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강길 / 세계와 기독교 변혁연구소 연구실장
일반적으로 기독교 종파 밖의 세계 안에 선한 열매를 맺는 자들은 누구로부터 왔는가 물으면 배타주의 입장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인간으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 선한 열매를 맺은 그 존재는 도대체 궁극적으로 누구 안에 있는 것인지 더욱 되묻고 싶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유한자인 인간 존재는 언어를 넘어선 무한이 드러나고 있는 다양한 시공간적 맥락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무한의 차원이 언어를 넘어서는 차원이라면 그것이 '무'(無)이든 '도'(道)이든 '한울님'이든 '하느님'이든 '알라'로 표현되든 결국은 그 또한 궁극적으로는 '선'으로부터 아니면 '악'으로부터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가 믿는 궁극적 존재자인 하나님은 창조 세계 안의 모든 선한 열매들의 근원이 되신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만일 우리 자신들이 불교문화권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한다면 그 상향적 체험들은 무슨 언어로서 말해질 수 있단 말인가?
불교문화권에서 자라고 생을 마감한 사람들은 버림받고 저주받은 생명들인가?
기독교 종파 바깥에 있는 자들은 아무리 개과천선하고 아무리 노력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한낱 헛된 생명들인가.
그것이 일반계시든 특수계시든 어쩌든 간에 하나님이 역사하는 그 어느 곳이라면 왜 구원의 역사가 없다고 보는 것인가.
사실상 보수주의권에서 말하는 일반계시와 특수계시로 나누는 입장은 알고 보면 하나님의 활동을 오히려 축소시킨 신학적 입장이기도 하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생각해 보라.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 이 같은 열매들이 인류사적으로 기독교라는 종파 범주 안에서만 발견되어 왔던가?
보라. 이런 것을 금할 법이 없다고 했잖은가.
왜 성령의 활동을 기독교 안에만 가둬두려 하는가.
우리는 이제부터 기독교를 '기독교를 넘어선 기독교'의 차원으로서 볼 줄 아는 열린 눈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선 언제나 창조 세계를 사랑하사 이 땅에 자유와 평등을, 무릇 모든 생명을 살리시고 사랑과 평화를 심으신다.
나는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의 일을 사탄이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상 그 맺은 열매로 따진다면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세간의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잖은가.
보혈로 죄사함 얻고 구원받았다는 개신교인들이 1천만 명이나 가까이 되는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왜 이토록 각박하고 악해져만 가는가.
참 종교는 그 사회를 건강한 척도로 이끄는 궁극적 답변이 되어야만 한다.
유한자라는 존재의 행실들은 언제나 그 행실의 준거로 작동되는 내적 신념의 체계가 지닌 궁극성과 맞물려 있음을 기억하라.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누가 6:43).
선한 열매는 선한 것에서만 나올 수밖에 없다.
A에서는 A만 나올 수 있지 B가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다.
주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알아야 한다(마태 7:15~20).
이 땅에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심는 그 모든 에너지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다.
그럴 경우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적어도 ‘배타주의’만큼은 극복하고 기독교라는 종교적 범주의 바깥에도 항상 계셔왔던 하나님도 만남으로서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이 더욱 큰 차원으로 확대되는 그 ‘무진장한 넓음’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어쨌든 지금까지 나 자신이 본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전달하고픈 요지는 적어도 현재 한국 기독교의 저 끔찍한 '배타성' 만큼은 제발 극복하자는 데에 가장 큰 핵심적 호소가 있음을 덧붙여 두는 바다.
진리는 궁극적인 합리성에 기반하며, 그 옳음으로 인해 능히 그릇된 것을 압도하는 힘을 이미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진리 안에 있다고 여긴다면, 굳이 그 어떤 금지된 배타적 영역을 둘 필요도 없잖은가.
무엇이 두려우랴. 참으로 진리는 존재를 자유케 하는 것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