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복/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보통 기독교인들은 죽은 후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것을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종교적으로 편향된 생명 개념은 예수의 말씀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와 무지에서 나온 것이다.
착한 목자 예수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 10:10)고 선언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생명이란 뭘까?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 민중들이 말할 수 없이 짓밟히고 억눌린 삶을 살고 있었음을 생각할 때,
풍성한 생명이란 사람이 신체적·물질적·정신적으로 자유와 평등과 인권과 행복을 누리며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듯 영생은 시간적으로 영원하다는 양적 개념이 아니라 질적 개념임을 암시한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성서에서는 뭔가를 참으로 ‘안다’(know)는 것은 그것을 참으로 ‘사랑한다’(love)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하나님과 예수를 사랑하고 그분들의 뜻에 따르는 삶이 바로 영생의 길이라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예수의 육체적 삶은 33살로 끝났다.
예수 당시의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았음을 감안하더라도, 예수는 평균 수명도 살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육체적 숨을 거두었다.
그것도 피비린내 나는 십자가처형으로.
하지만 그것으로 예수의 생명은 끝났는가? 아니다.
20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예수는 살아 있다. 성령으로, 생명의 숨결로, 사랑의 숨결로, 정의와 평등의 외침으로, 자비와 동정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의 친교라는 따스한 인간적 정(情)으로, 그리고 교회라는 공동체로 살아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부활했다는 것은 신자들의 근거 없는 주관적 신앙고백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신자들의 개별적 삶과 교회의 공동체적 삶과 세속(世俗)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역사적 예수의 생에 대한 하나의 감동적인 객관적 진술이기도 하다.
그렇다. 부활과 영생에 대한 신자들의 간절한 꿈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의 유한한 육체적 생명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종교적 욕망 혹은 이 땅에서 누리는 행복을 저 세상까지 영원히 연장하고 싶은 탐욕일 수 없다.
불로장생의 신비한 묘약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영생을 누리고 싶다 ! 이것은
‘나는 예수처럼 살고 싶다.
나는 생명사랑·인간사랑·민중사랑의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고 싶다.
나는 내게 주어진 단 한 번의 목숨을 세상 부귀영화를 탐하는 데 허비하지 않고 예수처럼 질적으로 고양된 삶을 살고 싶다’
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영생의 길은 세속을 멀리하고 천사처럼 고결하게 살려고 애쓰는 데 있지 않다.
영생이란 지금 이 순간 이 땅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지는 은총이다.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다정히 어깨동무하고 살았던 예수의 따뜻하고 넉넉한 인간미가 그립다.
이것과 거리가 먼 교리적·율법적 사람들에게는 영생의 은총이 깃들 여지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계 바늘은 쉴 새 없이 돌고 있다.
모든 살아 있는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매 순간 죽음에 다가선다.
하지만 재깍재깍 돌아가는 시계 바늘 속에서도 예수처럼 살아 매 순간 영생을 맛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심장의 고동이 멈춰 육체적 생명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아름다운 사람, 즐거운 추억, 그리운 이야기로 되살아난다.
요즘 ‘업그레이드’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이 땅의 신자여,
그대는 생명사랑·이웃사랑·민중사랑 실천의 생동하는 믿음으로 그대의 신앙생활의 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려는가.
이 땅의 목회자여,
그대는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올곧은 역사의식의 균형 잡힌 조화로 그대의 목회의 질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지 않으려는가.
말없이 떨어져 거름으로 썩어 봄날의 푸른 잎으로 되살아나는 가을날의 낙엽의 그 단순 소박한 생명의 지혜를 우리의 영생하는 삶의 지혜로 삼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