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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2011.11.14 17:43

어느 한 중국공산당 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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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중국공산당 당원




나에게는 오클랜드에서 알게 된 중국공산당원 신분인 지인이 한분 계신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까지 반공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온 나에게 국적을 떠나서 공산당 지인이 있다는 사실자체만으로 사고의 큰 전환이 아닐 수 없다. 나에게는 대만유학 시절 알게 된 중국국민당 친구들은 꽤 많이 있지만, 중국공산당 친구들은 별로 많지 않다. 공산당 친구들은 대부분 뉴질랜드에 온 후로 알게 된 이들이거나, 1990년대 이후 중국방문을 통해서 알게 된 이들이다.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민당 친구들이 하는 말과 공산당 친구들이 하는 말을 골고루 들어야만 객관적인 균형감각을 유지할 수 있다.


이 분은 만주에서 1938년도 출생이니까 금년 연세가 73세이시다. 성씨가 왕(王)씨이니까, 추측해보면 거슬러 올라가면 조부(祖父) 때인 청나라 말기, 청조 정부정책으로 화동지역인 산둥성(山東省)에서 인구가 희박한 만주를 개척하기 위하여 정부가 장려한 이민정책으로 인해 만리장성을 넘어서 만주지방으로 이주한 것이리라 본다.


이 분의 출생지는 중국동북 만주의 길림성(吉林省) 쌍료현(雙遼縣)......, 일제시대, 그 지역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宣統帝) 부의(傅儀)가 일본의 꼭두각시가 되어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운 곳이자, 마적들이 우글거려 고국을 떠나 새로 삶의 터전을 그곳에 마련한 한인들이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고, 일대에서 활약하던 항일 한국독립군을 잡으려고 일본 관동군들이 혈안이 되었던 곳이자, ‘동북항일연군’(중국공산주의자들과 연대한 한인공산주의자들의 항일 빨치산) 유격대의 근거지이기도 하였다.


내가 해밀턴의 직장(와이카토대학)을 떠나 오클랜드로 이사 온 2000년 초, 노스쇼어(North Shore) 밀포드(Milford)의 집근처에서 산보하다가 어느 날 길거리에서 그 분 내외를 처음 만난 것은 지금부터 약 12년 전의 일이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가까워지자 가정방문도 하고 그러다가 이제는 ‘한 집안 사람’(一家人)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제 나와 그 분 가족들 사이에는 가족과 같은 정감으로 교분하면서 나는 그 분 내외를 부모처럼 대하여 자주 방문하고 안부를 여쭙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그 분들도 표현은 안하시지만 나를 자식처럼 여기실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내가 북경방문 할 때면 그분들은 지인에게 맡겨놓은 아파트 열쇠를 나에게 전해 주신다. 성품이 온화하시고 만날 때면 항상 반갑고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대해 주셔서, 나에게는 돌아가신 선친을 연상하게 하는 분이다. 이제는 서로 남에게 쉬이 할 수 없을 마음속의 말이나 집안사정도 털어놓는다.


북경에서 한의과 대학교수출신이신 이 분(王嘯天 敎授)은 생애동안 죽을 고비를 네 번 넘기셨다고 한다. 첫 번째는 8살 때인 1945년 7월, 패망을 눈앞에 둔 일제(日帝)가 만주에서 생체실험을 하고 세균전(細菌戰)을 준비하면서 개발한 세균바이러스를 살포하는 바람에 맞이하였다고 하셨다.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웠던 일제의 만행을 몸소 겪으신 분이시다. 그 때의 일을 그분께서는 최근에 중국에서 출판한 산문형식의 회고록 <生活之歌>에서 자세하게 적어 놓으셨다.


가족 중 부친은 아침 9시경에 토사곽란을 일으키기 시작한 후 밤 10시경에 돌아가셨고, 이틀 후 삼촌과 숙모가 돌아가셨고, 전체 읍내 인구 5만 명 중 4만 명이 보름 동안에 희생당했다고 쓰셨다. 이 분도 어린 나이에 토사곽란이 시작되었으나 어머니가 업고 다른 고을의 한의원을 찾아가 약을 먹인 후 보름 후에 호전되고, 3개월이 지나서야 완전히 회복하였단다.


두 번째 죽을 고비는, 모택동이 10년 동안 중국 전역에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의 광풍을 불러일으킨 후 1년이 지난 1967년에 있었단다. 대학을 졸업한 직후의 일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들은 ‘머리에 먹물이 들어서’ 모택동이 생각하기로 그들은 중국이 필요로 하는 ‘사회주의 형(型) 인간’으로 개조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산골벽지로 내몰아 심한 중노동과 고생을 통하여 강제적인 인간성 개조를 전국적으로 실행하던 초기이다. 그 당시 당한 인격적 수모와 육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그 얼마나 많은 지식인, 작가, 문인, 학자, 예술가들이 자살의 길을 택하였던가!


이 분은 당시 이미 부인과 결혼하여 자식을 한명 낳은 터였고 만일 젖먹이 자식이 없었다면 그 때 자살하였을 거라는 이야기를 나는 두 분으로부터 몇 번이나 들었다. 이들 부처(夫妻)는 요녕성 중의약학대학(遼寧省中醫藥大學)의 입학동기(1959)이자 졸업동기(1965) 이기도 하다.


두 분 모두 한의사 출신으로 북경의 한의과대학에서 교수로 정년퇴임하신 후, 두 딸이 살고 있는 뉴질랜드로 1998년에 이민을 오셨다. 이곳으로 이민 오기 직전 2년 반 동안, 중국정부와 협약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파견되어 침술과 한의학을 가르치며 임상진료하신 경험이 있다.


중국에서는 국무원 산하에서 정부의료정책을 자문하던 멤버로 활약하셨다니 이 분의 공력과 한의학계 신망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도 오클랜드의 중국인 한의사들은 이들 내외분(王嘯天 張彤)을 모셔다가 가끔씩 세미나를 열곤 한다. 서양의학 분야에도 이분들은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다. 내외분은 물론 그동안 우리가족의 한방 주치의를 하신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오클랜드에서 내가 아는 분들 중 불치의 난증으로 다년간 고생하는 지인들을 데리고 가서 큰 효험을 보게 하기도 하였다. 이제 이분들은 연로하셔서 더 이상 환자를 진료하시지 않는다.


어느 날 함께 한담을 나누다가 내가 물어 보았다. 동북만주는 지리적 근접성 때문에 한국의 6.25 전쟁 때 중국인민지원군을 가장 많이 징병한 곳이니, 가족 중에 한국전쟁 중 북한을 도와 참전한 이가 없었느냐고..........


입가에 잠시 엷은 미소를 띠시더니 있었다고 대답하시고, 5촌 아저씨 두 분이 참전하였고 그 중 한 분은 전사하였다고 말했다. 그 밖의 얘기도 더 주고받은 게 있지만, 여기서는 일일이 다 말할 수가 없다. 그 분께서 들려주신 중국에서 몸소 겪으신 경험담은 중국현대사를 연구하는 나에게는 중요한 사실적 자료이자 증거이다.


중국공산당이 1949년 말에 전 중국을 공산화하기 2년 전인 1947년에 가장 먼저 적화한 곳이 바로 만주이다. 그만큼 만주는 소련, 중국국민당, 중국공산당이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일본패망 직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각축을 벌였던 곳이다. 장차 패망할 일본이 남기고 갈 막대한 양의 군수공장, 기계, 물자를 전리품으로 챙길 수 있는 곳이기에 더욱 그랬다. 만주는 내가 중국현대사의 진실을 밝혀내는 작업을 하면서 학문적으로도 매우 높은 관심을 끄는 지역이기도 하다.


만주가 나에게 높은 관심을 끄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서간도와 북간도가 만주에 있고, 항일독립 무장투쟁 단체인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가 그곳에 있었고, 김일성이 그 일대에서 10여 년 간 항일 빨치산 활동을 한 곳이므로 중국공산당과의 깊은 관련이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만주지역에서 김일성의 활동상을 모르면 북한정권의 탄생과 북한공산당을 이해하기가 어렵고, 그로부터 왜곡되기 시작한 한국의 현대사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남한만이나 북한만의 것이 아닌 남북한 공통의 현대사이어야 한다. 만주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 때부터 우리 조상들이 대륙의 혼을 안고 웅비하던 고토(故土) 이기도 하다.


나는 이 분을 생각할 때면 만주가 떠오르고, 만주가 떠오르면 젊은 시절 항일빨치산의 한 주역이었던 김일성이 떠오르고, 김일성이 떠오르면 6.25가 떠오르고, 그 다음은 우리민족의 비극과 분단현실이라는 일련이 상기법(想起法)에 의해 연상된다.


얘기가 잠시 빗나갔다. 2009년 가을에 이 분 내외는 중국을 다니러 가서 대학졸업 후 50년 만에 동창생들을 만나고 돌아와 흥분이 가시지 않는 어조로 나에게 하던 말씀이 기억난다. 당해 연도 졸업생 99명중 35명이 모였다니 그 감회가 실로 어떠하였을까!


나의 경우도 헤어진 지 35년 만에 옛날 시골 초등학교와 중학교 동창생 모임을 오클랜드에서 인터넷 카페를 통해 찾아냈을 때의 흥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50년 만에 만났다는 그 분들은 헤어지기 직전에 서로 부둥켜안은 채로 눈물을 흘리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더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살아서 헤어짐(生離)이 곧 영원한 작별’(死別)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문득 남북으로 갈라서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적대하고 있는 남북한을 생각해본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치적인 이유로 헤어진 가족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얼마나 많은 생리(生離)가 곧 사별(死別)이었을까!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과연 그렇게 처절하게 우리 한민족을 남북으로 갈라놓아야할 역사적 필연성이 있는 것일까? 공산주의자는 인간도 아니고 피도 눈물도 없다고 어릴 적부터 배웠던 나는 중국공산당원인 이 분을 생각하면서 많은 점을 생각하게 한다.


같은 공산당이지만 중국인과 한국인의 경우는 다른가? 민족이 다르니 적대적인 공산당원 간에도 우정을 나눌 수 있는데, 왜 동족끼리는 그것이 어려운가?........왜 다를까?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하면 그저 가슴만 답답해질 뿐이다.



박 인 수

(2011.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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