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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3 18:52

월드TV 한국채널 (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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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8 22일 뉴질랜드 뉴스

 

TV3 자막뉴스 (월드TV 한국채널 제공)

 

<해드라인>

- 리비아 반군 수도 트리폴리 입성, 카다피 독재정권 함락 위기

- 반군 동행 취재 외신 기자, 카다피군의 퇴거 보도

-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뉴질랜드 SAS군 신원 공개돼

- 뉴질랜드 카약의 새 역사 이룬 리사 캐링턴

 

 

 

<NEWS>

1.     리비아 국가원수 카다피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루머들이 트위터를 통해 돌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확실한 것은 카다피가 퇴각 위기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리비아 반군은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의 녹색 광장에서 승리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 소식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전국 각지에서도 자축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 찬 리비아 현지의 모습이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는 가운데, 정작 카다피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현재 카다피의 요새에서 총성이 울리고 있으나 외신들은 반군의 승리가 임박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또 카다피의 두 아들이 생포된 만큼 카다피 정권이 이전과 같을 수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존 키 총리는 뉴질랜드의 원조가 필요한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리비아 반군에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리비아에 거주하고 있는 뉴질랜드인 7명은 뉴질랜드 당국의 출국 권고에도 불구하고 리비아에 남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2.     카다피의 독재정권이 42년 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카다피는 이제 끝났어요.” 반군은 자축 파티를 벌이고 있습니다. 지금 이 곳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오고 있습니다. 트리폴리로 나오려는 차량이 너무 많아 교통정체현상이 일어났습니다.” 반군은 카다피 정권의 상징인 녹색 광장에 모여들었습니다. 한때 친 카다피 세력이 장악했던 녹색 광장은 이제 허물어져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지금 시민들이 너무나 흥분한 나머지 여기저기서 침이 튀고 있는데요. 폭죽이 터지고, 총성도 울려퍼져 이곳 분위기는 열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같은 열기는 반군의 발생지인 벵가지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카다피 정권은 끝까지 항전을 외치고 있습니다. 국영방송국의 한 여자 아나운서는 총기를 든 채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외칩니다. 하지만 카다피 정권은 반군의 규모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토군이 출격해 모든 것을 공격했고 파괴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비겁한 겁쟁이들 조차도 진격에 나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편 리비아에 거주하는 뉴질랜드인 7명은 리비아에 남겠다고 전했습니다. 뉴질랜드 정부는 리비아 반군측에 연락을 취할 예정입니다. 카이로 주재 뉴질랜드 대사는 벵가지로 가서 리비아 국민의 목소리를 반영한 민주화 과정을 협력할 방법을 논의할 예정입니다.” 카다피 정권은 이제 붕괴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그의 두 아들은 생포됐습니다. 그러나 정작 카다피의 행방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반군이 장악한 트리폴리의 녹색 광장은 카다피의 요새로부터 2km도 채 안되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리비아 국영방송은 고요하고 한적한 모습의 카다피 요새를 방영했고 카다피의 육성메시지도 공개했습니다. 카다피 원수는 트리폴리에 남아 결사항전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권 함락은 임박해 보입니다.

 

앞서 뉴스를 보도한 스카이 기자 알렉스 크로포드는 수 주간 반군을 동행 취재했습니다. 기자는 이미 자위야에서부터 반군의 장악이 속도를 가했다고 보도했습니다. 반군이 트리폴리 진격을 다짐해 나섰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자위야를 출발해 빠른 속도로 진격에 나섰습니다. 반군은 트리폴리 장악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모인 시민군입니다. 반군은 몇시간만에 자위야 다음으로 자담까지도 장악했습니다. 수도 트리폴리 진격을 얼마 안 남겨두고 반군의 분위기는 더욱 흥분됐습니다. 반군이 진격을 계속하는 동안 카다피군으로부터 특별한 저항은 없었습니다.

 

수많은 카다피 군인들이 제복을 벗어던지고 달아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됐습니다. 군인들이 생쥐처럼 빠르게 달아나고 있으니 우리가 잘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반군은 다음 지역도 빠르게 장악해 나갔습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속도로 빠른 진격이었습니다. 반군이 트리폴리 서쪽의 27번째 입구에 불과 1500m까지 좁혀가자 드디어 카다피군이 반격에 나섰습니다. 카다피군 소속 저격수들이 은신해 있다 반군을 향해 급작스럽게 총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카다피 저격수들의 로켓탄 공격에 맞닥뜨린 반군은 곧 후퇴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카다피군이 휴전 협상을 제안함에도 불구하고 반군은 공격을 다시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쉽게 트리폴리로 진격하리라고 생각치 못한 반군은 이제 승리를 예감하고 있습니다. 서방국가에서 본 카다피는 승리한 테러범이었습니다. 카다피는 로커비 여객기 폭파사건을 지시한 의혹을 받아왔고 IRA에 자금지원을 해왔습니다. 또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와 오바마 미 대통령과 공식석상에서 악수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카다피의 지난 과거를 정리해보겠습니다.

화려한 쇼맨, 사회주의자, 광적인 독재자로 표현되는 카다피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왔습니다. 아랍 국가 중 최장기간 독재정권을 유지해왔고, 1969년 군사 쿠데타, 녹색 혁명으로 리비아 정권을 탈취했습니다. 카다피는 석유사업으로 얻은 수십억 달러의 수익을 보건과 교육 무상지원에 투자했으며 예상치 못한 곳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넬슨 만델라는 그에게 아프리카 최고의 상을 수여했습니다. 국제관계 전문가인 패트맨 교수는 리비아 국민이 그로인해 고통받아왔다고 말했습니다. “독재자로 군림하고 자신의 반대세력을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하는데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카다피는 서방국가와의 관계에서 매우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카다피가 베를린 클럽의 테러를 지시해 미 해군을 희생시킨 의혹을 받은 뒤 미국은 카다피의 자택을 공격해 그의 수양 딸이 숨졌습니다.

 

또한 로커비 팬앰기 폭파를 지시했고 이로인해 리비아 출신 테러범이 구속됐습니다. 하지만 96년에는 IRA에 자금지원을 시작했습니다. 8년 뒤에는 당시 영국의 총리 토니 블레어와 악수를 나누며 대테러 작전에 함께 나서기로 동의헀습니다. “서방국가와 오랜기간 사이가 틀어져 있었고 갑자기 입장을 바꾸는 행동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후 카다피는 영국의 축구 구단 크리스탈 팰리스 매입 계획도 밝힌 바 있습니다. 크리스탈 팰리스가 리비아에 큰 수익을 가져다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크리스탈 팰리스가 지난 몇년동안 얼마나 많은 손실을 가져왔는지 카다피가 모르는 것 같습니다.” 2년전 버락 오바마는 카다피와 악수를 나눈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러나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텐트 관련 분쟁으로 미국과 서먹한 순간을 맞기도 했습니다. 한편 크라이스트처치 군악대는 그의 독재 40주년을 기념하는 군악 연주회도 열었습니다. “카다피는 군악 연주도 자신이 원하던대로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카다피는 또 자신이 원하던 여성 경호원도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정권이 붕괴 위기에 처한 지금, 정권 이양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의문입니다. “나토군과 반군간에 이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리비아 반군은 민주적인 선거를 약속했지만 전쟁이 끝나면 국민들간의 의견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국제관계 전문가 패트맨 교수는 전망했습니다.

 

 

리비아의 상황을 다시 요약해보겠습니다.

리비아 반군이 수도 트리폴리에 입성해 승리 자축 분위기에 있으며 트리폴리의 15-20%를 장악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카다피의 운명은 아직 확실치 않은 가운데 그의 두 아들이 생포됐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이 그의 망명을 받아들일 것으로 보입니다. 뉴질랜드 정부는 반군에 원조를 제안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 금요일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탈레반 공격으로 숨진 뉴질랜드 SAS군인은 더그 그란트 상병으로 밝혀졌습니다. 41세 그란트 상병은 레빈 인근 토코마루에 거주해왔으며 부인과 함께 린턴 부대 소속이었습니다. 더그 그란트의 21년 군생활이 지난 금요일 아프가니스탄의 교전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란트를 포함해 16명의 뉴질랜드 특수군인은 카불의 영국 문화 협회 건물에서 발생한 자살폭탄테러 현장에 출동했습니다.

 

당시 이들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위기대처반 CRU도 함께 출동했습니다. 우리 SAS군은 정확한 숫자는 파악되지 않지만 민간인을 구출하는 임무를 맡았었고 CRU는 테러범 공격을 맡고 있었습니다.” 당시 출동한 뉴질랜드 SAS군은 두 개의 그룹으로 분리됐습니다. 한 그룹은 민간인 표적을 수색중이던 반군이 점령한 건물로 진입했고 나머지 한 그룹은 건물 1층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건물에서 그란트 상병이 상황 파악중에 한 발의 기관총 또는 라이플총 공격으로 숨졌습니다. 총알이 한 쪽 겨드랑이로 들어가 심장을 관통해 다른 쪽 겨드랑이를 뚫고 나왔습니다.”

 

미군 헬기에 구조될 당시 그란트 상병의 맥은 뛰고 있었으나 병원에 옮겨진 뒤 숨을 거뒀습니다. 그란트 상병의 시신은 현재 린턴 부대로 운구되고 있으며 린턴 부대에는 조기가 게양됐습니다. 고인의 가족은 그란트의 친구와 동료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란트가 하는 일을 크게 신임했다고 전했습니다. 현재 그란트의 빈자리를 대신할 후임을 결정하는 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남은 군인들이 신속히 전사한 군인의 빈자리를 채우고 임무에 집중하는 것이 군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란트 상병의 빈자리는 유족에게는 더욱 크게 느껴질 것이며 유족들은 오늘 인터뷰를 거부했습니다. 한편 더그 그란트 상병의 장례식은 오클랜드와 린턴에서 두 차례 거행될 예정입니다.

 

 

3.     크라이스트처치 경찰측은 한 남성의 절도건에 관한 혐의를 취소했습니다. 용의자인 스미스 부켐프는 정신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으며 절도를 멈출 수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2월의 지진이 발생한지 6개월이 지났습니다. 스미스 부켐프는 이후 법정에 출두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그들이 발언한 것 때문에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25세의 그는 지진이 발생한 3일 뒤 파트너와 함께 피해지역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기나긴 날들을 유치장에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후 그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그는 약한 지적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변호사는 그가 체포되었을 당시 그의 상황을 파악 했어야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만약 이번건에 관한 정확한 조사가 있었다면 더욱 빨리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정신과 검사결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고 합니다. 경찰측은 그는 체포 당시 경찰에 의해 신체적 부상을 입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를 체포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육체적 힘을 가해야 했습니다. 당시 경찰들의 체포작전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스미스 부켐프는 경찰에 피해보상을 요청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4.     리사 케링턴이 뉴질랜드 여성 최초로 카약 메달을 획득했습니다. 그녀는 베이 오브 플렌티 근교의 작은 지역 출신입니다. 22세의 그녀는 런던 올림픽의 유력한 금메달 리스트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그녀를 지도했던 체육 교사는 그녀의 노력을 칭찬했습니다.

 

39 998의 기록으로 역사에 남게되었습니다. 환상적인 경기와 결과였습니다.” 80년대의 대표적인 남성 카약선수인 폴 맥도날드는 그녀가 또다른 골든 제너레이션의 일부임을 밝혔습니다. “여성팀은 많은 노력을 합니다. 선수들에게 필수적인 항목입니다.” 맥도날드는 이번 우승이 해양 스포츠계에 희소식이라고 밝혔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도전을 받을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많은 어린 여성들이 스포츠를 인생의 목표로 정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크리스는 여전히 파카타네 고등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녀가 노력파라고 밝혔습니다. 그녀의 정신력은 매우 강했습니다.” 그녀는 5년전 카약 선수를 시작했습니다. 다른학생들이 학업과 파티에 신경쓸때 많은 시간을 연습에 희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그나이때 할수 있는 많은 것들을 희생해야 했습니다.” 그녀는 런던 올림픽 카약종목에서 금메달 1순위로 떠올랐습니다.

 

 

5.     무루페라 지역의 산림업자가 지난주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파트너와 함께 웰링턴에서 식사를 했으며 이후 직장에 휴가를 요청했습니다. 직장대표는 이유를 물었고 사실을 말하자 휴가를 허락했습니다. 또다른 1 2백만 달러복권 당첨자는 파파토이토이지역에서 나왔습니다.

 

 

6.     10명중 2명이 필 고프의 선거 승리에 의구심을 표했습니다. 3뉴스가 진행한 조사에서 노동당 지지자들 3명중 1명은 그의 대표직 사임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필 고프는 그 동안 여러가지 정책을 주장하며 정치적 생존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조사자들이 30년 경험의 정치 베테랑이 다음 선거에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조사 결과에는 78%가 선거 승리를 예상했으며 16%는 실패 7.5%는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이것은 MMP 선거입니다. 선거철이 되면 사람들이 관심을 보내기 시작할것입니다. 승리를 자신합니다. 이것은 뉴질랜드를 위한것입니다. 미인대회가 아닙니다.” 하지만 노동당 지지자 2명중 1명꼴로 그의 승리에 의구심을 표했습니다. 조사 결과에는 37%가 그의 승리를 예상했으며 56%는 그의 패배를 예상했습니다. 10%는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고프측은 긍정적인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뉴질랜드 소유를 지키며 새로운 세금정책을 지지할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3뉴스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노동당은 국민당에 25포인트차로 뒤지고 있으며 패배가 예상됩니다. 노동당 지지자들에게 고프가 대표로 계속 남아있기를 원하는지 조사했습니다. 30%는 계속 남기를 원했으며 65%는 그의 사임을 원했습니다. 5%는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고프측에 왜 대표자직을 다른이에게 넘기지 않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저는 다음 선거까지 노동당의 리더직을 이끌것입니다. 그리고 11 26일 선거이후 정부를 새로운 정부를 출범할 계획입니다.” 노동당의 고참 위원은 오늘의 조사내용과 관련하여 발언했습니다. “실망적이며 어떻게 할수 없는 결과입니다.” 한 노동당 의원은 고프가 대표직에서 물러날 확율이 10%미만이라고 밝혔습니다. 그의 자리를 대체하여 책임을 질만한 의원이 없다는게 그의 설명입니다. 현재 고프의 리더쉽에 관한 의견들은 심각한 걱정을 주는 수준은 아닌것으로 그는 주장했습니다.

 

 

 

7.     정부는 크라이스트처치의 지진피해와 관련한 심의회에 참석할 가족들에게 변호사비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정부측은 지난주말 피해가족들과 만난후 이러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변호사비로 37 5천 달러가 지출될 예정입니다.

 

 

8.     전 블루스팀 럭비 선수인 커티스의 판결이 한주뒤에 발표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 부동산 업자에게 폭력을 휘두룬 혐의로 법정에 출두했습니다. 그는 당시 암검사등으로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커티스는 사건당시 해머를 소지한 혐의와 글렌 쿠퍼에 관한 폭력 혐의의 무처분을 요청했습니다.

 

부동산 업자인 글랜 쿠퍼는 커티스는 투자의 실패로 그에게 40만 달러의 피해를 야기시켰습니다. 커티스의 변호사측은 당시 커티스가 암진단등으로 인하여 논리적인 행동을 할수 없었을 시기였다고 주장했습니다. 금요일 검사 결과가 전달될 예정이었으며 전날 그와 쿠퍼는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의 손실액은 돌려받을수 없을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재판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암판정으로 인하여 그는 일본에서의 선수생활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럭비 선수의 희망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럭비는 제 삶의 이유입니다.” 그는 여전히 골수암 추가 진단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많이 회복된 기분입니다. 항암 치료를 마지막으로 받은지 몇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다른 치료 방법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멕시코에서 치료를 계획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는 모금활동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법정의 판결발표때 까지는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다음주에 그의 판결 결과가 발표될 예정입니다.

 

 

9.     77명이 사망한 노르웨이 대학살 사건의 추모 행사가 오슬로에서 열렸습니다. 피해자 가족들, 정치인들 그리고 유명인사들이 이번 추모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수백명의 피해자 가족들이 추모행사에 참석했습니다.

 

헤롤드국왕이 연설을 했습니다. “지난 4주간은 국가적인 고난의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모두 함께할수 있었으면 합니다.” 아하는 이번 행사를 위해 재결합 했으며 80년대 히트곡인 스테이 온 디스 로드를 열창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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