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일꾼과 품삯의 비유' 말씀이 초창기 예수사람들에 의해 전승되고 마침내 복음서에 기록된 이유는 본문의 끝부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아마도 초창기 교회 내부에서는, 일찍부터 공동체를 위해 헌신한 사람과 뒤늦게 교회공동체에 합류한 사람 사이에 어떻게 차등을 두고 예우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적지 않은 고민과 이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공동체는 오랜 기도와 토론 끝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든 차별을 넘어 의무와 권리를 똑같이 나누는 고귀한 자매형제”라는 믿음의 고백으로 이 갈등을 넘어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이런 공동체의 결정을 부당하다고 느낀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일찍부터 공동체에 헌신해온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더 많이, 그리고 더 오랜 시간 동안 헌신해온 그들이 서운해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교회공동체는 기존의 모든 차별과 신분을 넘어선 공평하고 정의로운 세상, 즉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새로운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세상 나라 백성들과 다른 점은, 앞선 사람이 더 많이 갖고 뒤처진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기득권을 다 내려놓고 뒤늦게 합류한 자매형제를 기꺼이 끌어안으며 똑같이 나누고 누림으로써 이루어지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것이 당시 예수사람들의 믿음이고 고백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새 하늘과 새 땅의 질서였습니다.
하여 본문의 말씀은, 이런 새로운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고 기득권을 주장하며 교회의 일치를 방해하는 사람들은 먼저 참여했다 하더라도 뒤쳐질 수밖에 없고, 비록 뒤늦게 공동체에 합류한 사람이라도 새 질서에 잘 적응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면 새로운 세계에서는 앞선 사람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경고, 또한 격려의 뜻이 담긴 말씀입니다.
이런 초창기 예수사람들의 신념은 우리가 잘 아는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재산의 절반을 모두 탕진해버린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를 끌어안고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를 보고 맏아들은 심사가 뒤틀려 ‘아버지의 부당한 처사’를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맏아들을 달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5장 30~31절, 공동번역)
맏아들이 아버지의 처신에 불만을 가진 이유는 신앙의 의미를 대가와 보상에서 찾으려했기 때문입니다. 맏아들이 집에서 아버지와 고생하며 일하는 동안 둘째는 실컷 놀고 재산을 탕진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을 차별 없이 똑같은 사랑으로 대하는 아버지의 처신은, ‘대가와 보상’이라는 시각으로 보면 불공평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맏아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었기에 아버지의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며 자유롭게 누려온 반면에, 둘째는 아버지를 떠났기에 오히려 자유를 잃고 고통스런 삶을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하여 이제라도 둘째를 품어 안아 모두가 함께 자유와 풍요를 누려야 옳다는 것이 아버지의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