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바람
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같은 본문을 두고 다른 해석이 공존할 경우에 다수를 차지하는 ‘보수정통’ 교회에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배척한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다른 견해’는 일시적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합리적인 대화를 통해 보다 성숙하고 열린 신앙으로 인도한다는 점에서 장려되어야 할 일이지 이단시하고 배척할 문제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최후심판에 대한 비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유에는, ‘사람의 아들’로 오신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의 보좌에 앉아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을 오른편과 왼편, 둘로 나누고 상벌을 내리신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주님은 오른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에게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라.”고 하시고, 왼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에게는 “악마를 가두기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심판을 통해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은 극과 극을 달리는 두 세계 뿐, 중간 지점에 대한 언급이나 암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심판의 기준도 매우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헐벗고 굶주렸을 때 그를 도와준 사람들은 모두 준비된 나라를 상속받고, 그를 외면한 사람들은 모두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천국과 지옥’이 되겠습니다. 이에 대한 본문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마태복음 25:34~36, 공동번역).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마태복음 25:41~43, 공동번역).
하지만 심판의 내용이 발표되자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이나 왼편에 있는 사람들 모두 판결의 이유에 대해 납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절대심판권을 쥐고 왕의 자리에 앉은 ‘사람의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을 도와드렸습니까?”,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을 모른 체하고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이에 대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웬만큼 신앙생활을 한 교우님들 중에 이 비유를 모르는 분은 거의 없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해석자에 따라 매우 완고한 교리를 지지해주는 근거로 이해되기도 하고, 따뜻한 인류애를 가르쳐주는 말씀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본문이 보수적인 설교자에 의해 선포될 경우, 사람이 죽은 후에 갈 곳은 천국 아니면 지옥이며 중간 단계는 없다는 전통 교리를 지지하는 결정적 근거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이 본문이 진보적인 설교자에 의해 선포될 때는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중심 의도는 교리적인 재료를 제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 전 상영된 <울지마 톤즈>에서 이태석 신부님이 보여주셨듯이, ‘헐벗고 가난한 이웃을 주님 대하듯 섬기는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 나타난 최후의 심판이나,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이 가게 된다는 영원한 나라, 왼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가게 된다는 영원한 불 등의 비유는 모두 지극한 이웃사랑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극적 배경을 이루는 것일 뿐, 그것들 하나하나를 미래에 실제 이루어질 사실로 보는 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 진보 신앙을 가진 분들의 대체적인 시각입니다.
이처럼 같은 성서 본문에 대해 매우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지만, 보수건 진보건 본문을 대하는 해석자들에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철저하게 본문을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본문의 권위에 의존한다는 점입니다.
보수적인 해석자는 물론 진보적인 해석자도 성서의 본문 자체의 권위에 의혹을 제기하거나 비판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성서비평학을 통해 본문을 파헤치는 학자들조차도 결국은 해체한 본문을 다시 조합하여 보다 합리적이고 현대인이 받아들일만한 근사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성서 자체의 권위에 도전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성서의 권위에 대한 최종 승복, 이것이 보수건 진보건 우리 기독교 신앙인들의 공통분모이며 전통입니다.
그러나 성서가 현대인에게 여전히 의미를 가지려면, ‘성서의 권위’를 존중하되 해석자들이 그 권위에 구속되지는 말아야 합니다.
본문을 솔직하게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아무 전제 없이 고문서나 고대 기록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처럼, ‘일차적으로’는 아무 전제 없이 객관적으로 본문을 연구한 후에야 비로소 그 다음 단계로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본문에는 보수적인 해석자와 진보적인 해석자가 주목하는 두 가지 요소가 모두 들어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지상의 세계’와 함께 ‘천상의 세계’와 ‘지하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이천 년 전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 그 기반 위에 ‘심오한 이웃 사랑의 정신’을 예수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대인인 우리는 과학의 발전에 의해 오류로 밝혀진 원시세계관을 넘어, 그 중심 내용인 ‘심오한 이웃 사랑의 정신’에 집중하면 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성서는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살아날 수 있으며, 우리 기독교 또한 지구마을 모든 이웃들과 조화를 이루며 상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원석을 용광로에 녹여 순금을 뽑아내듯이, TEXT(본문 자체)뿐 아니라 CONTEXT(그 본문이 기록되기까지의 역사적 정황과 저자의 의도 등 본문의 배경을 이루는 모든 것들)까지 충분히 연구한 후에야 비로소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과거의 교리에 매이지 않은 열린 신학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