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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2013.03.04 18:13

아오야먀(靑山)의 맹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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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야먀(靑山)의 맹세

 

-오클랜드한인회 주최 제 94주년 3.1절 기념행사 강연문 요지- (2013. 3. 1)

 

해마다 국가적 경축일이나 기념일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신 순국선열의 애국애족 정신과 공로를 기리며 추모하는 의식을 거행합니다. 대한민국의 4대 국민적 기념일은 개천절(10.3), 제헌절(7.17), 삼일절(3.1), 광복절(8.15)입니다. 4대 기념일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인이 모여 사는 곳에서는 정부기관이나 교민단체에서 기념행사를 거행합니다. 그 중 개천절, 제헌절, 광복절은 우리에게 기쁜 행사이지만 3.1절은 기쁨과는 달리 마음이 숙연해지는 행사입니다.

 

그 까닭은 우리민족이 일제에 의한 경술년(1910) 국치로 말미암아 강압적으로 나라가 합방되었고, 10년 동안 쌓이고 쌓인 민족의 울분이 터져 나왔다가 일제의 총칼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히고 민족적 자존심이 철저하게 말살된 이유 때문입니다. 일제에 의해 쌓인 민족적 울분은 일본군이 동학(東學) 농민들을 학살한 갑오년(1894)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보다 강도 높은 분노는 일본이 한국정부를 간섭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년(1905)의 늑약(勒約) 때부터 깊어집니다.

 

을사조약은 일본이 표현하는 것과 같이 결코 조약이 아니라 우리의 의사와는 반대로 힘으로 강요한 늑약입니다. 조약이란 대등한 국가 간에 상호간 호혜평등원칙에 입각하여 자주적 의사로 맺는 것이지 총칼을 앞세워 강제로 맺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려분별 없이 일제식민사관 학자들에 의한 그릇된 역사교육 탓으로 배운 을사조약이니 한일합방이니 이런 용어를 더 이상 쓰면 안 됩니다. 합방도 결코 한국국민이 원해서 일본과 나라를 합친 것이 아닙니다.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지 2년 후인 정미년(1907)에 한국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습니다. 강제로 해산당한 군대는 분기하여 해산당일 즉각 서울에서 일본군과 시가전을 전개하였고, 많은 군인들은 전국으로 흩어져 의병 모집에 돌입하였습니다. 여기에 지방 유생(선비), 지방관리, 농민, 상인, 심지어 머슴(고용농민)도 궐기하여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대일본 무장투쟁은 1907년부터 1945년 해방되던 날까지 국내와 해외에 걸쳐 중단함이 없이 지속된 것입니다.

 

일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3밀사를 파견하였다는 이유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장 군대를 해산해 버렸습니다. 19078월의 일이었습니다. 그 직후에 일어난 의병투쟁은 사실상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한 한일양국간의 전쟁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서울을 제외한 전국에 모두 8개 지방 진위대가 있었습니다. 수원, 청주, 대구, 광주, 원주, 해주, 평양, 북청에 있던 8개 지방 진위대가 모두 해산 당하였습니다.

 

지방 진위대 중 북청 진위대가 가장 늦게 9월에 해산 당하였습니다. 조선팔도에서 가장 첩첩산중인 함경도 북청 진위대와 삼수 갑산 단천 등지에서는 예전부터 포수들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포수들로 구성된 의병대의 대장이 바로 유명한 홍범도(洪範圖) 장군입니다. 평소 맹수를 사냥하는 포수는 사격의 명중률이 아주 높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두만강 넘어 북간도에서 청산리 봉오동 전투를 벌여 일본군에게 많은 사상자를 내어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열악한 장비로 무장한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싸워 승리를 이끈 휘황찬란한 전과였습니다.

 

의병투쟁이 발생한지 2년이 지난 1909년에 일제의 한국 강제합병의 원흉인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이 중국 동북 흑룡강성의 하얼빈(哈爾濱=합이빈) 기차역에서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쾌거로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등박문이 안중근 의사의 저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당시 일본의 동경에서 듣게 된 한 조선인이 있었는데,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김광서(金光瑞)라는 사관생도였습니다. 후일 김광서는 그의 일기인 <경천아일록>에서 그 날의 감격을 아래와 같이 적어 놓았습니다. “하루는 동경근교에서 대항연습을 하노라니 이등박문 암살이라는 호외가 나돌아 동경시내가 부서지게 떠든다. 나는 가슴이 덜렁한다........... ! 위대하다. 우리도 사람이 있구나.”

 

일제에 의한 강제합방이 있던 19108월 말, 일본 동경시내의 아오야마(靑山) 공동묘지에 몇몇의 한국인 열혈청년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그때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한국인 생도들로서 참석한 이들은 이갑(李甲), 이응준(李應俊), 김광서(金光瑞), 김석원(金錫源), 지대형(池大亨=李靑天), 홍사익(洪思翊) 등이었습니다. 아오야마 공동묘지에 모인 이들은 나라의 운명과 자신들의 장래를 의논하게 되었는데, 모두에게 인망이 있고 영친왕과 친분도 있으며 이왕가에 가까운 홍사익에게 의견을 구했다고 합니다.

 

이에 홍사익은 지금은 배울 수 있는데 까지 배우고 흡수할 수 있는데 까지 흡수하고, 그 위에 실무를 익히고 될 수 있으면 실전까지도 경험해서 충분히 자신이 설 때까지 은인자중하여 기회를 보아 일을 성사시키자라고 주장했다 합니다. 일동이 모두 그렇게 하기로 양해하고 맹약을 한 뒤 헤어졌다고 하는데, 이것이 뒤에 아오야마의 맹세라는 말로 일본육사출신 한국인들 사이에 전해 내려왔다고 합니다. 이들 가운데 먼저 졸업해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던 이갑은 그 날을 계기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에 돌입하였고 3.1만세운동을 계기로 지대형(이청천), 김광서(김경천)이 그 뒤를 따랐다고 합니다.

 

지대형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일본육군 대위 때(31) 만주로 탈출한 후 중국대륙(화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 광복할 때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관을 지내신 분이라 익히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김광서, 즉 김경천 장군에 대하여는 아직 많이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1888년 함경남도 단천군 태생인 김경천 장군은 1911년에 일본 육사(23기 기병과)를 졸업하고 동경 기병대 제1연대에 배속되었습니다. 1915년에 기병 중위가 되고, 1917년에는 9개월 동안 육군기병학교의 기병기술과정을 완벽하게 마쳤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분이 나중에 백마를 타고 북간도와 러시아령 연해주 등지에서 활약했다는 전설의 김일성 장군이라는 소문의 주인공이 됩니다. 말하자면 독립투쟁사에 등장하는 김일성 장군으로 말달리는 선구자노래가사의 주인공으로 됩니다. 북한 수령체제의 주인공인 북한의 김일성(본명 김성주)1919, 이때 7세의 나이로 평양에서 벌어진 3.1만세 운동을 목격하고 사람이 총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쓰고 있습니다.

 

김경천 장군도 역시 19193.1운동을 계기로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됩니다. 먼저 당시 동경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발표한 ‘2.8 독립선언을 접하고는 10년 전의 아오야마의 맹세를 실행할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군에 병가(病暇)를 내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3.1만세 운동의 열기가 총칼로 무자비하게 진압당한 6, 일본육사 3년 후배인 지대형과 함께 만주로 떠났습니다. 그 때의 이별장면은 일본육사 12년 선배이며 부친(김정우)과 친교가 있던 윤치성 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떠났는데 그 장면을 윤치성의 동생인 윤치영씨가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만주에 도달한 후 지대형은 이청천(李靑天)으로, 김광서는 김경천(金擎天)으로 변성명을 합니다. 독립운동을 위해 신분을 감출 필요가 있고 또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하늘()을 두고 다짐했기 때문입니다. 두 분은 남만주 유가현(柳家縣)에 위치한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갔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신흥무관학교는 당시 만주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소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혁혁한 공헌을 하신 이시영 이회영 형제분들이 조상대대로 내려오던 전 가산을 정리하여 가솔들을 모두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에 세운 독립군 양성소입니다. 1913년에 설립한 신흥학교에서 1914년 신흥무관학교로 개명한 후, 당시 일본군과 손잡은 동북만주 군벌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의 압박으로 19208월 폐교될 때까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은 3천명을 넘었다고 하니 그 규모와 그들의 희생정신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 후 졸업생들은 중국대륙과 만주와 연해주로 흩어져 무장 항일독립운동을 계속하였습니다.

 

김경천 장군과 이청천 장군 외에 당시 신흥무관학교에는 해산된 구 한국군 정위(현재의 대위) 출신 신팔균 교관이 있었는데 신팔균도 이름을 신동천(申東天)으로 개명하여 이들을 남만3(南滿3)이라고 불렀습니다. 같은 해에는 중국 남방의 유명한 군관학교인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을 수료한 이범석(李範奭,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장군도 교관으로 잠시 머물렀습니다.

 

당시 만주는 조선에 이은 일본의 두 번째 식민지화의 길로 들어서서 그 영향력 아래에 놓였습니다. 동북 만주의 절대적 군림자인 마적단 두목출신 군벌 장작림은 일본의 무기원조와 만주척식회사의 자금 원조를 받으면서 중국민중의 이익을 배반하고 친일적 매국행위를 하던 곳입니다. 이 때 중국에는 중앙정부란 존재하지 않았고 대소의 군벌(軍閥)들이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전쟁을 일삼던 군벌천하의 혼란한 시대(1916-1927) 이었습니다. 군벌의 졸개들은 마적행위를 서슴지 않았고, 마적을 가장한 일본군은 독립운동을 근절하기 위해 한인동포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일이 허다하였습니다.

 

각지에 할거하던 군벌은 중국민중의 이익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들과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등 제국주의 국가들과 각각 개별적인 거래를 하면서 중국을 사분오열시켜가고 있었습니다. 모택동의 중국공산당도 이미 비밀리에 결성되어(1921.7) 지하활동을 개시하여 급속하게 민중으로 파고들던 때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몇몇 독립 운동가들은 중국공산당의 초기 도시폭동에도 동참합니다. 그들은 중국혁명에의 동참이 조국광복을 앞당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장차 독립될 한국은 공산당이 다스리는 사회주의 국가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중국의 상황이 그러하니까 넓은 중국대륙을 헤매는 한국독립운동 단체들도 각지 군벌들의 눈치를 살피며 거래를 해야 하던 때였는데, 다행히도 이시영, 신규식, 조소앙 등을 위시한 선각자 분들은 중국의 장래를 이끌어나갈 세력으로 남방의 혁명군(후일 중화민국 국민당정부)을 주시하고 이들과 연계하여 중국혁명의 지도자로 중화민국의 국부로 추앙받던 쑨원(孫文=손문) 선생과 접촉하여 그들의 동정을 얻어냈습니다. 신규식 선생 같은 분은 국내의 전 재산을 중국혁명을 위해 기부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들이 있었기 때문에 손문 선생으로부터 장차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승인 내락을 받아두었고,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곧장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는 기초를 닦았던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1920년대에 들어 만주에 대한 일본의 지배야욕이 점차 강화되면서 만주사정이 급변하자, 이청천 장군은 임시정부와의 공작을 위해 상하이로 떠났고, 김경천 장군은 연해주(러시아)로 무기입수를 위해 떠났습니다. 연해주에 도착해보니 그 곳 한인동포사회 역시 일본군에 의해 무참하게 탄압받고 학살당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러시아에서 발생한 볼세비키 혁명(1917)으로 니콜라이 황제(짜르) 일가족이 피살당하는 혁명이 있습니다. 러시아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소비에트 사회주의(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혁명지도자 레닌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주창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한인동포들은 레닌의 혁명을 지지하였습니다.

 

볼세비키 혁명은 점차 시베리아 연해주로 확대되었는데, 그 혁명의 파급을 막기 위해 일본군이 연해주로 출병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군국주의는 일종의 전체주의인데 전체주의는 공산주의와 적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하여 한인 독립군은 혁명군(적군) 편을 들었고, 일본군은 니콜라이 황제에 충성하는 반혁명군(백군) 편이었습니다. 한인독립군은 혁명군편을 들어 일본군을 내쫓고 그들의 후원으로 국내로 진입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연해주에 도착하여 일본군에 의한 동포학살을 보다 못한 김경천 장군은 1920년대 초반 6백 명에서 1천명의 독립군 병력을 거느리고 연해주와 북간도 지역을 누빈 사람으로 일본군 정보문서에 기록이 나옵니다. 이 때 김경천 장군은 백마를 타고 다니며 전투를 지휘하였으며, 또 하나의 이름인 김일성이란 별호로 활동하였다고 전합니다. 이처럼 그의 활동이 두드러지자 당시(19221) 동아일보의 나경석(羅景錫) 기자가 연해주로 그를 방문하여 취재한 기사가 노령견문기로 국내에서 연재되었습니다. 나경석 기자의 기사는 해외의 독립투사와 인터뷰한 것으로는 일제하 35년간 유일한 것으로 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922년 가을이 되자 볼세비키혁명은 러시아 전 영토에서 성공하고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일본군이 철수하였으며 시베리아를 장악한 레닌정부는 한국인 무장활동을 일체 금지시켰습니다. 대소 한인무장부대는 정식으로 소련 적군에 편입하던지, 무장해제하던지, 아니면 영외로 퇴거하던지 하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연해주에 남아있던 약 20만의 한인동포들은 1930년대 중반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집단이주를 당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전설상의 김일성(김경천) 장군의 이름은 점차로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갔고, 나중 19458월 해방이 되자 나이 33세의 젊은 김성주(金成柱)가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북한에 돌아와 소련(스탈린)의 꼭두각시(괴뢰) 정권을 세웠습니다.

60여년의 세월이 흐른 1980년대 후반에 와서 대한민국은 고르바쵸프 서기장이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으로 소련과 국교를 수립하게 되었고, 재소 동포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경천 장군은 스탈린 치하에서 감옥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2차 세계대전 중 최대고비였던 1945년 봄 동독전선에서 김경천 장군은 소련군 지휘관으로서 죄수부대를 이끌고 훌륭하게 싸우다 전사하였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 분의 따님들은 중앙아시아 타슈켄트의 알마타에서 살았다고 하며, 1998815일에 김경천(김광서) 장군은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어 대통령 포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구한말 나라의 운명이 다해 어쩔 수 없이 일본 군국주의 군사교육을 받고 군인으로서 입신한 김경천(김광서) 장군께서는 망국의 청년으로 가슴에 맺힌 한을 풀기위해 굳은 맹세로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활약하시다가,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지도 못한 채 소련 땅에서 갇히는 몸이 되었고 타국 땅에서 일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의 혼령이 살아계신다면 지금도 조국의 하늘위에서 맴돌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 3.1절 기념일을 맞아 그동안 우리가 잘 몰랐던 애국선열 지사 김경천 장군의 생전 발자취를 살펴봄으로써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강연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박 인 수

2013.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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