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름지기 선업(善業)을 쌓을 일이다
“여보 정사장, 정사장은 왜 그렇게 열심히 돈을 벌어?”
‘저승갈 때 많이 가져가려고 그런다 왜.“
“그럼 정사장 죽으면 바빠도 내가 호상(護喪)을 맡아야 하겠구먼.”
“아니 왜 자네가 맡아.......”
‘내가 맡아야 백 불짜리로 관 아래서부터 차곡차곡 많이 넣어 자네 소원을 들어주지.“
나와 정사장이 술 맛보기로 농담을 주고받는데 옆에서 소주를 한 입에 털어넣고 난 안토니오가 끼어든다.
“그런데, 이승의 화폐가 저승에서 통용될까?”
“아 그거 문제가 되네....... 통용되더라도 이승과 저승의 환율이 도대체 얼마지?”
“바꿔본 사람이 없어 잘 모르지만, 그거 아마 곱하기 제로일거야”
“그럼 돈 아무리 많이 넣어도 말짱 도루묵이네.”
얼마 전 시티의 한식당에서 평소 격의(隔意) 없이 자주 만나는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주고받은 농담이다.
그렇다. 사람은 살아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동안에는 열심히 돈을 벌고, 이왕 돈을 번다면 남보다 많이 벌어야 하고, 또 내남없이 모두 돈을 좋아하다보니 돈 돈 돈 하다가 돈 때문에 부자지간에, 형제지간에, 친구지간에 원수가 되어 등을 돌리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인생의 중반 이후를 뉴질랜드에 살면서 느낀 점은 이곳 뉴질랜드인들은 돈 때문에 부자지간에, 형제지간에, 친구지간에 원수가 되었다는 경우를 거의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들도 사람인지라, 내가 모르는 경우도 없진 않겠지만 말이다. 근자에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정상급 기업인 S사 2세 경영인 형제간의 소송이, 남들이 알까봐 부끄러워해야 할 케케묵은 가추지사(家醜之事)까지 들먹이면서 오늘도 한국의 일간신문에 일면기사로 올라와 있는 것을 볼 때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그래서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어떻게 쓰는지도 이에 못지않게 더 중요하다고 어진 현자들은 자주 일깨우곤 하였다. ‘개같이 돈을 벌어 정승처럼 잘 쓴’ 우러러 존경받을 경우가 한국에서도 이제 자주 볼 수 있다. 자식도 없이 평생을 삯바느질로 모은 돈을 대학연구소에 기부한 할머니 이야기와 같은 경우는 이제 한국에서도 자주 듣는 미담이다. 이런 미담은 사회 상층부의 개인적 도덕불감증과 온갖 탈법적 행동으로 말미암은 사회적 책임감 부재의 병리현상(Social pathology)이 만연한 현재의 한국 사회에서 한줄기 시원한 청량제 역할을 한다.
역사적으로 존재해온 모든 사회적 공동체는 공동체 구성의 기본적 토대를 도덕성에 두었다. 그래서 정치와 경제는 공동체 구성요소에서 도덕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린다. 플라톤의 이상국(理想國)이나 공자의 대동사회(大同社會)나 근대 시민사회(Civil society)에서 현대의 커먼웰스(Commonwealth)에 이르기까지 사회적 도덕성의 토대는 인간의 ‘마음 씀씀이(用心)’에 대한 강한 긍정적 믿음에 기초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도덕성이 무너지면서 공동체가 유지된 경우는 없었다. 있었다면 그건 인간의 공동체가 아닌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짐승의 자연상태(State of nature) 이었다. 서양 정치사상사에서는 그렇게 가르친다.
철학적 사유로 그 까닭을 따져 들어가 보면, 사람에게는 누구나 공통된 마음이 있고(人同此心) 마음이 그렇게 된 까닭에는 생각하는 바가 비슷하기 때문이다(心同此理). 맹자가 예를 든, 갓난아기가 우물에 기어들 때면 내 자식 남의 자식 가리지 않고 우선 구하고 보는 그런 우리 모두의 공통된 마음이 동양인이나 서양인을 막론하고 모두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통된 ‘마음 씀씀이(用心)’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임마누엘 칸트와 존 록크와 장자크 루소에 이르기까지 근대서구 윤리학의 기초를 이루어 오늘날 서구시민사회의 원동력이 되었고, 동양에서는 맹자의 성선설과와 순자의 성악설에서 시작하여 성리학자들에 의해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의로 이어져 온 것이다. 성리학자들의 사단칠정 논쟁은 경제적 생산성이 아주 낮았던 조선시대가 아닌, 물질적 풍요로움 속에서 사회적 윤리가치를 극도로 상실한 21세기 지금의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건전성(健全性)을 회복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그래서 현재 한국의 지식인들에 의해 시급히 재연되어야 할 논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서도 통용되는 공통적 도덕성의 심리적 기초가 있다. 사회적 정의는 개개인의 도덕성이 공동체의 사회심리 저변에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리 유명한 교수가 강단에서 정의를 떠들어도 실현되지 않는다. 사회적 정의구현 그것이 바로 정부의 존재이유이고, 서구에서 법은 도덕에 대한 최소한의 보장으로 제도화되어 강자에 대한 약자의 보호 장치와, 약자를 구휼(救恤)하기 위한 정신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서구사회에서는 건전하고 성숙한 시민사회의 공동체적 운명을 유지하기 위한 정신의 일환으로 기부문화로 나타난 것이다.
기부는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지 결코 강요할 수 없고 해서도 아니 된다. 지극히 맞는 말이다. 뉴질랜드에서는 개인이나 기업을 막론하고 기부문화가 성숙한 시민사회의 구축과 유지를 위해 아주 흔하고, 법과 정부와 국세청의 권위와 강요가 아닌 자발적인 행위에 의해 잘 정착되어 있다. 과거 가난하던 한국에서 태어난 우리가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이런 나라에서 살고 있음을 큰 다행이고 축복이다. 세계에는 아직도 그렇지 못한 나라가 많기 때문이다.
금년은 마침 한국과 뉴질랜드가 수교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고, 오클랜드한인회는 50주년 기념 특별행사를 주관한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뉴질랜드 주재 일부 한국기업체 지사 상사는 기념행사를 주관하는 한인회에 전혀 기부를 하지 않은 것이 세간의 입방아에 올랐다. 누구의 잘잘못을 탓하기 전에 한마디로 믿기 어려운 일로서, 우리가 익숙한 뉴질랜드 시민사회에서 있을 수도 없고 앞으로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자발이 아닌 기부를 요청해야만 하는 한인회나 기업체 현지법인으로서도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것이다.
뉴질랜드에서는 생명을 구하는 인명구조 헬리콥터, St John 구급차, 암환자협회(Cancer Society), 심장수술재단(Heart foundation), 구세군이 운영하는 구급식량(Foods Bank), 심지어 공립학교의 운영에 필요한 학부모 도네이션 등등, 부지기수의 조직과 자선단체가 정부예산으로는 부족하여 기부금으로 유지하는 실상을 우리는 뉴질랜드에 살면서 너무도 익숙하게 보고 있다.
한인회는 이곳 오클랜드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권익향상과 위상강화, 그리고 다민족 다문화속에서 이곳에서 자라나는 후세들이 장래에 민족적 정체성과 동시에 문화적 보편성 추구라는 목표를 위하여 한인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단체이다. 역대 한인회 회장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모두 많건 적건 사재의 일부를 털어넣으면서 유지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뉴질랜드 정부로부터 약간의 단체 보조금이 나오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조직이 활동을 유지하기에는 근본적으로 부족하다. 더욱 힘든 일은 한인회는 걸핏하면 불특정 한인들에 의해 도움과 격려를 받기보다는 법인으로서의 조직과 인격이 의도적으로 훼손되기도 한다.
질타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탄스러움에서 한마디 하고자 한다. 한국에서 굴지의 대기업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일부의 지사 상사 현지법인의 마음씀씀이가 어찌 그러할 수 있는가? 현재의 한인회가 조직이나 운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한뉴수교 50주년을 특별 기념하는 행사에 금액의 다소를 떠나 전혀 기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수익성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기업의 장기적인 입장에서 보더라도 기업의 대외적 이미지를 어찌 그렇게 관리할 수 있는가. 아무리 기부는 자발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말이다.
오클랜드 한인회는 오클랜드에 살고 있는 한국인 모두가 주체이고 여기에는 기업체도 당연히 포함되지 않는가? 한인회는 한국인이 주체인 교민회이지 일본인 교민회나 중국인 교민회가 아니지 않는가. 영세한 교민업체에서도 십시일반으로 기부하는 실정인데, 설사 한국의 본사에서 기부하지 못하겠다고 하더라도 현지법인의 책임자 재량으로 업무추진비나 활동비 명목으로 얼마든지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은가. 한국이 있고 한국인이 있고 나서 한국기업 있듯이, 따라서 기업도 능력껏 사회적 책임을 할 것이 요구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개인이나 단체나 기업이나 막론하고 남들이 갖지 못한 가진 것을 베풀어 주고 사회적으로 환원하는 행위는 아름다운 것이다. 돈이 필요하다면 돈으로 기부하고(有錢出錢), 힘이 필요하다면 힘으로 조력을 주는 것이다(有力出力). 개인이 쌓은 학문적 지식과 능력도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면 강연이나 사회활동을 통해 나누어 주고, 다수에게 유용하고 필요한 정보는 인터넷에서도 서로 공유하고, 내가 가지고 있지만 남이 가지지 못한 것으로 남이 필요한 것이라면 능력껏 주는 것이 선업을 쌓는 일이고 더불어 사는 이치가 아닌가.
우리 선조들은 늘 강조했다. 적선지가에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고, 착한 일을 많이 쌓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경사로운 일이 집안에 넘친다는 말이다. 어차피 관속에 돈을 넣어가지 못할 바에 모름지기 능력 한도 내에 선업을 많이 쌓을 것을 역설한 말이다.
기부는 선업을 쌓는 길이다. 한국기업의 현지법인 지사 상사가 하는 기부는 개인과 기업이 동시에 선업을 쌓는 일이다. 현지에서 벌어지는 각종 행사에는 열심히 기부하면서 유독 한인회에는 기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 이상한 일이지 않는가. 한인회가 주관하는 행사가 기업의 경영이념과 맞지 않더라도 장차 한국과 한국인과 기업자신의 발전을 생각하여 앞으로는 좀 더 적극적으로 협조하기를 권유한다.
2012. 4. 25
박 인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