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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2013.09.12 23:56

산수화 한 폭에 얽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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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 중에는 중국 원대(元代)의 산수화가 황공망(黃公望)에 대하여 들어보신 분이 계실 것이다. 황공망의 대표작인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는 워낙 유명해서 한중일 3국의 웬만한 동양화 소개책자에는 꼭 등장한다. 그림의 크기는, 가로 660센티 세로 33센티에 달하는 긴 두루마리로 되어있다. 중국의 절강성(浙江省) 부춘강(富春江) 주변의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당시의 경치를 실물대로 그린 것이다.


황공망이 6년간 이 그림을 완성한 것은 그의 86년 생애 중 72세 때였다고 한다. 거금(距今) 약 660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이 한 폭의 그림은 명(明) 나라 때인 거금 360년 전에 불에 타서 두 폭으로 나눠지게 되었고, 또 60년 전에 반폭은 중국대륙(절강성 박물관)에 남고, 또 반폭은 타이페이의 고궁박물원에 나뉘어 보관되어 오다가, 2011년 6월 2일부터 9월말까지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에서 두 개의 반폭을 합쳐서 전시하는 '산수합벽(山水合璧, 산수 두개의 보석을 합친다는 뜻)'이란 타이틀로 기획되어 한정기간 특별 전시되었다. 당시 중화문화권의 뉴스 중 최대 이슈가 바로 둘로 갈라졌던 그림 한 폭을 전시하는데 집중되었다. 아래에서 그림이 둘로 갈라지게 된 배경을 독자들께 소개해 드리고자 한다.


명대 관리를 지낸 오홍유(吳洪裕)라는 사람이 자나 깨나 소중히 가까이 하던 그림 한 폭이 있었는데, 죽기직전에 머리맡의 비단 보자기를 풀게 하고 그 그림을 태운 재를 자신의 관속에 넣어달라는 유언을 한 직후에 눈을 감았다. 마치 당태종(唐太宗)이 왕희지(王羲之)의 천하명문인 난정서(蘭亭序)를 자기 관속에 함께 넣어 묻어달라는 유언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하인이 그의 유언대로 불에 태우던 그림을 마침 들이닥친 그의 조카 오자문(吳子文)이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그림대신에 다른 그림을 불속으로 집어넣고 그 그림을 얼른 끄집어내었으나, 중간부분이 이미 불에 붙어 불을 껐지만 그림은 두 동강이 나게 되었다. 지금부터 360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이것이 ‘부춘산거도’ 한 폭 그림이 두 토막으로 나게 된 내막이다.


지금부터 60년 전에 국민당 정부가 모택동에게 패하여 대만으로 정부를 천도할 때 가져온 반 폭 그림은 후반부에 속하는 것으로 무용사권(無用師卷)이라 부르고, 절강성 박물관에 남아있던 전반부는 반폭은 잉산도(剩山圖)라 부른다. 황공망이 부춘산거도를 그리게 된 것은 그의 스승인 무용선사(無用禪師)에게 일생의 가르침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려져 선물한 것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무용스님에게 갔던 그림은 명대에 역시 유명한 산수화가인 심주(沈周)의 손에 들어갔는데, 그는 그림에 제자(題字)가 없음을 안타까이 여기고, 그림에 어울리는 글씨를 받고자 서예가를 찾던 중에 그만 그림을 잃어버렸다. 잠시 그림을 맡겨 놓은 친구 집의 아들놈이 그림을 돈받고 팔아버린 것이다. 심주는 그림을 도로 찾기 위하여 백방으로 수소문 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그림이 다시 매물로 나온 것을 발견하고는 부리나케 돈을 구해 와본즉 그림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려버린 것이다.


심주는 그 그림을 되찾을 수가 없어 허탈에 빠졌다. 그러나 그림을 도저히 잊을 길이 없던 그는 자신의 기억력을 총동원하여 황공망의 ‘부춘산거도’ 그림을 모사(摹寫)하게 되었다. 심주의 모사작품 그림은 지금 북경에 남아있다. 2005년도 옥션장에 매물로 나왔는데 인민폐 20억 위안(元)에 낙찰되었다. 우리 한화로 1천 3백억 원에 달하는 놀라운 액수이다. 그 후에도 우수한 모사 또는 모방 작품이 더 나왔다. 지금 중국인들은 전 세계에 약탈로 빠져나간 중국문화재를 모조리 사들이고 있다. 전 세계 박물관과 소장하고 있는 개인들에게 접근하여 정부차원에서 팀을 만들어 잃어버린 문화재와 보물들을 찾아내고 있다.


황공망의 오리지날 그림은 둘로 나뉜 채로 여러 소장가의 손을 돌고 돌아 명말의 유명한 서예가인 동기창(董其昌)의 소유가 되었다가 동기창이 오홍유의 할아버지에게 판 것이다. 그림을 탐낸 오홍유의 할아버지가 관직의 힘을 동원하여 그림을 소유하기 위해 동기창에게 무단한 압박을 가했으리라 여겨진다. 청대에 와서 서예와 그림 애호가이자, 청나라를 최대 강성으로 끌어올려 40년 동안 통치한 황제인 건륭제의 소유로 북경 황실의 소장품이 되었다.

1937년 일본 관동군이 일으킨 7.7사변으로 중일 양국 간 전면전쟁이 발생하였다. 관동군이 만주를 벗어나 중국전역으로 침공하여 전쟁을 확산한 것이다. 일본군이 북경, 상해, 산둥반도, 홍콩의 4개 방면에서 소위 ‘올코트프레싱’ 전술로 중국정부를 사면에서 전면적으로 압박해 들어갈 무렵, 일본군 선발대와 특무첩자들이 가장 먼저 약탈을 노린 것이 중국의 막대한 국보급 문화재였다.


포성소리를 들어가면서 문화재부터 먼저 운반하라는 것이 중국국민당 지도자 장개석의 명령이었다. 당시 밤을 새우면서 국보급 문화재를 나무박스에 패킹하고 포성을 가까이에서 들으면서 달구지에 실어 날랐던 증인들이 아직도 더러 생존해 있고 그들이 지금 당시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당시 중국대륙의 이동수단이라고는 달구지와 인력에 의한 것밖에는 없었다. 군용 지프와 말 이외에 철로와 트럭과 같은 대규모 이동수단은 아직 없었을 때였다.


무수한 국보급 문화재와 보물은 국민당 정부를 따라 티벳고원 아래 대륙의 서남지역 오지인 사천성(四川省) 산중의 전시 수도 충칭(重慶=중경)으로 옮겨졌다. 중국정부로서는 최악의 전시상황에 처한 터라 포장 운반된 문화재들은 풀려지지도 않은 채로 방공터널 지하창고에 보관하였다. 그러다가 2차 대전에서 중국이 일본에 승리한 후 정부가 수도를 다시 남경으로 환도하자 문화재들은 다시 남경으로 운반되었다. 그러나 장소만 옮겨졌을 뿐 포장된 문화재 박스들이 풀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계속 창고에 보관되었다.

왜냐하면 대일항전 승리의 기쁨도 잠시, 곧장 이어진 5년간의 국공내전이 발발하였고 결국 국민당이 공산당에 패하자 문화재 박스들은 다시 대륙에서 바다건너 타이완 섬으로 운반되었다. 국민당은 대륙을 철수할 때 사람에 앞서 국보급 문화재와 중앙은행 보관 막대한 양의 금괴들을 먼저 타이완으로 옮겼다. 그 와중에서 황공망 그림의 두 개 반폭은 각각 이산(離散) 하였고, 하나는 국민당을 따라서 타이완으로 가고 하나는 중국에 남게 된 것이다. 중국에 남게 된 반폭 그림은 문화재를 깨부수고 불태우던 문화대혁명의 광란의 소용돌이 10년 기간 중 용케도 불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최후로 소장하고 있던 어느 대학교수가 절강성 박물관에 기증하게 된 것이다. 참으로 기구한 사연을 지닌 한 폭의 그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두 개로 나뉜 반폭 산수화 합작전시를 위해 대만해협을 건너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으로 오기에 앞서 하나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림의 값을 얼마로 매겨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절강성 박물관에서는 인민폐 1억 5천만 위안으로 평가해 주었다. 아니, 모사(模寫) 작품도 20억 위안을 호가하는데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렇다. 이 그림은 그야말로 값을 매길 수 없는 작품으로 자타가 공인한다. 보험료를 지불해야 하는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의 부담을 최대한으로 덜어주기 위한 중국 측의 배려에서였다. 역대 중국의 국보급 문화재는 대부분 타이완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고, 그 때문에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은 세계 5대 박물관에 속한다. 타이페이 고궁박물원을 관람하지 않고는 중국문화재에 대하여 말할 수가 없다. 북경 자금성 고궁에 속했던 문화재들을 소장하므로 박물관이 아닌 ‘고궁박물원’이라고 부른다.


‘산수합벽’ 전시는 중국공산당이 대만에 보여준 정치적 배려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두 개의 반쪽 그림이 합쳐지듯이 중국과 타이완은 하나의 국가로 합쳐진다는 정치적 상징을 내포한 전시였다. 2009년도에 중국정부가 중국국민의 대만 관광을 자유화한 지 1년 만에 대만을 다녀간 중국인이 150만을 넘어섰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그런 날이 올지 부러울 따름이다. 남북으로 민족이 갈라선지 65년이 되도록 아직도 생이별한 혈육의 생사확인은 물론 상봉조차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차이점은 그대로 인정하면서 민족공동의 이익추구라는 과제를 중국인들은 현실적으로 지혜롭게 풀어 나가는데 한민족은 왜 하지 못하는가?

박 인 수

2013.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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