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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립배경과 조소앙(趙素昻) 선생의 재인식



(오클랜드한인회 주최 제93주년 3.1절 기념행사 세미나 발표문)



1919년 3월 1일은 우리 민족이 거국적으로 일어나 일제의 강제합병과 식민지 탄압정치에 항거한 날이다. 일제의 만행에 항거한 만세운동은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져 나갔고 해외에서도 많은 동포들이 열렬히 호응하였다.


3.1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신음하던 우리 민족에게 가져다 준 영향은 광범위하고 그 역사적 의의는 대단히 중요하다. 진정한 한국의 민족주의는 3.1운동으로부터 시발한다고 나는 본다. 한민족은 동일한 조상과 공통의 언어 역사 문화를 공유하는 단일민족이면서도, 조선시대 까지 양반과 평민은 다른 계급으로 나누어져 이해관계가 대립하고 상충하였던 것이다. 3.1운동은 거국적 거족적으로 동일한 목적을 지향하여 나타난 민족의 국권회복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의 직적접인 영향 중 가장 큰 것을 들자면, 나는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체로서 발족하게 된 것을 들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당시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국권을 빼앗긴 울분을 품고 고국을 떠나 만주 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미국 하와이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이 많았다. 그러나 많은 단체들 중 어느 한 단체도 민족운동의 통합적인 구심체로서 역할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당시 상하이에 거주하던 한국동포의 숫자는 7백 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 중에는 갑신정변(1884) 이후 정계에서 물러난 민영익(명성황후의 조카)도 있었다. 안중근 의사도 1909년 하얼빈(哈而濱) 역에서 일제의 조선 초대 통감 이등박문을 척살하는 장거를 결행하기 전인 1905년에 상하이로 민영익과 부상인 서상근(徐相根)을 찾아와 구국운동에 대한 논의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1년에 중국으로 망명한 애국선열 신규식(申圭植) 선생은 1912년 7월에 상하이에서 동제사(同濟社)라는 독립운동기구를 설립하였는데, 이 단체는 해외독립운동의 효시였다. 박은식 김규식 신채호 문일평 조소앙 박찬익 이광 신석우 변영만 등과 같은 분들이 초기 회원이었으며 회원은 3백 명을 넘었다. 신규식은 국내재산을 정리한 후 중국혁명 성공을 위해 모두 기부하고 중국혁명에도 직접 가담하는 등 중국혁명의 원로들과 교분을 두터이 쌓았는데, 이는 3.1운동 후 상하이에서 발족하게 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일제는 이미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5)에서 중국과 러시아에 승리하여 그 전리품으로 조선과 중국의 만주지역을 일본의 식민지로 삼고자 준비를 하였다. 조선에서는 통감부를 설치하여 총독부로 승격시키고자 하였고, 만주에서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치하여 식민지배 사전조사 작업을 착착 진행하고 있었다. 이 당시 중국은 통일된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았고 매우 어수선한 상태였다.


북방은 베이징을 중심으로 독립한 군벌들이 번갈아가며 정부를 구성하여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중국내 각종 이권을 넘겨주면서 흥정을 하였다. 군벌정권은 제국주의 국가의 도움으로 군벌 각자의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남방에는 신해혁명(1911) 성공 후 정통성을 가진 쑨원(孫文)의 호법정부(護法政府=중화민국 국민당정부의 전신)가 광저우(廣州)에 설립되어 있었다. 광저우 호법정부는 정통성을 가졌지만 무력을 행사할 군대가 그때는 아직 없었다.


한국에서 망명한 많은 애국선열 지사들은 광저우 호법정부와 교류를 하였고, 쑨원도 신규식(申圭植, 호 睨觀=예관, 일제 강압에 의한 을사보호조약 후 울분으로 음독자살을 시도하였다가 다행히 목숨을 건진 후 시력을 잃고 나서부터 흘겨본다는 뜻) 조소앙(趙素昻) 등 한국의 망명 지사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그들에게 매우 동정적이었다. 그 당시 많은 도움을 준 호법정부의 중국 혁명지도자들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1968년 건국훈장을 수여하였는데, 송교인(宋敎仁) 왕총혜(王寵惠) 진기미(陳其美) 호한민(胡漢民) 당계요(唐繼堯)같은 분들이다.


1919년 한국에서 3.1운동의 소식이 상하이로 전해지자 상하이 동포들은 즉각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3월 중순에는 국내 대표대회 대표자로 선우혁, 서병호, 김철, 현순, 최창식, 일본 동포 대표로 이광수(춘원), 러시아 연해주 동포 대표로 여운형(呂運亨), 미주동포 대표로 여운홍(呂運弘) 등이 상하이로 모였다. 이들은 3월 17일, 상하이 프랑스조계 보창로 329번지에서 민가를 얻어 임시정부 설립추진 사무실을 차림과 동시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설립추진 소식을 전 세계 동포들에게 알렸다. 소식이 전해지자,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조성환, 김동삼, 이춘숙, 홍도(洪濤) 등등 국내외에서 30여 명의 우국지사들이 비밀리에 착착 상하이로 도착하였다.


이 분들은 임시정부 건립을 토의한 후, 1919년 4월 10일 오전 10시 이광수(춘원)와 손정도(孫貞道) 목사의 제의로 상하이 프랑스조계 김신부로(현재 瑞金2路)에서 국내외 각지에서 모인 한국인 대표 29인이 대회를 개최하였고, 상하이에 임시 의정원을 수립하여 최고의 민의기구로 할 것을 결정하였다.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은 이동녕(李東寧) 부의장에는 손정도(임정수립 후 다시 간도로 돌아가서 목회활동 하다가 일제에 피검되어 돌아가심, 이승만 정부 때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손원일의 부친, 청년시절의 김일성과 특별한 관계로 인해 한국정부 내에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분), 서기에는 이광수와 백남사(白南士)를 선출하였다.


정부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로 정하고, 정부구성은 국무총리제를 채택하여 이승만을 국무총리, 안창호를 내무총장, 김규식(金奎植)을 외무총장, 이시영(李始榮)을 법무총장, 최재형(崔在亨)을 재무총장, 이동휘(李東輝)를 군무총장, 문창범(文昌範)을 교통총장으로 각각 선출하였고 국무원비서장(사무총장)에 조소앙(趙素昻)을 선출하였다. 당시 43세의 백범 김구는 안창호 내무총장 밑에서 초대 경무국장에 취임하여 2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일본 영사관 경찰로부터 임정을 지키는 일을 맡았다.


특기할 사항은 이들 정부 각료 중 이시영과 조소앙 외에는 당시 모두 상하이에 살고 있지 않았다. 이승만과 안창호는 미국에,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평화회의에 참석, 최재형 이동휘 문창범은 연해주와 간도에서 항일무장 투쟁활동 중이었다. 당시 상하이 현지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을 정부각료로 선출한 것은 임시정부의 국민 대표성과 합법성을 높이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임시정부 구성원의 궐석과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조치로 신익희(申翼熙)를 내무차장, 현순(玄楯)을 외무차장, 이춘숙(李春塾)을 재무차장, 선우혁(鮮于赫)을 교통차장, 조성환(曺成煥)을 군무차장, 남형우(南亨佑)를 법무차장으로 임명하여 일상적인 업무를 책임지도록 하였다. 임시정부 의정원 회의에서 임시정부 명의로 전국동포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반포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성립을 정식으로 선포하여 자자손손의 행복을 위해 일어나 분투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것이 3.1 운동의 직접적 결과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출현한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출범 당시의 최초 모습이었다. 임시정부의 내부조직 구성과 운영은 그 후 매우 복잡다단하게 변천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할 때까지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존립하였다.


아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을 초안한 조소앙 선생의 업적에 대해 간략하게 고찰해 보고, 점차 잊혀져가는 애국선열 지사의 발자취를 찾아 소개함으로써 뉴질랜드에서 자라나는 후세들로 하여금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한민족의 정체성을 고취시키는데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다.


조소앙 선생은 나라의 국운이 기울던 1897년 경기도 교하읍 (현재의 파주시)에서 태어나셨다. 어려서 고향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5세에 서울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성균관 수료 후 1904년(17세)에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1912년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25세에 8년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경신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으나, 다음 해(1913)에 상하이 동제사(同濟社)의 신규식과 연락을 취하여 북경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선생께서는 이 때부터 중국혁명 원로들과 교분을 쌓았다. 31세 때인 1918년에 국내외 동포들의 대동단결을 고취하기 위하여 만주로 가서 이시영(신흥무관학교설립) 윤세복, 윤기섭 등과 협력하였고, 11월에 김좌진 박찬익 등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일명 무오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반포한 뒤 다시 상하이로 갔다. 무오독립선언은 기미독립선언에 1년 앞선 것이었다. 3.1 기미 독립선언문의 33인 대표와 달리 무오독립선언에 참가한 39인 대표는 끝까지 한 사람도 지조를 변절한 분이 없었다. 국내에 남아있지 않고 대부분 해외로 망명하신 때문이다. 일제의 중국침략이 본격화되는 1937년 이후 국내에서는 지조를 굴하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조소앙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4월초에 국내에서 비밀리에 한성정부가 조직되었을 때 정부각료로 추대되었고, 상하이 임시정부 조직과 의정원 창설에 주력하였으며,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대한민국의 정체(政體), 십조(十條)헌장, 의정원법 등을 제정하는데 진력하였다. 선생은 영어와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하였고 동서양의 역사와 철학에도 해박하셨다.


1919년 5월에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되었던 김규식과 여운홍(미주동포대표)과 합류하였고, 8월에는 스위스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으며 국제연맹 가입을 위한 노력을 하였다. 12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의 유대를 강화한 후, 1920년 초에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 각국 지도자들을 방문하였고, 상하이로 되돌아오기 전에 약 6개월간 소련에 머물면서 신생 사회주의 국가의 정치제도를 자세하게 살피는 등, 약 2년간에 걸쳐 서구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각국의 정치제도를 둘러보신 것이다.


짧은 지면에 조소앙 선생의 사상을 일일이 열거하기가 벅차지만, 위의 소개로 선생의 독립운동가, 정치가, 사상가, 상하이 임시정부내의 최고 이론가로서의 면목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학을 공부한 나의 견해로는 선생은 ‘점진적 사회개량주의’(piecemeal social reformist) 이론가이자 탁월한 정치 사상가이시다. 만일 선생의 저술이 영어권에 영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더라면, 20세기의 정치사상가로 꼽히는 라스키((H, Laski)나 영국노동당을 발족(1906)시킨 페이비언협회(Fabian Society)의 일급 이론가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분으로 평가되었을 것이다.


나는 1980년대 중반 대만에 유학할 때 까지만 해도 선생에 대하여 깊이 있게 몰랐다. 신규식,박은식, 김규식, 이동휘, 신채호, 이시영, 김구 등등, 선열들에 대하여는 명망(名望)을 많이 들었지만 조소앙은 별로 많이 듣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같은 학교에서 유학하면서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와 쑨원의 삼민주의(三民主義) 사상 비교로 학위를 받은 선배와의 잦은 대화를 통하여 조소앙 선생에 대하여 좀 더 알게 되었다.


아래에서 조소앙 선생의 삼균주의에 대하여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삼균주의는 한마디로 앞으로 대한민국이 자주 독립하고 나서 국가를 건국할 때, 반드시 세 가지의 범국민적 균등의 기초 위에서 세울 것을 이론적으로 천명한 것이다. 세 가지 평등이란 정치균등, 경제균등, 교육균등이다.


정치균등을 보면,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의 평화와 행복을 위하여 어느 개인이나 계급의 독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선생은 말하시길 영미 서구자본주의국가는 자본가들이 전횡을 일삼고,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은 전체주의 파시스트가 군국주의 파쇼독재를 일삼으며, 소련은 노농계급(프로레탈리아)이 독재를 일삼고 있다. 오직 균등한 전민적 정치균등을 통해 18세 이상 남녀의 보통선거에 의해 정치에 참여하고 기본권이 헌법에 의해 보장되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경제균등을 보면, 자본주의 국가들은 소수 자본가 지주들의 욕망에 의한 계획 없는 경쟁적 생산으로 인한 집체적 무정부 상태와 분배의 불합리 불균등으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자본가들은 무제한적 사유 욕구로 절대다수의 국민인 노동자 농민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으며, 해외시장과 원료공급지를 얻기 위하여 약소국을 침략하여 식민지쟁탈전으로 전쟁을 빚고 있다. 그러므로 국민생활과 국가존립의 초석인 경제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생산의 국가적 지도 및 계획조정과 배분의 합리성을 강조하였다. 경제적 균등의 요점은 토지를 비롯한 국가기초에 중요한 대형 생산기구는 국유로 하여 국민의 기초적 경제생활을 균등화하는 것이다.


교육균등 주장에서는, 일국가의 문화가 곧 그 국가의 정신적 가치임을 강조한다. 국가의 교육은 국민의 정신을 공고히 하는 것이며, 국민 생활수준의 도덕적 질을 높이고, 국가의 일체의 능력을 과학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국가의 전반적 문화수준의 고저는 국민의 교육정도에 달려있다. 과거 한국국민은 교육을 골고루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음을 비판하였다. 선생은 장차 대한민국은 전 국민에 대한 무상으로 의무교육을 실시하여 조선시대 양반에 독점되었던 교육과 일제에 의해 말살된 민족교육을 부활시켜 문화민족으로 다시 일어설 것을 강조하였다.


선생이 기초한 삼균주의에 의한 건국강령은 1941년 11월 28일 임시정부에 의해 공포되었고 장차 광복 후 대한민국의 건국강령으로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정치균등으로 보통선거를 실시하여 성별과 계급의 차별을 묻지 않고 헌법에 국민의 기본적 권리의 평등을 확정하는 것이며, 경제균등의 실시로 국민의 기본적 생활의 평등화를 이루고, 교육균등으로 국민생활의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보급하여 국민의 문화적 수준을 향상시킴으로 세계 일등의 문화국가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선생께서는 1941년 초에 장차 태평양 전쟁이 발발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게 되면 일본의 패전은 확실하므로 한국의 독립이 머지않아 실현될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구미각국의 유력하면서 관찰하신 각국 정치제도 사회제도의 장단점을 취사선택하고 우리민족의 전통과 관련하여 깊이 사고하여 기초로 건국강령을 마련하셨다. 선생의 삼균주의 정치철학에는 민족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의 이상이 골고루 들어있다. 그 본바탕에는 국민의 행복과 민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가 면면히 흐르고 있고, 현대적 의미의 사회복지형 민주주의를 제시한 것이다.


지면상 제약으로 인하여 선생의 건국방략에 대한 세밀한 고려와 상세한 방침을 모두 열거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삼균주의 내용은 21세기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과 우리나라 정치인이 본받아야 할 점이 너무도 많다. 조소앙 선생의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원대한 구상과 세심한 계획을 살펴보면, 당시의 독립운동이 극도로 분열한 현상을 몸소 체험하시고 그것에 대한 반성과, 우리민족의 장단점을 꿰뚫어 보신 통찰에서 나온 것으로, 후손들이 민족의 장래를 그르칠까봐 미리 염려하신 듯하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서 선생께서는 꿈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온 후, 남북분단을 막아보려고 진력으로 노력하셨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연석회의에 김구 김규식 선생등과 함께 남측 대표로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와, 남북회담의 실패로 실망의 나날을 보내시다가 기어이 조국분단을 보셨다. 1950년 5월 30일 총선에서 선생은 서울 성북구 후보로 출마하여 전국 최고득표(34,035표)로 당선되어 미군정청 경무부장을 지낸 조병옥 박사를 이겨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한 달도 채 못 되어 발발한 6.25 전쟁에서 납북되시어 그 생사를 모르게 되었으니 또 하나의 커다란 민족적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선생의 남기신 업적 중에서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은, 그 어려운 시기에도 많은 저작을 남기셔서 한국의 전통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신 부분이다. 선생께서는 민족의 위인, 의병, 의사, 열사들의 유업을 전기형식으로 남기셨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80여 명의 유업을 기록한 유방집(遺芳集)을 1933년에 집필하셨다. 신라 원효대사전을 남겨서 이두(吏讀)가 설총의 발명이 아닌 원효대사의 창안임을 주장하셨다. 이순신 거북선연구(1934), 국사유소고 (1935), 박장군 순국30주년 기념선언문(1907년 정미7조약으로 군대해산 당시 자결한 훈련원 박승환 대장 추모, 1937), 건국단군 소사연고(1944), 화랑열전(1945) 등이 그것들이다.


또한 민족문화의 우수성과 민족정기를 함양하기 위한 저작으로 한국문원(韓國文苑, 1929년 2월 상하이에서 출판), 한국 금속활자의 세계적 우수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고려 말 이후로 주자(鑄字史)를 정리한 한국주자사고(韓國鑄字史考, 1933년 8월),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한국어교학법(韓國語敎學法, 1930년), 민족문제에 대한 견해를 상세히 밝힌 ‘제23주년 3.1절 선언’(1942) 등이 있다.


한국을 떠나서 해외에서 태어나 자라나는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주어진 여건상 평소에 들어볼 기회도 없으므로 간과하기 쉬운 애국선열들의 발자취를 찾아, 3.1절 기념행사와 함께 그 분들의 업적을 하나씩 찾아서 되돌아보는 것은 매우 의의 있는 일이다. 그 분들께서 개인의 영달과 행복을 초개같이 던지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헌신과 희생의 고난이 있었기에 바로 오늘의 대한민국과 현재의 우리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에게 이처럼 훌륭하고 뛰어난 애국애족의 선열지사가 있었음을 우리는 큰 자부심으로 느껴야 할 것이다.



참고자료:

삼균주의 연구논집 제10호(서울: 삼균학회, 1988. 11)

김준엽(金俊燁), 나의 광복군 시절 하(下) (서울: 나남, 1989)

무타오(沐燾) 쑨즈커(孫志科) 공저, 大韓民國臨時政府在中國(상하이: 上海人民出版社, 1992)


박 인 수

2012.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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