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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2012.08.16 19:40

8.15 해방정국과 미군정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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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정국과 미군정의 역할 

--오클랜드 한인회 주최 광복 67주년 행사기념 강연(2012. 8.15)--

오늘은 조국 대한민국이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잃었던 나라를 되찾아 광복을 맞이한 지 67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67년은 개인의 인생에서는 긴 시간일수도 있지만 민족사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짧은 세월입니다. 이 기간 동안 대한민국은 민족 내부적으로나 세계사 속에서 참으로 역동적인 변화를 많이 겪었습니다. 역사학자 크로체(Croce, 1866-1952)는 “모든 역사는 현대사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역사란 본질적으로 과거의 일이지만 우리가 처해 있는 현재의 입장에서, 현재의 시각으로, 과거를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 잘 알다시피 한국은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나라가 합병되었다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감격스런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해방이 되고 보니 해방을 맞이할 준비가 너무도 안 되어 있었습니다. 1945년 5월, 유럽에서 독일이 항복하고 난 후 일본의 항복을 예상은 하였으나 구체적인 시기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미국은 일본의 항복이 빨라도 1946년 중반(6월) 쯤으로 예상하였고, 중국 정부와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독립군 대위 출신으로 고려대 총장을 지내신 고 김준엽 선생의 회고에 의하면, 중국대륙에서 제1기로 훈련(미군 OSS위탁훈련)을 받은 광복군은 국내 진입 특수훈련을 1945년 7월말에 마친 상태에서 8월 20일 이전에 국내로 침투할 계획으로 대기 중이다가 갑작스런 해방을 맞았습니다. 그러니 국내에서는 갑작스런 해방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해방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 민족이 기어이 나라를 되찾아 복국(復國) 하겠다는 신념이 없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해외와 국내에서 독립과 건국을 꾸준하게 준비해왔습니다. 일제가 패망하는 1945년 8.15일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과 건국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중단함이 없이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큰 단체는 모두 3개 입니다. 첫째는 중국 충칭(重慶=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이고, 둘째는 역시 중국 옌안(延安=연안)에 자리한 조선독립동맹이고, 셋째는 국내의 조선건국동맹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오늘 행사에 참석한 젊은 청년학생들도 익히 들어본 김구(金九)가 주석이었고, 조선독립동맹은 중국공산당을 따라 중국 서북쪽 옌안으로 가서 활동한 공산주의자 단체로서 젊은 분들은 잘 들어 보지 못 했을 국어학자 김두봉(金枓奉)이란 분이 이끌었고(후일 북한 정권의 한 축인 연안파로 불림), 국내의 조선건국동맹을 이끈 분은 여운형(呂運亨)이란 분이십니다. 국내의 건국동맹(해방직후 ‘건준’과 ‘인공’으로 명칭이 바뀜))을 제외한 중국의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과 조선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은 일본과 무력투쟁 준비를 하였고 실제로 투쟁에 가담하였습니다.    

그 밖에 크고 작은 단체들도 많이 있었지만 위에서 예를 든 3개 단체처럼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독립운동 활동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좀 의아하게 생각하실 겁니다. 이승만과 김일성은 어떻게 되느냐고 말입니다. 물론 그들도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김일성은 만주에서 무장 빨치산 투쟁을 10년 정도 하다가 1940년 말에 만주를 떠나 중국에서 자취를 감추고 해방되던 날까지 약 5년 동안 소련적군의 극동사령부가 있는 하바로브스크로 넘어가 소련군 장교로 복무하며 소련군의 일본전 대비 정보수집 등 활동을 합니다. 본문에서 밝히는 년대와 기간은 제가 각종 자료를 종합적으로 비교분석한 것으로 신빙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곧장 미국으로 건너가 줄곧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비록 임시정부 주미대표부 대표의 직함을 가졌지만 앞에서 예를 든 3 단체와 비교해 볼 때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활동은 못했습니다. 그러면 한국현대사에 관한 이해가 부족한 분들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38선으로 남북한이 분단되고 나서 어찌하여 주요한 3개 독립운동 단체를 물리치고 이승만과 김일성이 각각 남한과 북한의 단독 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는가하고 말입니다.

이제 그 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해방 직후에 한반도에 진주한 두 개의 외세, 즉 미국과 소련의 군정에 대하여 얘기를 해 볼까 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사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우선 저는 열이 오릅니다. 왜냐하면 유럽에서는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독일이 종전 후 동서독으로 분단된 것이 책임론(인과응보)로 볼 때 당연한 결과인데, 어찌하여 35년간이나 일제의 폭정으로 신음하다가 겨우 해방을 맞이한 한국이 남북으로 분단되었는가 하는 점 말입니다. 일본이 북 일본이나 남 일본으로 나눠져야 당연한 이치일터인데,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억울하고 불공평하고 원통한 일로 38선으로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된 것입니다.     

38선은 미국에 의해 우연하게 그어졌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미 육군성의 딘 러스크(Dean Rusk, 후일 국무장관)와 찰스 본스틸(Charles Bonesteel 후일 주한미군사령관)이라는 두 명의 대령에 의해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한 작전라인으로 상정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얄타회담이나 포츠담 회의에서 미`소간에 비밀리에 결정된 것이라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저도 중고등학교 수업시간에 그렇게 배워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공개하고 밝혀진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판단할 때, 38선이 그어질 바로 그 당시의 상황을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할 때에, 왜 이승만과 김일성이 각각 남북한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보다 더 명료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수락하던 1945년 8월 8일에 소련 적군(자칭 붉은 군대)은 이미 만주 전체와 북한 접경지역까지 진군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비록 일본의 항복을 받았지만 미 지상군은 필리핀을 탈환하고 수많은 병사가 전사한 후 겨우 오키나와(일본명 冲繩=충승, 중국명 琉球=류구)를 점령하고 거기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전투수행 작전상으로 보면 오키나와는 한국과 거리가 아주 멉니다. 시각을 다투는 급한 상황에서 미국이 어떤 선포나 강제력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메시지를 소련에게 주지 않으면, 소련은 8월말 안으로 38선이 아니라 제주도까지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수 있는 위치까지 와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으로서는 아주 급했습니다.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에 의해 점령당할 처지였습니다.

화급(火急)을 다투는 시각인 8월 10일 11일 양일간 미국 ‘국무성 육군성 해군성 합동조정위원회(SWNCC)’의 철야회의에서 위에서 말한 두 대령이 38선을 급조 상정하여 소련군이 38선 이북에서만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도록 제안하였고 스탈린은 15일에 미국의 제안에 동의합니다. 38선을 상정한 두 대령은 소련이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가 소련이 동의하자 놀랐다고 합니다. 북한으로 진주한 소련적군은 8월 22일에는 평양을 장악하였고 미군이 아직 한반도에 발도 들여놓기 전이라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수 있었음에도 더 이상 남진을 중지하였습니다. 소련군은 23일에는 38선 이남인 개성까지 내려왔다가 38선으로 후퇴하여 거기서 멈춥니다. 미지상군 제1진은 소련군이 북한에 들어온 한 달 후인 9월 9일에야 인천에 상륙합니다. 

제정 러시아 이래로 소련은 일관된 팽창주의 정책으로 국경선을 전 세계로 확장하려고 혈안이 되었는데, 스탈린은 어째서 한반도에서 북위 38도선에서 멈추라는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의 제안에 동의하였을까요? 기회는 바야흐로 소련이 러일전쟁(1905)에서 일본에 패한 후 일본에 빼앗긴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회복하고 일본에 최대한으로 복수할 절호의 찬스였습니다. 소련으로서는 미국의 원폭투하로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일본에 선전포고(8월 9일)한 후 최소한의 인명 희생도 치르지 않고서 말입니다. 소련은 한국에서 38선 이북에 그침으로써 미국에 양보해주고 일본에서 최대한으로 요구할 생각이었습니다. 바로 사할린과 북방 4개 도서 점령에 이어 홋카이도(北海道=북해도) 상륙을 노렸습니다. 그랬더라면 한국분단 대신에 일본의 분단이 실현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단호하게 소련의 요구를 거절하는 바람에 일본에서는 소기의 뜻을 이룰 수가 없었고, 소련은 쿠릴열도 남단의 4개 섬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소련은 아직까지 북방 4개 도서를 일본에 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해방되던 8월 15일, 바로 그 시점에 국내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던가를 간략하게 언급해 보겠습니다. 일본이 비록 항복하였지만 서울에 일본 총독부는 여전히 존립하였고, 한국 내 일본인들의 생명보호와 신변안전을 가장 위험하게 느꼈습니다. 총독부는 본국으로부터 정식 통보가 없었지만 8월 10일부터 단파방송을 통해 일본이 수일 내 항복리라는 사실을 감지합니다. 항복과 동시에 치안이 공백에 빠질 것을 미리 염려한 총독부 엔도(遠藤) 정무총감은 치안유지를 위하여 여운형(건국동맹)을 8월 15일 아침 8시에 사저로 부릅니다. 그는 여운형이 요구한 5가지 조건을 무조건 승낙하고 치안유지를 부탁합니다. 이 자리에서 엔도는 여운형에게 한국은 앞으로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될 것이며 경계선은 한강을 중심으로 분단될 것이라는 언질을 해 주었습니다. 총독부가 여운형에게 치안을 맡긴 것은 미군이 진주하여 질서를 유지할 때까지 우선 발등의 불을 끄고 보자는 임기응변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정치적 역할로 국내 치안과 질서유지 책임을 총독부로부터 떠맡은 것으로 확대해석한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으로 이름을 바꾸고 정치노선을 중도좌익을 택합니다. 중도와 좌익이 합쳐져 있으므로 좌익이 파고들 여지가 많았습니다.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여운형의 요구로 해방 다음날(16일) 감옥에서 석방된 정치범 사상범(약 1100명)은 인민위원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하여 8월 말에는 남한에서 145개의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또한 ‘조선공산당(남로당)’을 지도하는 박헌영과 그를 추종하는 극좌파도 ‘건준’에 참여하여 주도권을 잡고 건준을 다시 ‘인민공화국’(약칭 인공)으로 바꿉니다. 이에 많은 국민들이 인공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었고 곧이어 진주한 미군정도 인공을 좌익집단으로 규정하면서부터 여운형은 정치적 좌절을 겪다가 곧 암살당하게 됩니다. 독립운동과 조국광복에 일생을 헌신한 한 애국지사의 비참한 운명이었고, 곧이어 닥치게 될 독립운동 선열과 애국지사들에 대한 암살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전 국민의 열망을 받는 중경의 임시정부는 해방당시 아직 귀국할 엄두도 못 내고 있습니다. 국내사정이 한시가 바쁜데도 말입니다. 아시겠지만 임시정부는 과거 중국에서 내분을 거듭하다가 1941년 이후로 민족주의 우파와 민족주의 좌파로 크게 양분되었다가 1944년부터 다시 뭉쳐 합작한 형태의 정부로 있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임시정부는 미군정 하지 장군이 군용 전용기를 상하이로 보내온 11월 23일에야 겨우 제1진이 입국을 하게 됩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정부가 아닌 개인자격으로 입국하였습니다. 그러나 환영인파는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미군정 당국은 임정주석 김구를 극우 인물로 보았습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임시정부 미주대표부 대표 직함을 가진 이승만은 여권문제로 귀국일자가 늦어지다가, 귀국도중 동경에 들러 맥아더 사령관을 만나고 10월 16일에 특별기편으로 귀국합니다. 중국에 들러 장제스(蔣介石=장개석)도 만나고 싶어 했지만 미국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은 그러나 1947년 재차 출입국 때는 중국으로 가서 장제스를 만나고 들어옵니다. 그 때 이승만은 장제스를 만나 국민당 정부가 제공할 임정의 귀국 후 활동을 위해 책정한 자금을 대신 받아갔다는 사실을 한국독립운동을 깊이 연구한 중국인 노학자로부터 제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김일성은 그의 회고록(세기와 더불어)에 의하면 소련 점령군을 따라 해방 후 한 달여 지난 9월 19일(추석 하루 전날)에 원산항으로 들어옵니다. 북한에서는 해방과 동시에 소련군이 진주했으므로 총독부의 권한 따위는 처음부터 문제시 되지 않았습니다. 일본군을 무장해제한 소련군은 우선 국민의 신망이 높던 민족주의자인 조만식을 부릅니다. 주머니 속에는 이미 김일성 카드를 가지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조만식은 한국인 모두가 존경하는 지사이기에 국민으로부터 신망이 두터웠고 일제 총독부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으며 새로 진주한 소련군도 처음에는 그를 우대하였습니다. 소련군을 등에 업고 북한에서 김일성의 권력 주도가 시작되던 1946년 1월부터 조만식은 연금 상태에 놓였다고 당시 소련 군정 하 문교부장을 담당했다가 월남한 함석헌 선생이 후일 증언한 바 있습니다. 조만식은 함께 월남하자는 주위의 권고를 뿌리치고 1천만 북한 동포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주장하다가 6.25 전쟁 직전에 암살당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해방된 지 만 1년 안에 지주들의 토지를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강압적으로 처리해 버렸습니다. 수많은 지주들이 월남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앞뒤 시간이 약간 안 맞지만 제목에서 제시된 대로, 이제 미군정에 대하여 말해볼까 합니다. 일본천황이 포츠담선언을 무조건 수락하여 항복의사를 밝힌 직후(8월 9일), 미국행정부는 서태평양 지역의 미 제10군 24군단장이던 하지(John R. Hodge) 장군을 소장에서 중장으로 승진시켜 미군정 사령관에 임명합니다. 처음 중국전구 사령관을 역임한 스틸웰(Stillwell) 장군에게 맡기려고 하다가 국민당정부 장제스 총통이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취소하고 하지 장군을 임명합니다. 단지 그의 부대가 한국에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지장군은 자신의 임명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명령을 받은 하지중장은 한반도에 이미 들어온 소련적군의 숫자, 소련군사령부와의 통신방법 등등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명령 제1호에 따라 총독부에 의한 질서유지와 ‘38선 이남의 점령 및 군정실시’라는 본국정부의 정책만 확인한 상태였습니다. 

미군의 진주는 24군단 산하 7사단과 40사단의 선발대가 9월 8일 인천에 도착하였습니다. ‘건준’ 대표들이 환영 메시지를 전달하고 대표적 애국자 명단과 민족반역자 명단을 제출하였습니다. 연합군환영준비위원회(후일 한국민주당 주역)도 환영메시지를 전달하였습니다. 9월 9일에 서울에서 아베(阿部) 총독의 항복조인이 있었고, 아놀드(Arnold) 소장이 초대 군정장관에 임명되어 군정청을 구성하였습니다. 서울의 반도호텔에 사령부를 설치한 하지 사령관은 미군정(USAMGIK)의 업무를 개시 하였습니다. ‘군정부’라 하지 않고 ‘군정청’으로 명칭을 격하한 이유는 한국인의 독립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임시적인 통치기구이며 한국인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습니다. 

군정청 하부의 8개 국(局)은 모두 중령과 대령의 영관급 미국인 장교들로 구성되었고, 행정체계는 일본의 총독부 체제를 그대로 두고 관리들도 그대로 유지하였습니다. 통치는 직접이 아닌 간접통치 방식을 택하였습니다. 군정요원으로 장교 87명 사병 160명으로 구성된 인원을 선발하여 각 부처에 배치하였으며, 오키나와와 서울간의 직통 라디오통신을 개통하였고, 부(副) 군정장관 해리스 준장은 당시까지만 해도 서울에 있던 소련영사를 만나고 평양의 소련군과 교신을 개시하였습니다. 

한국사정에 대해 이해가 매우 부족하고 행정에 관하여는 무지한 미군은 본국에서 파견된 정치고문과 다수의 한국인들을 미군정에 참여시켰습니다. 한국배속 미군들은 풍토도 다르고 당시 생활환경(수세식 화장실도 없고 맥주마실 곳도 없는) 매우 열악한 한국을 떠나 하루빨리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오랜 전쟁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하는 것을 보면서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쳤고, 미국본토의 부모들은 자식을 빨리 돌려보내라고 미국의회에 청원하였습니다. 하지 사령관도 한국을 빨리 떠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미군정 요원들은 고급 장교나 사병을 막론하고 한마디로 한국에 애정을 가지고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미군정이 실시됨과 동시에 국내정국은 혼란이 가중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미군정 1개월 동안 한국의 정치 사회 각계 단체 등록을 받은 결과 240여개(정당 60개)의 단체가 군정청에 등록하였습니다. 안 그래도 한국의 사정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미군들에게 이러한 상황은 도저히 누가 누구이고 무엇이 무엇인지를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미군정은 총독부 관리들의 의견을 최대한 들었습니다. 그나마 그들이 한국의 사정을 잘 알고 행정사무에 관해서도 훈련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련의 사주를 받는 것으로 의심되는 앞서 말한바 조선공산당을 위시한 좌익계열(인민위원회와 인공)이 날뛰자 군정청은 좌익을 색출하기 위해 일제치하 경찰출신을 경찰에 그대로 중용하였습니다. 

사실상 미군은 한국에 진주하기 직전에 우리 민족이 일제잔재를 청산하는데 최대한 협조하고 돕도록 해야 한다는 지침을 미국정부로부터 하달 받았습니다. 그러나 미군이 실제 군정에 임하자 극도의 국내 혼란상을 접하고는 그 지침을 고수하지 않고 임기응변적이고 편의주의적인 방침을 택함으로써 우리민족에게는 후일 두고두고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한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미군정 당국자들로서는 한국인의 민족정기와 같은 것은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었고, 또한 우리 국민도 일이 그렇게 될 줄이야 당시 누가 알았겠습니까? 또 한 부류의 미 군정청이 신뢰할만한 그룹에는 미국유학 출신의 한국인들로 군정청의 통역을 담당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해방직후 미군정 통치는 통역정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좌익보다는 우익에 가까운 인사들이었습니다. 

국내에는 일제하에서 과거부터 또 다른 세력을 형성하는 중요한 한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해방부터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이르는 과정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여러 개의 단체 중 미군정에 가장 협조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조국이 광복되기보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지속되기를 바랐던 이들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바로 총독부하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대지주 자본가등 특권을 누려온 사람들입니다. 이들 특권 친일파들은 해방이 자신들에게 가져다줄 결과에 대하여 몹시 불안하였습니다. 

이들은 우익이긴 하지만 반민족적 친일파였습니다. 이제 미군정이 총독부 체제를 고수하면서 우익을 편들자 이들 친일파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이들이 미군정 초기에 결성한 정당이 바로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으로 3년 후 이승만 정부(제1공화국) 수립의 정치적 배경이 됩니다.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평생 독립운동을 하고도 온 민족의 염원이던 친일파에 대한 단죄를 왜 못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국내 지지기반이 없던 이승만의 정치적 재정적 후원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처음 김구도 지지하였으나 김구는 반민족 친일파 단죄를 첫째로 주장했기 때문에 겉으로는 김구를 지지한다하면서도 실은 그를 반대하였습니다.

미군정은 한국의 장차 새로운 정부구성에 극우와 극좌를 우선적으로 배제하고자 하였습니다. 김구는 극우로 몰려 미군정의 환대를 받지 못했습니다. 군정청은 당시 한국의 정치지도자들과 의견충돌과 대립이 심했고, 미국의 행정부는 대 한국 정책을 단독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미소 간에는 종전되기 직전인 1944년 말부터 냉전이라고 하는 새로운 기류가 감돌아 전 세계를 미소 양 대국의 세계전략이라는 구도로 개편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냉전(cold war)이 5년 후 열전(hot war)으로 폭발된 것이 1950년 동족상잔의 6.25 입니다.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의 최대 관심은 우선 전후 유럽의 복구와 부흥에 있었습니다. 아시아에서는 패망한 일본의 복구와 부흥을 통한 미국의 전략에 중점이 맞추어 졌습니다. 또한 당시 미국의 아시아에서 최대 골칫거리는 중국에서 벌어지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었습니다. 미국은 최신 무기와 자금을 국민당 지원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오히려 공산당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습니다. 국민당에 대한 계속 지원여부를 두고 미국 조야는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미국의 돈(재정)은 유럽으로 무기는 중국으로 집중되었고, 전략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겨진 한국에 대하여 미국은 관심을 집중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이에 비해 스탈린의 계획은 우선 38선 이북의 북한에 친 소련 정권을 탄생시키고 전체적 통일은 후일을 기한다는 전략이었습니다. 김일성이 1945년 12월 17, 18 양일간 거행된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의 당책임 비서에 ‘선출’된 당시 주장한 ‘민주기지론’은 바로 스탈린의 전략을 표명한 것입니다. 먼저 북한에서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고 남한을 무력통일 한다는 것이 그의 ‘민주기지론’입니다. 동족상잔의 6.25 전쟁은 김일성이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위원장에 ‘선출’된 이때부터 밑그림이 그려진 것입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란 명칭은 앞의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이란 명칭이 서울의 ‘당중앙’에 종속된 것으로 여기서 벗어난 북한만의 권력실체를 뜻하는 것입니다. 스탈린의 사주에 따라 김일성은 이때부터 남북을 분리한 북한만의 정권을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1946년 중반부터 남북한 정치지도자들 간에 논의되고 실행된 ‘좌우연합’ 회의와 또 남한의 미군정과 북한의 소군정 간의 ‘미소공동위원회’ 회담과 신탁통치, 1948년의 남북한 정치지도자들 간의 분단을 막아보기 위한 마지막 시도였던 ‘남북협상’등 모든 시도는 실패로 귀결되고 말아 실상은 당초부터 남북의 분단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에 38선 이남에서는 이승만도 국제정세의 흐름을 재빠르게 간파하여 미`소간 냉전의 대립이 심각하게 깊어짐을 인식하고 국내 순회연설을 시작하면서 정읍연설(1946. 6. 3)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의 불가피를 선언하기에 이르며 미국의 협조를 얻어 자신이 남한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자 합니다. 미국도 한국문제가 미소의 의견대립으로 공동위원회의 역할이 중지되자 한국문제를 외교적으로 처리하고자 유엔에 상정하여 결의안으로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구성한다는 입장을 지지합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안을 지지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은 최대의 물량을 동원하여 지원한 중국에서 1946년 말에 공산당이 득세함에 따라 장제스 국민당 정부에 심각한 회의를 느끼면서부터 한국도 덩달아 미국조야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1940년부터 1945년 8월 해방까지 독립운동 단체를 이끈 주요 인물이 아닌 이승만과 김일성이 각각 남한과 북한의 정권을 수립하게 된 원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미소 양국에 의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편의적으로 그어진 38선 분단은 ‘지리적’ 분단이었습니다. 3년 후 1948년 8월(남한)과 9월(북한)의 정권 수립은 ‘한 나라 두 개 정부’로 ‘정치적’ 분단으로 변하였고, 2년이 지난 1950년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치르고 난 후 남북이 철천지원수가 되어 우리 민족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다 주면서 동족을 둘로 가르는 ‘민족의 분단’으로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서두에서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고 말했습니다. 왜 우리 민족이 분단되었는가? 분단 당시의 상황과 분단 고착화 이후의 정치적 이념과 민족적 분열의 심화과정이 어떠하였는지, 왜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가? 현재적 입장에서 과거의 민족적 비극과 더불어 장래를 생각하는 의식이 살아있지 않으면 한국인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 강연을 통하여 해방직후부터 미군정의 한국진주 초기 약 5개월간의 상황에 대하여 말씀드렸지만 시간과 지면의 제약으로 말미암아 극히 간략하게 언급했을 뿐입니다. 

청년 대학생 여러분, 어려서부터 해외로 나와 살면서 한국의 역사를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아래에 적는 참고도서와 학자들의 이름을 유심히 기억해 두었다가, 시간이 나는 대로 도서관에서나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보다 많은 지식을 확충하시길 바라면서 강연을 마칩니다. 남북한이 장차 통일을 이룩하고자 하면 해방직후 미군정 3년 동안 우리의 선대 지도자들이 겪었던 시행착오가 반드시 커다란 교훈이 될 것입니다. 국내 해외를 막론하고 청년지식인들이 민족통일을 맞이하는 시대의 주역으로 장래를 대비해야 함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박 인 수
2011. 8.15

<참고자료>
해방전후사의 인식, 전5권 (한길사, 1985, 1993)
해방3년사, 전2권(저자 송남헌=宋南憲, 도서출판 까치, 1985)  
Memoirs by Harry S. Truman(트루만 대통령 회고록 1, 2권), Years of Decision/  Years of Trial and Hope.(Time Inc. 1956)
Robert A. Scalapino & Chong-Sik Lee(이정식), Communism in Korea(Berkeley, 1972)
Dae-Sook Suh(서대숙), The Korean Communist Movement(Princeton, 1967)
Bruce Cum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Princeton, 1981)
김준엽(金俊燁), 조순승(趙淳昇), 이호재(李昊宰), 신용하(愼鏞廈), 이현희(李炫熙), 심지연(沈之淵), 강만길(姜萬吉), 송건호(宋建鎬), 박현채(朴玄采), 김학준(金學俊), 이원설(李元卨), 이정식(李庭植), 진덕규(陳德奎), 와다 하루끼(和田春樹) 스칼라피노(Robert Scalapino),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 등등, 한국현대사 분야 국내외 저명학자들의 저서와 관련 논문. (이 밖에도 많은 학자들의 역작이 있으나 모두 열거할 수 없으므로 위에서 언급한 자료를 읽는 과정에서 보다 많은 소스를 접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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