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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뉴질랜드 한국대사관이 개설된 지 40년


한 일 수 (경영학박사/전 뉴질랜드한인사 편찬위원장)

개인이나 단체 또는 조직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성숙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망각할 때 늙어갈 뿐이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는 동물은 오직 인간뿐이다. 인간이 만든 단체나 조직도 마찬가지이다.

뉴질랜드로 한국인의 본격적인 이민 역사는 1991년부터로 거슬러 올라갈 수가 있다. 1991년에 드디어 재뉴 한인의 수가 1000명을 넘어섰고(체류자 및 원양어선 선원 포함) 동년 11월에 뉴질랜드 정부의 점수제 일반 이민 제도가 시행되기 시작되었다. 이는 1992년부터 획기적으로 한인사회가 팽창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웰링턴에서 결성된 뉴질랜드 전체 한인을 대표하는 재뉴한인회가 끝나고 지역 한인회 시대로 재출발한 것도 1991년부터이다. 오클랜드한인회, 크라이스트처치한인회, 웰링턴한인회의 역사를 20년으로 보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1991년에서 20년 뒤로 거슬러 올라가면 1971년 7월에 주뉴 한국대사관이 개설된 때이다. 1948년 8월에 한국 정부가 수립되자 뉴질랜드 정부는 1949년 7월에 한국을 정식 승인해주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뉴질랜드 정부는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고 현재까지 참전용사들과는 끈끈한 유대관계를 지속하고 있다. 1962년 3월에는 한-뉴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무역, 경제, 기술협력관계를 증대해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콜롬보 플랜에 의한 한국유학생들이 뉴질랜드 정부의 전액 장학금 지급으로 낙농, 원예, 임업 분야의 생산과 마케팅 공부를 하고 돌아갔다. 1968년 9월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뉴질랜드를 국빈 방문했고 10월에는 Holyoake 뉴질랜드 총리가 한국을 답방하였다.

박대통령이 뉴질랜드를 방문했을 때 한인회는 물론 한국의 공관도 없어 어떻게 환영 절차가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단지 콜롬보 유학생과 한뉴 비즈니스 관계자들이 수고했다고 본다. 이를 계기로 1968년 10월에 한-뉴협회가 결성되고 민간외교의 역할을 수행했다.

대사관이 개설되던 1971년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1971년 1월에 외교관계에 관한 빈(Wein)협약이 한국에 대하여도 효력을 발생하였다. 이에 따라 그해 6월에 주한 뉴질랜드 대사관이 개설되고 7월에는 주뉴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다. 대사관은 개설되었으나 대사는 호주대사가 겸임을 하였고 동년 11월에 박 영 대리대사가 부임하여 1974년까지 초창기 재외공관 업무를 개척해나갔다. 당시 뉴질랜드는 1940년대 말 이래 1970년대 초까지 농축산업의 엄청난 흑자 실현으로 최고의 경제호황을 누렸으며 전 세계에서 두 번째 가는 부자국가였다. 뉴질랜드 달러는 미국달러보다 가치가 훨씬 높게 평가되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뉴질랜드 병사들은 무엇보다도 혹독한 추위에 고생을 많이 한바 있다. 그런데 한국전쟁 덕분에 국제 양모 값이 폭등하여 뉴질랜드 경제 성장의 기폭제가 되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1971년 당시 뉴질랜드 한인사회는 어떠했을까? 1960년대부터 한국의 원양어선 선원들이 단기 체류로 뉴질랜드를 드나들었고 콜롬보 플랜에 의한 유학생들이 장·단기 체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식 이민에 의한 정착자는 손꼽을 정도였다. 1962년에 입양되어 온 김성미양(1971년 당시 15세, 현재 웰링턴 거주), 1968년에 참전 용사와 결혼해 오클랜드에 정착한 Mrs. Morton, 1969년에 크라이스트처치 링컨 칼리지 연구원으로 취업해 온 정재훈 박사 가족, 1969년에 오클랜드에 정착한 김영이 씨 가족 등이 파악되고 있을 뿐이다.

대사관이 개설되자 소수의 한인 사회이지만 대사관을 중심으로 구심점이 형성되고 그 후 유입되는 한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73년 10월에는 오클랜드에 한국무역관이 개설되어 양국간에 상품교역이 활발하게 움직일 계기를 마련했다. 뉴질랜드 녹용산업은 한국인에 의하여 개척되다시피 되었다. 대사관, 무역관 직원과 그 가족 및 원양어선 선원, 유학생 등 장·단기 체류자를 포함하여 한인의 수가 70여 명으로 늘어나자 한인회의 창립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드디어 1974년 10월에 당시 강춘희 초대 대사관저에서 ‘재뉴질랜드 한인회’ 창립 모임이 열리고 박흥섭 씨를 회장으로 선출했다.

오늘날 한국은 뉴질랜드의 6대 수출대상국이 되었으며 뉴질랜드의 중요한 관광, 유학 산업 상대국이다. 뉴질랜드에서 수학한 대니 리, 리디아 고 등은 골프 세계 챔피언이 되어 뉴질랜드 국위를 선양해주고 있다. 또한 학업, 예술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한인 차세대들이 배출되고 있다. 뉴질랜드 한인팀은 세계 한민족 체육대회에서 두 번이나 종합우승을 차지했고 해외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국회의원도 배출했다. 앞으로 뉴질랜드 내에서 한국과 한국인의 위상이 계속 높아지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사진: 대사관저 전경 (뉴질랜드 한인사 P.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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