앙에세이 : 우리 크리스챤들은 찬양과 예배를 위해 언제나 준비된 예배자들이어야 합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9.05.11 191
490 신앙에세이 : 우리 크리스챤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Love) 공의의 (Righteousness) 균형을 깨달았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9.11.30 152
489 신앙에세이 : 우리 크리스챤들의 기도의 초점이 주님이신 예수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9.03.16 156
488 신앙에세이 : 우리 크리스챤들의 생애의 광야처럼 겸손함과 성실함으로 기도하며 승리하겠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9.09.23 156
487 신앙에세이 : 우리 크리스챤들이 삶들을 통해 사회 속으로 녹아져 스며드는 소금처럼 살겠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9.10.15 208
486 신앙에세이 : 우리 크리스챤들이 주님과 동행하면 오클랜드의 삶이 사랑으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8.12.15 128
485 신앙에세이 : 우리 크리스챤들이 하나님을 향한 배신은 불행을 자초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8.06.16 133
Board Pagination Prev 1 ... 7 8 9 10 11 12 13 14 15 16 ... 37 Next
/ 37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