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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강길 / 세계와 기독교 변혁연구소  연구실장


한국교회는 신자들에게 "무조건 믿으라"고 참 많이들 말한다.
예컨대 이해되지 않는 사실이 있거나 솔직한 의문스러움이 있다면 그것은 곧잘 무시되고 그저 믿으라고만 한다.
그러면 축복을 내릴 것이라는 얘기다.


대체 무엇을 믿으라는 것인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뚝딱 창조했다는 것과 성서의 문자 하나하나 모두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 독생자 예수가 동정녀 탄생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하셨다는 점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멘” 하면 당신의 영혼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식으로 신앙을 정립하고 나아가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영혼구제 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또 그렇게 구원을 쉽게 받는 것도 죄다 하나님의 은혜라면서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입장을 정당화시킨다.
하지만 이것은 서남동의 표현대로 참으로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돌이켜보면 세상에는 이해되지 않는 사실들이 참으로 많은데도 말이다.


만일 믿음이란 게 있다면 그것은 세계 안의 건강한 일반적 합리성마저 도외시하는 맹목적 신념은 아닐 것이라고 본다.
인간의 이성 역시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자연스럽게 드는 솔직한 의문스러움을 단순히 불신앙이라고 치부하기엔 성급한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유명한 디트리히 본회퍼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God)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면, 이 세계의 무신성(無神性)에 대해서도 조금도 은폐하지 않고 남김없이 속속들이 조명하는 방식으로 신을 말해야 한다.
성숙한 세계는 성숙하지 못한 세계보다 훨씬 무신적(無神的)이며,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 더 가깝다"고.


이러한 점은 신앙과 이성의 문제로서 말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신앙과 이성은 곧잘 대립한다고 생각한다.
믿음이란 불가피하게 이성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과학과 종교의 대립에서 흔히 이를 찾아볼 수 있겠다.
이때 일방적인 한 쪽 시각만 견지한 채, 세계 안의 문제를 따져 물을 경우 둘은 대립하거나 결코 합의를 볼 수 없다.


결국 명백한 일반성 앞에서 종교적 교조주의자들은 ‘크신 하나님의 뜻을 어찌 미천한 인간이 알 수 있느냐’며 불가지론으로 덮어버리기 일쑤인 것이다.
물론 속이야 편하겠지만 그것은 분명 신앙을 빙자한 비겁자일 수 있다.
독단주의자들은 그러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의 입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면서 정당화한다.
“믿기만 하면 된다”고.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간의 이성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같은 자세는 어떤 면에서 명확하게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하나님 주신 이성을 폐기시켜 버리는 더 큰 잘못을 범하게 된다고도 볼 수 있다.
실로 우리가 믿어야 할 바는, 하나님이야말로 우리들이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좀더 깊게 알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예컨대 천동설과 지동설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 옛날 천동설은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던 세계관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어느 누구도 천동설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고 본다.


실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과 합리적 이성은 결코 대립하지 않는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세계 안의 건강한 합리성에 대한 통찰에도 깃들어 있다.
이 세계 역시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속하며, 하나님 역시 창조 세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이성으로서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다고 보는 자세 역시 매우 위험한 독단에 속한다.
우리가 제아무리 뛰어난 통찰력을 가졌다고 해도 결국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일 따름이다.


이 점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은 결국 '이성마저 꿰뚫는 신앙'이지, '이성마저 배제한 신앙'은 결코 아닌 것이다.
만약 우리가 믿고 있는 바가 참으로 진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어떤 합리적 비판에도 끄덕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길 바란다.
바로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의 신앙은 깨어지지 않을 참 진리에 대해 점점 더 근접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진리는 언제나 '쉽고 단순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면 나 역시 동의하는 바다.


하지만 단순함에도 두 가지가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말 그대로의 단순함'과 '복잡함을 거쳐서 나온 단순함'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보는 하나님의 지혜와 예수의 말씀과 진리는 바로 후자에 있다고 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깊은 우러나옴이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인류 지성들의 온갖 사유의 궤적들 혹은 복잡하고 견고한 그 어떤 합리적 비판과 고찰들에도 무던히도 여유 있게 빛을 발하고 묵묵히 시대를 앞서가는 영속적 통찰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유아기의 우리 인간에겐 곧바로 붙잡혀지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필요하다면 전문적으로까지) 수련을 필요로 할 만큼 끊임없는 반성과 성찰을 필요로 하는 고도의 수행과정을 거칠 때에 비로소 얻어지는 영롱한 결정체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진리는 합리주의의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리 안에서는 그 어떠한 금지된 것도 있을 수 없다.


진리 안에서 자유할 수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은
세계 안의 건강한 합리적 일반성마저 끌어안으면서 이를 넘어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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