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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한인사회의 태동과 성장/발전

한 일 수(경영학박사/전 뉴질랜드한인사 편찬위원장)

사회는 공동의 목적과 이해관계를 기초로 하는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면서 형성되는 개인들의 집합이라고 정의된다. 한인회의 명칭은 영어로 ‘The Korean Society’로 표기되는데 뉴질랜드에서 한인회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규모의 거주자가 필요했고 이해관계를 기초로 하는 한인들의 상호작용이 지속되어야 될 당위성이 요청되었다. 뉴질랜드 한인회 창립 40주년을 맞아 한인회 이전과 이후를 돌아보며 미래를 생각해본다.

1945년 3월 당시 뉴질랜드 통계에 의하면 4명의 한국인이 뉴질랜드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 3명은 1931년 이전부터 거주하였으며 1명은 1911년 이전에 입국하였다고 하는데 인적 사항이 기록되지 않아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다.

1953년 5월에는 한국은행 국고부장으로 봉직하고 있던 한상원(당시 35세)씨가 뉴질랜드에 입국하여 6개월 간 뉴질랜드의 중앙은행 제도를 연구하고 돌아갔다. 필자는 2006년 6월에 한상원 씨를 직접 만나 귀중한 자료들을 전달받고 이를 한인사에 반영할 수 있었다. 이어 7명의 간호사들이 1950년대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 뉴질랜드에서 연수를 받고 돌아갔다.

1962년도에는 여섯 살 된 김성미가 뉴질랜드 가정에 입양되어 웰링턴에 거주하였다. 그 해 3월에는 한국과 뉴질랜드의 국교가 수립되고 그 후 한국의 원양어선들이 남태평양에 진출하면서 웰링턴, 리틀턴 및 타우랑가에 정박하였다. 선원들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선교회관에서 자원봉사자들의 보살핌을 받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웰링턴, 왕가누이, 티마루, 블러프 등에 한국 수산회사들의 원양어선 전진기지가 설립되었다.

1965년부터는 콜롬보 플랜에 의한 한국의 유학생들이 뉴질랜드 정부로부터 학비, 생활비는 물론 교재비, 용돈까지 포함된 장학금을 받아 뉴질랜드에서 교육을 받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주로 6개월 연수의 영어교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당시 목축, 낙농, 원예, 임업 분야에서 세계 첨단을 걷고 있던 뉴질랜드의 학업을 이수하고 돌아간 유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고국에 돌아가 1970년 대 이후 조국근대화와 경제 발전의 주역으로 기여를 했다. 뉴질랜드 정부는 1988년까지 263명의 콜롬보 유학생을 받아들였는데 2003년 한국의 밤 행사 때 당시 헬렌클락 총리가 콜롬보 유학생을 언급하면서 263명의 숫자까지 열거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1968년에는 한국과 뉴질랜드의 정상들이 상호 교환 방문을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 내외분과 영애 박근혜 양이 동행하였는데 그 때는 대사관, 영사관은 커녕 한인회도 없었던 때라 어떻게 환영행사가 이루어졌는지 궁금한 일이었다. 2012년 한-뉴 수교 50주년 행사 때 박대통령 방뉴 당시 자료를 검색하는 과정에서 기록 필름을 찾아냈다. 수 십 명의 환영객들이 태극기를 들고 영접을 하는 영상이 발견되었는데 아마 원양어선 선원과 콜롬보 유학생, 뉴질랜드에 비즈니스로 와있던 기업인들이 주축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 해에 한국-뉴질랜드 협회가 결성되고 그 회원들은 민간 차원에서 한-뉴간 유대강화를 증진하는데 역할을 해왔다.

1971년에는 한국에 뉴질랜드 대사관이, 그리고 뉴질랜드에 한국대사관이 개설되었다. 국교 수립 9년 만의 일이다. 이로서 한-뉴 관계가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한인 사회도 구심점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었다. 1973년에는 오클랜드에 한국무역관이 개설되어 양국 간 교역 증진의 길이 열렸다.

1974년에는 한인회 구성이 논의되기 시작했고 드디어 그 해 10월에 당시 강춘희 대사관저에서 뉴질랜드 한인회 창립 모임을 갖게 되었다. 콜롬보 플랜에 의한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있던 박흥섭 씨를 회장으로 선출함으로서 한인회가 시작된 것이다. 창립총회 때는 40 여명이 전국에서 모여 야유회, 운동회를 개최하며 한인들끼리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당시 뉴질랜드에 체재하던 전체 한인이 국제결혼으로 영주한 몇 가족, 취업으로 온 몇 가족, 대사관/무역관 직원 및 가족과 유학생, 원양어선 선원 등 장.단기 체류자를 포함하여 72명이었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한인회를 갈망하였던가를 생각하게 된다.

한인회가 설립된 이후, 1988년 까지는 한인 시회에 양적인 발전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뉴질랜드 정부가 유색인종에게도 이민 문호를 개방하는 투자 이민법을 발효하자 1989년부터 한인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고 특히 1992년부터는 일반이민 제도에 의한 유입 인구가 급성장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웰링턴에서 전체 한인 사회를 대표하여 존속되어왔던 뉴질랜드 한인회는 1991년부터는 오클랜드, 크라이스트처치, 웰링턴 한인회가 분리하여 출범함으로서 지역한인회 시대가 시작되었다.

유입 인구의 급성장과 더불어 1993년에는 대한항공 직항편이 오클랜드에 취항하였고 1994년에는 한-뉴 비자 면제협정이 발효되었으며 1996년에는 대사관 오클랜드 분관이 개설되었고 1997년에는 국민은행 오클랜드 지점이 개점했다. 한인 사회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과 발전을 거듭해나갔다. 그러나 1997년 말 한국의 IMF 사태로 유입 인구는 줄어들고 뉴질랜드 한인 사회에도 시련이 닥쳐왔다. 2000년대에 들어 장기사업 비자에 의한 유입 인구가 늘어나면서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으나 뉴질랜드 정부의 이민 요건 강화로 다시 한인 인구가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성장과 침체를 거듭하며 경제적인 호황과 불황이 순환되면서도 한인들은 학업, 예술, 스포츠 분야에서 훌륭히 2세들을 교육하였고 뉴질랜드를 대표함은 물론 전 세계에 으뜸가는 인물들도 배출하였다. 자손만대에 뉴질랜드 한인들의 보금자리가 될 한인회관이 1999년에는 웰링턴에서 2013년에는 오클랜드에서 문을 열었다.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이민 선배들을 기릴 때 초창기의 뉴질랜드 한인들은 어떻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 교훈을 남겨주도록 지금 열심히 활동할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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