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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2012.12.12 17:49

강호(江胡) 투쟁 1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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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江胡) 투쟁 10년사 

-중국공산당 제18차 전당대회 감상 후기- 

“안잉퉁즈, 워먼궈지아 씨엔짜이징치앙성치라이러, 칭닌팡씬바!”(岸英同志, 我們國家現在已經强盛起來了, 請您放心吧! --안영동지, 우리나라는 지금 현재 강성대국으로 일어섰으니 아무런 걱정도 하시지 마세요!)

2009년 10월 1일, 전 세계 언론매체들의 관심이 베이징의 텐안먼(天安門=천안문) 광장에 집중되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수립 60주년 기념 특별행사를 보도하고 있을 때, 국무원 총리 원자바오(溫家寶=온가보)는 국무원 관료 20여명을 대동하고 평양을 방문, 북한과 중국의 국교수립 60주년 기념행사를 가진 후 회창(檜倉)에 위치한 6.25참전 중공인민지원군 전사자 열사릉을 참배하고 있었다. 앞에서 인용한 말은 당시 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한지 한 달여 만에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마오쩌둥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모안영)의 묘소 앞에서 국무원 관리들과 도열하여 묵념을 마치고 원자바오 총리가 한 말이다. 마오안잉의 묘소는 열사릉의 가운데 줄 맨 앞 첫째에 위치하고 있었다.     

북중(北中) 혈맹관계부터 말하자면 

마오안잉이 중공 인민지원군으로 참전을 지원했을 때 마오쩌둥은 그를 불러 의향을 직접 들어본 후 그의 참전의지를 확인하고 허락하였다. 그러나 마오(毛) 주변의 많은 이들은 그의 참전을 만류하였다. 당시 정무원(현재의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말했다. “주석님의 가족은 혁명기간 동안 모두 5명이나 희생당하였습니다. 더 이상의 희생은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듣지 않았다. “모든 인민의 아들들이 전사로 지원하는데 주석의 아들이라고 참전하지 못할 이유는 없소.”라며 마오안잉을 참전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35일 만에 아들은 전사하였고,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팽덕회)로부터 직접 전사통보를 받은 마오쩌둥은 잠시 침울해 하였다. 아들의 시체를 중국으로 운구할 것을 건의받자 마오는 “인민의 아들로 참전한 전사들의 유해가 조선 땅에 묻히는데 주석의 아들이라고 조선 땅에 묻히지 못할 이유는 없소. 다른 전사자들과 똑같은 장례로 조선 땅에 묻도록 하시오.”라고 지시하였다. 마오안잉은 28세의 나이로 전사하였으며 그 때 결혼한 지 6개 월 밖에 안 되었다. 인민지원군 열사릉은 지금껏 중조(中朝, 중국과 조선) 우의의 상징이 되고 있다.  
         
마오안잉의 전사는 인민지원군에게 한동안 비밀로 부쳐졌다. 그의 전사소식을 듣게 된 중공 인민지원군은 미군과의 전투에서 열화처럼 싸우다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들이 하늘처럼 떠받들던 마오 주석의 장남이 전사했다는 소문은 삽시에 전체 중공군으로 퍼져나갔고 ‘안영을 위해 복수하자’는 의분은 하늘을 찔렀다. 그래서 총도 없이 맨손으로라도 밀고 내려오는 인해전술이 통하게 된 것이었다. 마오안잉의 사망으로 말미암아 당시 미군은 아무리 우수한 무기와 첨단 장비와 물량을 동원해서도 전투에서 가중 중요한 정신적인 투혼에서 중공군 전사들의 사기(士氣)를 누를 수 없게 되었다. 

북한이 성역화해 놓은 6.25참전 중공 인민지원군 열사릉은 상상을 초월하는 그 규모뿐만 아니라 분묘 하나하나마다 사이에 아름드리 소나무를 심어서 매우 정성스럽게 단장한 것은, 보는 순간 부산시 남구 대연동에 위치한 6.25 참전 유엔군 전사자 묘소의 아담한(?) 규모가 떠올라 좋은 대조가 되었다. 물론 유엔군 전사자 보다 중공인민지원군 전사자가 수적으로 월등하게 많았기 때문에 규모가 큰 것은 우선 이해할 만하다. 6.25 참전 중공인민지원군 연인원은 과거 2백만 추산에서 지금은 3백만으로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 중 얼마가 전사했는지는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진 통계는 없다. 참고로 한 참전 인민지원군 전사의 수기에 의하면, 1950년 10월 참전당시 소속 중대 130명 중 휴전 후 살아서 귀국한 수자는 모두 8명뿐 이었다고 쓰고 있다. 전사자도 물론 많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망자는 동사자와 굶어죽은 전사들이었다.  

강호(江胡) 투쟁 십년의 종말

필자가 지금 6.25 참전 중공군에 대하여 길게 언급한 까닭은 한국과 미국의 혈맹관계와 북한과 중국의 혈맹관계를 한번 비교해 보고자 함이다. 그럼으로써 최근(2012. 11. 15)에 폐막한 중국공산당 제18차 전당대회 이후 앞으로 우리가 북한과 중국의 관계를 이해하고 중국공산당 최고 권력층의 북한에 대한 생각과 남북한 관계를 다루는 중공중앙의 정확한 의향을 보다 현실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후진타오(胡錦燾=호금도)의 집권 10년(2002-2012)은 실상 장쩌민(江澤民=강택민)의 ‘리모콘’ 통치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후진타오는 장쩌민의 원격조정에 의해 장쩌민의 의지에 따른 권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후진타오의 통치 10년은 바로 강(江, 장쩌민) 호(胡, 후진타오)의 투쟁 10년 이라고 부를 수 있다. 장쩌민은 어떤 방법을 써서 원격조정을 할 수 있었는가? 

덩샤오핑(등소평)이 1989년 6월 천안문 사태를 수습한 직 후 장쩌민에게 중공중앙 주석직을 맡긴 후에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은 계속 보유하면서 장쩌민을 원격조정 하였듯이, 장쩌민도 덩샤오핑의 유훈(遺訓)에 따라 중공중앙 주석직을 후진타오에게 물려주고서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은 그가 보유하였다. 2002년 제 16기 최종 전체회의에서 장쩌민은 물러나면서도 자신의 15년 주석 재임 기간 동안 인민해방군 내 최고 계급인 상장(上將)에 81명의 친신을 요소요소에 심어두었던 것이다. 이들 중 최고 골수 친신 상장 23명은 16기 마지막 전회(全會)에서 장쩌민의 군사 위원회 주석직 보유를 긴급 발의 후 통과시켰다. 이로써 후진타오는 중공중앙주석에 오르긴 올랐지만 실권은 없는 주석일 뿐이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오래된 경구는 중공중앙의 권력교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물러난 상왕(上王) 장쩌민의 원격조정을 가능케 해준 두 번 째 여의봉은 바로 장쩌민이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도 없는 임시권력기구로 설치한 정법위원회(政法委員會)를 통한 전국적인 규모의 권력기구 장악이었다. 정법위원회는 곧 중공중앙과는 별개의 권력중추로 성장하였고 중국의 공안(경찰), 법원, 검찰, 국안(國安, 정보부), 무경(武警, 무장경찰) 계통을 총망라한 권력기구를 산하에 총괄 지휘하는 제2의 권력 중심이었다. 

후진타오 집권기간 10년 동안 정법위원회 주석은 장쩌민의 최고 친신 수하가 담당하였고, 마지막 5년은 장쩌민의 조카사위 저우융캉(周永康=주영강)이 장악하였다. 저우융캉은 바로 정치국 상임위원회 9인 멤버중 보시라이의 최대 지지자였다. 저우융캉과 보시라이가 제18차 대회후 2년 이내에 시진핑(習近平=습근평) 총서기와 리커창(李克强=이극강) 총리체제를 쿠데타로 둘러엎어버릴 계획을 세웠다가 지난 2월의 왕리쥔(王立軍) 사건으로 만천하에 들통나버렸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처럼 정법위원회는 전국적으로 후진타오의 통치를 옥죄는 두 번째 권력 장치였다. 정법위원회는 헌법을 무시한 불법권력의 촉수이자 시녀(侍女) 기관인 만큼 평소 중국 인민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했다.

세 번째로 장쩌민 상왕권력을 지탱케 한 지주이자 그를 태상왕의 지위로 격상시키려고 권력핵심을 둘러친 것이 바로 상하이방(上海邦)과 태자당(太子黨)의 인맥결합을 통한 공청단(共靑團) 파에 대한 포위 전략이다. 중공중앙 정치국 상임위원 9인은 권력행사로 치자면 9명 모두 전제군주 시대의 황제와 다를 바 없다. 즉 중앙정치국 상임위원 9인은 황제와 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자로서 어떠한 사법처벌도 받지 않는다는 묵계가 지금까지 형성되어 왔다. 후진타오 10년 통치기간 동안 9명의 상임위원 중 6명이 장쩌민 파로 분류되고, 3명 (후진타오, 원자바오, 리커창)만이 소수 공청단파였다. 이상 3개 권력장치를 통하여 장쩌민은 막후에서 후진타오를 옥죄였던 것이다.

후진타오의 최후 일격

후진타오는 장쩌민의 ‘리모콘 통치’를 벗어나기 위하여 그동안 피나는 암중모색을 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막다른 골목에선 쥐도 고양이에게 덤비는 법이다. 후진타오는 그가 물러나기 직전에 기어이 그의 상왕 장쩌민을 물고 늘어졌다. 후진타오는 최후 순간에 목적을 이루었지만 본인도 적지 않은 상처를 입어야만 했다. 권력 이양을 막바지에 앞둔 최후 1개월의 시간을 앞둔 2012년 10월 중순에야 겨우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원래 예정된 10월 전당대회 개막을 11월로 미룬 것도 중공중앙이 이번 제18차 전당대회 개막이 코앞에 닥친 시기까지 내부 권력투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게 한다. 

제18차 대회 개막을 겨우 열흘 앞둔 10월 25일에 후진타오는 그의 후계자인 시진핑과 연대하여 해방군 총참모부, 총정치부, 총후근부(군수사령부), 총장비부 등 4개 총부를 자신들의 친신으로 교체하는데 성공하였다. 11월 1일에는 38명의 상장 계급중 장쩌민의 친신들은 6명만 남기고 모두 교체할 수 있었다. 시진핑은 후진타오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승계한지 열흘만인 11월 23일에 한 명의 상장 계급승진을 단행함으로 장차 군권장악의 서막을 열었다.  

후진타오는 그것만으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고령의 장쩌민을 그로키 상태로 내모는데 성공하였지만 그에게 마지막으로 KO펀치를 먹이지 않고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후진타오 자신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 연임 권고를 물리치고 자진하여 물러난 것이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 이미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노욕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장쩌민을 확실히 도태시키기 위해서 장차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영향력 행사를 포기함으로써 동반퇴진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후임자 시진핑이 퇴임을 극구 만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앙군사위원회주석직함을 본인이 스스로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좌익 강경파의 반격

저우융캉은 마지막 순간까지 정법위원회가 장악하고 있는 촉수를 총동원하여 여태껏 해온 바와 같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언론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영향력의 행사는 바로 돈이며, 그 자금력은 바로 2012년 중공 정법위원회의 1년 예산(7천억 인민폐)이 국방예산(6천 7백억 인민폐)를 초과한 사실에서도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필요하면 국내언론은 말할 나위도 없고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해외언론들도 동원하는 것이다. 지금 세계도처에는 중국인들이 없는 곳이 없고 중국 언론도 없는 곳이 없다. 많은 언론 중에 어느 것들이 정법위원회의 자금으로 운영되는지 해외 중국 지식인들은 다 알고 있다. 지금까지 정법위원회는 필요하면 언제든지 언론 플레이를 통해 자신들의 집권에 유리하도록 해왔다. 정법위원회의 최대 배후에는 역시 장쩌민이 있는 것이다. 

해외언론 플레이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보시라이 범죄 확정 판결을 앞둔 시점인 2012년 11월 초, 제18차 전당대회 개회기간 중에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 보도를 통한 국무원 총리 원자바오 가족의 부정부패 혐의와 재산보유액 발표였다. 원자바오 총리는 역대 국무원총리 중 저우언라이(주은래) 이래 가장 돋보이는 총리였으며, 실제 재산보유액도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상 까마귀는 모두가 다 검다(天下烏鴉一般黑)’라는 중국인들의 풍자처럼, 중국공산당 고급간부들은 모두가 부패한 것이 사실이지만 원자바오 총리는 그래도 청렴한 편이라는 것이 중국인들의 일반적 인식이다. 그는 바로 보시라이의 처벌을 처음부터 강도 높게 주장하여 일관시킨 대가를 이번에 치러야만 했다. 바로 저우융캉의 지시로 보시라이 처벌을 상쇄하기 위한 정법위원회의 흑색선전이 해외 언론을 동원할 정도로 입김이 막강했던 것이다. 그에 대한 정법위원회의 최후 공격이었다.

보시라이 정변음모 발각의 후폭풍 
 
후진타오는 물러나는 마지막 순간에 최대의 정치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시진핑과 함께 정법위원회의 지위를 격하시켰고, 정법위원회 주석직 또한 종래의 정치국 중앙상임위원에서 정치국 중앙위원으로 자격도 격하시켜버렸다. 그 기구는 원래 장쩌민이 초헌법적으로 설치한 기구인 만큼 폐지하는 것이 중국인민들의 안녕과 복지를 위하여 가장 좋을 일이다.         
 
중공 제18차 대표대회는 이제 폐막하였지만 그들 간의 권력투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왜냐하면 보시라이 정변음모에 연루된 태자당과 장쩌민 저우융캉을 위시한 정법위원회 계열의 인물들이 아직도 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베이징의 중난하이(中南海=중남해)의 정치기류는 여전히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시진핑 총서기체제의 출범을 알리기 위하여 11월 말 북한 라오스 베트남 3국 방문특사로 발표하였던 정법위원회 계열인 멍지엔주(孟建柱=맹건주)에서 공청단 배경을 가진 선전부장 류치바오(劉奇葆=류기보)로 바뀌었다가 평양방문 하루전날에 다시 전인대 상무 부위원장인 리젠궈(李建國=이건국)로 돌연 바뀐 것이 이를 여실히 말한다.

태자당의 배후에는 정치국에서 물러났지만 아직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장쩌민 시대의 실력자 쩡칭훙(曾慶紅=증경홍)이 도사리고 있고, 그는 이번 제18대에서 보시라이를 앞세운 훙얼따이(紅二代, 혁명원로 자제로 구성된 제2세대) 를 신세대로 발탁하여 호온습(胡溫習, 후진타오, 원자바오, 시진핑)의 권력을 대체하려는 시도를 줄곧 하고 있었다. 이를 알아챈 호, 온, 습 3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진검으로 승부로 걸었고 현재까지 일단 승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승리의 결과로 태자당 3인을 덤으로 엮을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보시라이의 동생 보시청(薄熙成=박희성), 전 국가주석 류샤오치(劉少奇=유소기)의 아들 류웬(劉源=유원), 인민해방군 상장 출신으로 국무원 부총리를 지낸 왕쩐(王震=왕진)의 아들 왕쥔(王軍=왕군) 등 3인이 걸려들었다. 

이들 3인 태자당들은 보시라이 사건 발생 후 수차 비밀회동을 갖고 후진타오, 원지아바오, 시진핑의 가족관련 비밀재산 자료 수집을 하였고, 그것을 상하이 주재 외국 언론인에 흘려보내 결국 원자바오 총리 가족의 재산보유를 뉴욕 타임즈가 보도하는 해프닝까지 연출하게 하였다. 보시라이의 권력 기반이었던 스촨성(四川省)과 충칭(重慶)은 지금 벌집을 쑤셔 놓은 것과 같이 과거 보시라이 인맥과 관련한 인사들의 부정부패 비리 독직 관련 검거선풍으로 회오리바람이 불고 있으며, 그동안 보시라이 아성이던 충칭(중경)직할시는 재정적으로 사실상 파산한 상태에 놓여있다.

현재진행형인 권력투쟁

중공중앙은 이번 제18차 전당대회 개막회의에서 정치국 상임위원 인원을 9명에서 7명으로 축소시켰지만 아직까지 정식으로 그것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계속 7명으로 할 것인지 제18기 중간 전당회의(中全會)에서 다시 9인으로 늘릴 것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7인이냐 9인이냐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내부 권력투쟁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 의미한다. 일단 발표된 7명 중 태자당 출신은 4명으로 시진핑(習近平=습근평), 장더지앙(張德江=장덕강), 위정셩(兪正聲=유정성), 왕치산(王岐山=왕기산)으로 모두 후진타오의 상왕이던 장쩌민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이들이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외국대학 유학출신은 북한 평양의 김일성대학에서 유학한 장더지앙으로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끈다. 

장더지앙은 6.25 때 북한을 도와 참전한 팔로군 포병부대 소장(少將) 장즈이(張志毅=장지의)의 아들로, 조선족출신 인민해방군 장군 조남기의 덕을 많이 보았다. 장쩌민의 친신으로 장쩌민 집권기에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역임한 조남기(趙南起)가 처음 그를 발탁하였고, 그를 장쩌민 주석에게 추천한 이도 조남기였다. 장더지앙은 시진핑, 리커창에 이은 서열 3위에 올라 있는데 앞으로 중국과 북한 및 남북한 관계에 대한 그의 영향력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 경력을 가진 사람이다. 현 정치국 상임위원 7인의 면면을 살펴보면 중국의 산적한 국내개혁과 영토분쟁 중인 주변국과의 대외관계에서 결코 낙관적인 전망을 할 수 없다.  

중공중앙의 제18대 전당대회 기간의 권력투쟁 결과 태자당과 공청단 두 계파 간에는 절대적 승자도 절대적 패자도 없다. 태자당 중 강경좌파인 보시라이의 쿠데타 예비음모가 2월에 발각된 후 태자당 온건우파인 시진핑의 입지가 강화되었을 뿐이다. 18대 폐막과 함께 후진타오가 ‘알몸으로 물러남(裸退)’ 으로써 지속된 장쩌민의 영향력 행사를 차단하고 새로운 형태의 권력이양을 보여준 것은 새로 취임한 총서기와 국무원 총리가 더 이상 당 원로의 영향력에 의한 정치에서 벗어나서 독자적인 행보를 할 수 있는 모델을 수립하고자 시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러나서도 살아남는 법

과연 덩샤오핑(등소평) 장쩌민(강택민)과 같이 물러난 원로들이 상왕 혹은 태상왕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원격 조정하던 원로정치(gerontocracy)가 앞으로 중국에서 사라지게 될 것인가? 그렇게 된다면 신임 총서기 시진핑과 국무원 총리 리커창 체제는 중공당내 만연한 부정부패 척결을 통한 정치개혁이라는 산적한 난제해결을 위한 ‘전가의 보도(傳家寶刀)’를 마음껏 휘두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후진타오가 중공정치국 중앙상임위원회내의 소수파로서 18대 개막 전후 장쩌민이 과거 10년간 조정한 태자당과 상하이방 잔여 세력과의 사활을 건 권력투쟁을 통하여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 연부역강(年富力强)에 힘입은 바가 크다. 

물러나는 후진타오는 중공중앙 내 최후 파워게임에서 교묘하게 양수겸장을 두었다. 앞으로 시진핑 리커창 체제가 전가보도를 휘둘러 구당구국(救黨救國)의 시급한 과제인 부정부패척결과 정치경제 난국을 잘 해결하게 된다면 자신의 업적도 빛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잘못되어 정국상황이 악화된다면 그 책임은 태자당과 상하이방 원로이자 자신의 상왕인 장쩌민에게 돌아가도록 7인 정치국 상임위원 안배에 동의한 것이다. 후진타오는 ‘꿍청선투이(功成身退=공성신퇴)’ 즉 자신은 ‘물러나면서도 계속 살아나는’ 방법을 취한 것이다. 

중공중앙이 1949년 10월 1일 정권을 수립하여 1세대 마오쩌둥, 2세대 덩샤오핑, 3세대 장쩌민, 4세대 후진타오에 이은 5세대 시진핑 지도부로 접어들기 까지 63년의 세월이 흘렀다. 60여년 세월이 흐를 동안 국무원 총리를 역임한 사람 중에서 가장 개혁 지향적이고 온건한 총리로 평가받는 원자바오가 2009년 북한의 6.25참전 중공인민지원군 전사자 열사릉을 방문했을 당시, 본문의 서두에서 인용한 그의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상기해 보면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에게는 의미심장하게 와 닿는 점이 아주 많다. 비록 그가 중공중앙 정치국에서 언급이 금기시되다시피 한 ‘정치개혁’이란 용어도 수차례 주장한 바 있는 개혁성향이 강한 총리였지만, 구소련의 고르바초프나 옐친과 같은 인물이 되기에는 아직도 요원한 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박 인 수
2012.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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