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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흔히들 사람은 육안(肉眼)과 영안(靈眼) 두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육안은 우리들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다섯 가지 감각(오감=五感) 중의 하나로 매우 중요하다. 영안은 육안과 달리 시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영역 이외의 것으로, 신의 존재나 절대적 초자연적인 대상과 교감하는 특수한 감지능력에 속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영안과는 다른 심안(心眼)을 제시하고 이를 통하여 지혜를 터득하고 저장하는 특수한 능력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


심안과 달리 영안의 능력은 최근의 동물실험 결과에 의하면, 비단 사람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개나 호랑이도 잠잘 때 꿈을 꾼다고 하니, 꿈속의 영역은 오감과 반드시 무관한 것은 아니다. 사람을 포한한 모든 동물은 곧 영(靈)과 혼(魂)과 백(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육안에만 의존하는 삶은 백(몸 덩어리)의 효용을 중시하는 삶이고, 영안이 발달한 사람은 영과 혼의 능력과 관련한 가치를 보다 추구하는 삶일 것이다. 짐승에게 영안은 있을지라도 심안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오직 사람만이 육안과 영안 그리고 심안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동물에게 본능은 있어도 지혜를 깨닫는 심안이 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일생 나뭇가지를 오르내리는 개미의 눈에는 태산 전체가 눈에 들어올 리 없고(蟻眼無泰山), 여름 한철 우는 매미에게는 가을이 있을 수가 없다.(夏蟬不知秋). 지구는 우주에 떠있는 한 개의 작은 먼지와 같은 행성에 불과하고, 그 지구상에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우리 인간도 무한한 공간(宇)과 무한한 시간(宙)의 우주적 스케일에 비춰보면 실은 한갓 미물에 불과하다. 종교 중에서 불교의 공(空) 사상에서 석가모니 고타마 싯달다께서 일찍이 이를 간파하여 설교하셨다.


우선 체력은 소나 말을 따를 수 없고, 용맹은 호랑이를 따를 수 없으며, 시력은 하늘을 나는 수리에 비할 바가 아니며, 후각은 개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음은 지능과 함께 육체적 능력 밖의 것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고, 영안은 특히 초자연적인 절대자를 감지하고 감응(感應)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먹고, 자고, 돈 벌고, 자식 키우고 하는 일상으로 분주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크게 마음에 와 닿지 않고, 당장 중요한 것도 아니다. 2천여 년 전 예수님도 당시 이 점을 충분히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요한6, 61-63)라고 일찍이 말씀하셨다.


이러한 육안의 영역 밖의 것들이 많음을 설파한 지혜는 예수 이전의 중국에도 있었다. 노자(老子)는 말했다. “아무리 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라고 하고(視之不見名曰夷),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라고 하고(聽之不聞名曰希), 잡으려 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을 ‘미’라고 한다.(搏之不得名曰微)” 그래서 귀에 잘 들리지 않거나 눈에 잘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희미하다’라고 말한다.


노자는 그 이유를 ‘큰 음은 소리가 없고(大音希聲), 큰 모양은 형체가 없기(大象無形)’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개미의 눈에는 거대한 태산이 들어올 리 없고, 인간의 귀에는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는 자동차가 내는 소리는 귀에 들리면서도 지구가 태양을 빠른 속도로 공전하면서 내는 소리를 지구표면에 붙어살면서도 들을 수가 없다.


실상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란 매우 힘 든다.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생명체를 병들어 죽게 하고, 우리 몸속의 기(氣)의 움직임도 보이지는 않지만 생명(몸)에 활력을 가져 준다. 종교를 믿는 신앙인에게 있어서도 절대적 존재나 성령을 느끼는 것도 비록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지만 늘 함께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와 마찬가지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눈은 있으나 볼 수 없다면 눈이 먼 사람이라 하듯이, 그리스도 신앙인이면서 영안으로 성령을 느낄 수 없다면 영적으로 눈먼 사람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믿는 이들 가운데서도 뭔가를 볼 수 없어 가끔씩 안달을 내는 이들이 있다.


필립보라는 제자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뭔가 보여주시기를 청하자, 예수님은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 8-12)


비단 필립보 뿐만 아니고 다른 제자들도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아버지께 다른 보호자를 청하여 보낼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하신 것이 바로 성령을 약속하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 교리의 중요한 내용이기도 하다. “그 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 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 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 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 안에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라고 누차 말씀하셨다.


성서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도 ‘쌍둥이’ 토마스라는 제자는 “나는 그 분의 손에 난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 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한다. 토마스는 즉 ‘안 보고는 절대로 못 믿는다.’(No See, No Believe.)라는, 아직 영안이 계발되지 않은 육안 중심의 확신주의 신봉자이다. 이런 ‘육안신봉주의’는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 중에도 많았을 것이고 지금도 우리들 주위에 많다.


역시 성서기록에 의하면, 여드레 뒤에 다시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하시고, “토마스야, 네 손가락을 여기 대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하자, 토마스는 그제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받아 들였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필립보의 회의나 토마스가 품은 의심은 오늘 우리들의 반복되는 회의와 의심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 살아생전 제1대 제자로 직접 보고 말씀을 들은 필립보와 토마스가 그러했을진대, 2천 여 해가 지난 오늘 우리에게 그러한 회의와 의심은 어떻게 보면 오히려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래서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성경에서 강조하신 것이다. 세월이 무한히 흘러가서 후세의 신앙인들이 반드시 그를 의심하고 회의할 줄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리라.


요즈음은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직접 듣고도 믿지 못하는 세상이니까, 더욱 성경 기록이 지닌 무게를 느끼게 된다. 바로 노자가 말한 ‘다섯 색깔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五色令人目盲), 다섯 음은 사람의 귀를 멀게 하는(五音令人耳聾)’ 세상에 오늘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현혹되고 들리는 것만 즐기다 보니,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는 더욱 더 멀리하게 되는 것이다.


노자나 석가모니나 예수님은 인류의 미래를 헤아려 보는 지혜가 충만하였다. 즉 육안과 함께 영안과 심안이 고도로 트이셨던 선지자들이다. 도교와 불교와 기독교와 같은 종교의 탄생은 그분들이 인류의 미래를 내다 본 혜안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공자의 경우는 종교를 창시하지 않았고 이점에서 유교는 종교가 아니다. 공자는 인(仁)의 실천을 통한 세상의 교화(敎化)와 덕화정치(德化政治)를 주장하였다.


지금 배금주의(拜金主義) 사조와 물질적 탐욕이 갈수록 온 세상에 넘쳐 팽배하고, 인륜과 윤리도덕은 내팽겨 진지 오래며, 인간적인 가치가 물질에 밀려 오직 물신숭배(物神崇拜) 풍조만이 넘쳐나는 오늘날, 인류의 구제와 구원을 지향하는 종교의 역할과 사명은 크게 기대된다. 이를 외면하고 종교가 앞장서서 부를 축적하고 물신숭배를 부추기는 일은 결코 없어져야 할 것이다.


새해에는 우리도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물신과 물질적인 우상을 벗어나서, 심안과 영안이 트이도록 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잘 새겨 볼 수 있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도 더 잘 새겨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힘쓰면 좋겠다.



박 인 수


2012년 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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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C 2012.01.11 02:03
    박인수님의 좋은 글 항상 잘 보고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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