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의 삶
공간과 시간을 뛰어 넘는 입체적인 삶, 영혼을 살찌우는
정신 세계를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개척해 나갈 필요가
있다. 뉴질랜드에 이민 와서……
하루살이는 ‘내일 또 만나자’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매미는 ‘내년 봄에 다시 만나자’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동물의 세계에 시간관념이 있을까 생각해본다. 고등동물인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왕래하면서 폭 넓은 삶의 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다. 역사적으로 성인의 반열에 오른 선각자들은 수천 년의 미래까지 내다보고 인류 후손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서는 과거도 모르고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도 없이 현재에 매달려 동물적인 삶을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
흔히 점(點)을 0차원, 선(線)을 1차원, 면(面)을 2차원, 공간(空間)을 3차원, 시간(時間)을 4차원으로 부르고 있다. 0차원이 무수히 모여서 1차원을 이루고 1차원이 한없이 모여서 2차원을, 2차원이 다시 무수히 모여 3차원을 형성하였겠지만 1차원 선의 세계에서만 살아가는 동물이 면의 세계를 알 수 없고 면의 세계만 살아가는 동물이 공간의 세계를 알 리가 없다. 어떤 사람의 삶의 가치를 평가할 때 단순히 살아간 길이에 따라 평가될 수 없을 것이며 다차원의 세계를 얼마나 뜻있게 개척했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생물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전제로 하고 이 세상에 나왔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고 의식, 무의식의 세계를 섭렵할 수 있기 때문에 무한대의 삶을 영위할 수 있을뿐더러 이루어 놓은 업적에 따라 만고(萬古)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1차원적인 삶을 영위하며, 옆을 돌아볼 기회도 없이 가족을 위하여, 세속적인 출세를 위하여 앞만 보고 달려온 외길 인생, 어느 날 자아인식을 하게 되고 ‘이게 내 인생이 아닌데…’하는 회한에 빠지기도 한다. 2차원으로 폭을 넓혀도 거기에만 매진하면 평면적인 삶을 영위했을 뿐 입체적인 3차원이라는 또 다른 세계는 알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3차원의 세계는 영위를 하지만 고차원인 시간의 세계 즉 4차원의 삶은 제대로 인식을 못하고 인생을 마치게 마련이다.
칸트가 말한 대로 시간과 공간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지니고 있는 인식의 형식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인간이 영위하는 시간은 과학적 물리적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식의 시간, 삶을 경험하는 방식으로서의 시간이 진정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체험이 배제된 시간은 기계적인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민 초기에 알고 지내는 키위 몇 명과 같이 기스본과 타우포 중간에 위치한 와이카레모아나(Waikaremoana)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산악지대를 4박 5일 트램핑(Tramping) 한 일이 있다. 해발 천 미터 쯤 되는 정상에 위치한 허트(Hut)에서 바로 발아래 호수를 내려다보며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적막강산 같은 허트에도 날이 저물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문명의 이기(利器)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원시 자연에서 시공을 뛰어 넘는 밤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체코에서 왔다는 남자 하나, 스위스에서 각각 온 남녀, 일본에서 각각 온 남녀, 한국에서 이민 온 나, 현지 키위 3명이 바로 머리위에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바로 공간과 시간이 바뀐 새로운 체험의 자리였다.
우리는 한국에서 선로를 달리는 1차원 기차 여행, 자동차로 전국을 누비는 2차원 면의 여행을 하며 살아왔다. 다시 삶의 공간을 넓혀 비행기라는 3차원 여행 수단을 이용해 뉴질랜드까지 와서 살게 되었다. 한국에서 떠나 올 때 까지의 문화적 체험은 동결(凍結)된 상태로 남겨둔 채 뉴질랜드라는 새로운 문화권에 편입이 되었다. 다시 한국을 방문해보면 이민 온 당시로부터 몇 년 후의 한국의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시공간이 확대된 삶의 영역을 체험하는 것이다.
뉴질랜드에서 삶의 시공간을 뛰어 넘는 입체적인 삶을 시도해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접고 지냈던 옛 취미를 살려 다시 시작해볼 수 있고 한국의 전통을 이곳 다민족 그룹에게 전파하는 일을 할 수도 있다. 바쁜 한국의 일상생활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이곳에서 동서고금을 통한 문학, 예술 작품들을 음미하면서 시간 여행을 즐길 수도 있고 창작 활동을 통해 자기의 감성을 펼치고, 영혼을 살찌우는 정신세계를 무한 확대할 수도 있다. 헛되이 보내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남은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