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초대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 장군의 생애
-- 오클랜드한인회 주최 제 68주년 광복절 기념행사 강연 요약문(2013. 8. 15)
이범석 장군은 1900년 10월 20일(음력)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전주이씨 광평대군(세종대왕의 5남)의 17세손으로 부친은 이천 군수를 지냈고, 7세에 생모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으나 계모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고 합니다. 그는 5년제 경기고보(현재 경기중고의 전신)에 재학시절에 점차 민족의식이 싹텄고 부친이 일본총독부에 의해 군수에 임명된 것을 불만으로 여기던 중, 15세 되던 해 여름에 외삼촌 친구인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난 것이 소년 이범석의 일생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오늘 제가 비록 이범석 장군의 생애에 관하여 말씀을 드리지만, 그 분에 관한 저의 지식은 책이나 자료를 통한 2차적인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어르신 분 중에는 이범석 장군의 생존시대를 몸소 살아오신 분들도 더러 계십니다. 따라서 저의 강연도중 잘못된 곳이나 틀린 곳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소년 이범석은 여운형을 만난 지 1년 후에 여운형을 따라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습니다. 상하이에서 그는 신규식, 신석우, 신채호, 조성환과 같은 여러 명사를 만났고, 예관(睨觀) 신규식 선생의 소개로 탕지야오(唐繼堯=당계요)가 세운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에 입학하게 된 것이 그가 평생 군인으로 입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운남강무당은 신해혁명을 이끈 쑨원(孫文=손문)의 혁명인재 양성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운남성 독군(督軍) 당계요가 자신의 세력지반에 세운 유명한 육군군관학교로 중공인민해방군 총사령을 지낸 주더(朱德=주덕)도 이 군관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소년 이범석은 16세의 나이에 이국근(李國根)이라는 가명으로 나이를 실제보다 2살 높여 운남강무당에 입학하였다고 합니다. 이범석은 3.1운동이 나던 해인 1919년 3월에 운남강무당 기병과 제12기를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이때 교관이 청년 이범석에게 ‘쇠처럼 강인한 천리마’란 뜻으로 철기(鐵驥)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국내의 3.1운동을 전해 듣고 7월에 신규식 선생의 지시에 따라 당계요 장군에게 특별허락을 받고 만주로 가서 독립군의 대일 무력전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만주의 유하현(柳河縣)에서 이시영 선생 형제분들이 설립한 독립군 양성학교인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취임하였습니다. 이때 일본육사를 졸업한 이청천(지대형)과 김경천(김광서) 등과 함께 이범석도 잠시 교관을 함께 맡았습니다. 1911년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그동안 3천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일본과 손잡은 만주군벌의 압박으로 인해 1920년 8월 폐교하게 됩니다. 마침 이범석은 김좌진 장군의 요청으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의 교관으로 부임합니다. 이때부터 이범석은 김좌진 장군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고, 1920년 10월 20일에서 23일까지 4일간 전개된 청산리대첩 전투에서 연성대장으로 제1선에서 지휘하여 승리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습니다.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후 이범석은 일본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하기 위해 김좌진 장군과 헤어져 홀로 북만주와 러시아령 연해주 일대로 떠돌아다니며 잠시 방랑생활을 합니다. 당시 그가 얼마나 처량했는가하면, 그를 찾아온 김좌진 장군은 철기와 그의 애마가 수일간 밥도 굶는 것을 보고 입고 있던 가죽옷을 팔아서 양식을 보내주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1923년 5월에 의병출신의 북로군정서 연대장 김규식(金奎植, 임정 외무장관 김규식 박사와 동명이인)이 시베리아에서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였는데, 철기는 기병연대장이 되어 활동하다가 다시 김좌진 장군의 부름을 받고 돌아와 항일군 조직재건을 하면서 1925년에 김마리아와 결혼을 합니다. 이때부터 다시 김좌진 장군을 도와 대일투쟁을 하다가 일본군의 끈질긴 추격을 피하여, 1929년에는 다시 외몽고로 들어가서 약 2년간 수렵생활을 하면서 방랑하던 도중인 1930년 1월에 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손에 암살당합니다.
1931년 9월에 만주사변(9.18사변)이 발생합니다. 만주사변으로 인하여 만주 지역의 군벌인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은 일본군에 총 한방 쏘지 못하고 넓은 만주를 관동군에 내주고 후퇴합니다. 장학량은 그의 아버지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이 일본군에 의한 열차 폭파사건으로 사망한 후, 31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군벌을 그대로 물려받은 젊은 군벌로 유명한 서안사건(1936.12)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그가 일반 군벌과 다른 점은 애향심과 애국심이 남달리 강하다는 점입니다. 그런 그가 ‘중국 내부통일의 급선무’를 주창한 북벌군 총수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후퇴명령에 따라 관동군에게 만주를 통째로 내주고 만리장성 이남으로 후퇴합니다.
장학량이 수행한 장개석의 만주군벌 후퇴명령에 불만을 품은 많은 휘하 중, 유일하게 명령에 불복하고 무력 항일저항을 한 장령으로 마잔산(馬占山=마점산)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요사이 중국인들은 모두 그를 칭송합니다. 중국어 러시아어 일어에 능통한 이범석 장군은 이때 철기의 항일투쟁 경력을 높이 산 마점산 장군의 요청으로 마장군의 작전과장으로 활동합니다. 그러나 마점산 부대도 결국 우세한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에 패퇴하였고, 1932년 말에 이범석은 마점산 장군과 함께 중동철도를 건너 러시아령으로 도피해 추격을 피합니다. 거기서 소련 적군에 의한 강제 무장해제에 저항하다 총상을 입고 바이칼호의 북쪽 톰스크(Tomsk)에서 8개월간 억류생활을 당합니다. 그가 매우 존경하던 김좌진 장군의 공산주의자의 손에 의한 암살과 이때의 경험으로 이범석은 이후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됩니다.
약 2년간의 억류생활 후 이범석은 1934년 7월에 톰스크를 떠나 마점산 장군과 함께 모스코바를 경유, 국민당 정부의 요청으로 군사시찰단의 임무를 띠고 폴란드, 독일, 이탈리아, 이집트를 시찰한 후 동년 10월에 중국 상하이로 돌아옵니다. 그때 국민혁명군 총수 장개석 아래서 2인자 자리를 점하고 있던 부총수 장학량이 후원하였습니다. 상하이에 돌아와 보니 윤봉길 의사의 의거(1932. 4.29)로 말미암아, 장개석은 종래의 미온적인 태도에서 돌변하여 ‘4억 중국인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의사가 해냈다’고 극찬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로 임정산하 군대훈련을 절실하게 여긴 김구주석의 요청을 장제스(장개석)는 받아들였습니다. 장제스는 그가 광둥에 세웠던 황포군관학교를 중국의 여러 지역에 중앙군관학교의 분교로 설치하였고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낙양분교(洛陽分校)입니다. 하남성(河南省) 낙양에 소재한 군관학교입니다. 당시 재중 한국인에게 이곳이 중요했던 이유는 바로 이곳에서 김구주석의 요청으로 광복군에 국내침투 임무를 목표로 비밀 군사훈련을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 CIA의 전신인 당시 미군전략정보국(OSS)의 위탁교육으로 교관은 모두 미군이었습니다. 유럽시찰을 마치고 막 상하이로 돌아온 철기는 이곳에서 김구주석의 부름으로 한적군관 대대장으로 활동을 개시합니다.
일본의 야욕으로 인해 1937년 ‘7.7사변’으로 중일 간에는 전면전이 발발합니다. 중국역사에서는 무수한 전란이 발생했지만 ‘7.7사변’ 만큼 큰 영향을 끼친 전란은 없습니다. ‘7.7사변’은 일본군이 중국민중을 마치 주걱으로 냄비 안에서 비빔밥을 비비듯 해버린 대사건입니다. 중국역사상의 어느 전란도 중국민중 전체를 그렇게 내몰지 않았습니다. 중국인들은 이를 영원히 잊지 못할 수치로 여깁니다. 일본 대본영 참모본부는 중국내 군벌에 대한 각개공작을 펼쳐 2중 3중으로 중국의 대립분열을 사주하였습니다. 사면초가에 놓인 중국정부는 유일하게 외국과 통로가 트인 버마와의 험준한 산악도로를 통해 숨통을 트고, 전시 수도 사천성 충칭(중경)에서 웅크린 채 일본의 공습으로 하루하루 버티는 최악의 상황에 놓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충칭에서 중국정부의 도움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습니다. 1943-4년의 일이었습니다. ‘7.7 사변’ 직후 이범석은 중국군 고급장교(소장, 중국육군 제3로군 고급 참모 겸 제3집단군 55군단 참모처장)으로 여러 전투에 참가합니다. 그러던 중 1940년 9월, 드디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부가 설립되자 이청천 장군은 광복군 총사령관에 취임하고, 이범석 장군은 초대 참모장에 취임하게 됩니다.
이범석 장군은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여운형, 신규식, 김좌진 세분을 듭니다. 평소 그는 직설적인 험구로 임정요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지만, 신규식과 김좌진 두 분에 대해서는 말이 모자라 칭찬을 다하지 못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합니다. 그가 남긴 회고록 <우등불>에는 1934년 10월까지 중국과 시베리아를 떠나 유럽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생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의 가장 허물없는 친구이자 평생 동지였던 분은 광복 때까지 임정 김구주석 판공실 주임을 맡았던 민필호(閔弼鎬) 선생입니다.
민필호 선생의 사위이자 광복 때까지 이범석 장군의 부관을 지냈던 이가 바로 2011년 6월에 작고하신 김준엽(金俊燁) 전 고려대학 총장이었습니다. 아래에서 김준엽 총장께서 기록하신 글에 따라 이범석 장군이 이끄신 광복군 특수요원이 완전무장한 채로 1945년 8월 1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의 이름으로 해방 후 3일 만에 최초로 일본군 수비대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고국으로 돌아와 여의도 비행장으로 입국하는 이야기를 좀 할까합니다.
1945년 7월말, 미군 OSS 특수공작훈련을 마친 제1기생 50명은 미군의 한반도 진격 작전계획에 따라 언제든지 국내로 침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출격은 곧 죽음을 각오해야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광복군 50명은 함경도부터 남해안까지 지구별 책임자를 아래와 같이 정하고 4-5명의 잠입조를 편성하였습니다.
함경도반장 김용주(金容珠), 경기도반장 장준하(張俊河), 평안도반장 강정선(康楨善),
강원도반장 김준엽(金俊燁), 황해도반장 송면수(宋冕秀), 충청도반장 정일명(鄭一明)
전라도반장 박 훈(朴勳), 경상도반장 허영일(許永一)
이범석 장군은 국내침투 전 대원을 대위에서 소령으로 승진시켜 사기를 높였는데, 사지로 가는 그들을 위한 특별선물인 셈이었습니다. 야음에 낙하산 타고 투하하거나 잠수함으로 상륙하는 구체안을 마련하고 국내수집정보를 무전으로 중국내 미군사령부로 보고하는 임무 등 만전을 기하였습니다. 8월 7일에는 김구주석, 이청천 사령관, 이범석 장군과 미국 측의 OSS 총책임자 도노반 소장, OSS 중국지구 책임자인 홀리웰 중령 등 양측 수뇌가 참석한 최종작전계획을 마친 후, 김구주석은 이들에게 마지막 향연을 베풀었습니다.
김구주석이 드디어 그들과 작별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두루마기 안주머니에서 둥근 회중시계를 꺼내 높이 들어 모두에게 보이면서 말했습니다. “이것은 내가 13년 전에 윤봉길군을 죽을 곳으로 보낼 때, 그날 봉길군이 허름한 내 시계와 바꿔 차고 내게 준 것입니다. 봉길군이, 선생님 제 시계와 바꿔 찹시다. 제가 가진 것은 선생님 것보다 나을 것입니다. 오늘 이후 어차피 저는 시계가 필요 없겠지만 제 일이 성공하기 위해선 시계가 아주 없어서는 안 되겠지요 하던 윤의사의 눈망울이 이제 여러분의 눈동자로 빛나고 있소” 라고 말했습니다.
시인 두보(杜甫)가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그대로 남았어라(國破山河在)’ 라고 읊었듯이, 일제의 강탈로 나라는 망했어도 조국 산하는 조상대대로의 그 산천입니다. 광복군 국내 정진대가 이제나저제나 조국 산하로 진입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던 중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8월 10일, 급하게 달려온 미군소령(사젠트)이 전해준 말은 출동통지가 아니라 일본의 항복뉴스였습니다. 광복군이 임무를 시작하지도 못하고 전쟁이 종식되자, 이제까지 중국내 광복군에 대한 미군의 일체 지원이 중지되었습니다.
미군들은 기뻐서 춤을 추었지만, 김구주석이나 광복군은 허탈감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때 김구주석의 허망한 심정은 <백범일지>에 잘 서술되어 있습니다. 중국정부는 미국에게 원자폭탄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고 따라서 일본의 항복은 빨라도 1946년 말경으로 예상하였습니다. 일본의 항복 결과로 이제 광복군의 국내 침투는 일본군과의 전투작전이 아닌 미군의 항복수리로 그 임무와 절차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또한 일본패망 직전에 대일 선전포고한 소련군이 만주와 북한으로 진입하면서 한반도는 미소 양국 군대에 의한 항복수리를 위한 분할 점령이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8월 13일, 미군은 광복군 총사령부에 이범석 장군을 ‘국내정진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였고, 중국전구 미군 사령부가 사절단을 중국의 시안(서안)에서 서울로 파견하니 국내정진군도 그 편에 동승하라는 명령을 시달하였습니다. 비행기 한 대를 파견하므로 인원도 7명으로 줄이라고 했다가 재차 4명으로 줄이라고 하달하였습니다. 일본이 항복하자 미군은 어제까지 전우로 대하던 광복군에 입장변화를 보여 이제 명령의 시달자로 변했습니다.
일본이 항복하고 3일이 지난 8월 18일 새벽 5시, 서안비행장에는 미군 C-46형 수송기가 미군 18명과 광복군 4명(총 22명)을 태우고 한국을 향하여 이륙하였습니다. 한국인은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盧能瑞) 등 4인의 선발대였습니다. 중국대륙을 가로지르는 6시간의 비행 후 오전 11시에 비행기는 고도를 낮추며 드디어 황해바다로 진입하였습니다. 프로펠러 비행기라서 기체가 몹시 흔들리는데 이범석 장군은 종이에 무엇인가 열심히 적고 있었습니다. 그가 남긴 글귀를 아래에 적어봅니다.
보았노라 우리 연해의 섬들을 / 왜놈의 포화 빗발친다 해도/ 비행기 부서지고 이 몸 찢기어도/ 찢긴 몸 이 연해에 떨어지리니/ 물고기 밥이 된들 원통치 않으리/ 우리 연해 물마시고 자란 고기들/ 그 물고기 살찌게 될 테니......
김준엽 총장의 회고에 의하면, 이범석 장군은 오랜 유랑생활과 다양한 인생경험을 통해 우러나온 문학적 소질이 매우 뛰어난 분이었다고 합니다. 위의 글귀에서 우리가 보듯이, 일본이 비록 항복하였지만 아직까지는 적인 일본군이 지키는 한국을 적절한 입국절차도 없이 날아드는 미군수송기를 일본군 수비대가 언제든지 격추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위중한 상황을 감지하고 즉석에서 나온 그의 글귀에는 평소 이범석 장군의 조국을 사랑하는 깊은 애국심이 절절이 배어있음을 봅니다.
수송기에서는 황해를 건너면서 매 5분마다 ‘일본 조선군사령부’에 ‘미국 군사사절단 진입 중’ 이라고 타전을 해도 아무런 회신이 없었습니다. 속이 타는 긴장된 상황에서 수송기가 드디어 한강줄기를 따라 여의도 상공에 이르자 ‘여의도에 착륙하라’는 일본군의 답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의도 상공을 두 번 선회한 후에 비행기는 폭음을 내며 여의도에 착륙하였습니다. 시간은 낮 열두시 반이었습니다.
여의도 비행장에는 일군의 전투기와 중형전차 및 병기들이 즐비하게 도열해 있었고, 돌격태세로 총에 착검한 일본군이 얼굴에 방독면을 쓰고 수송기를 완전히 포위한 상태로 반경 약 30미터로 포위망을 좁혀왔습니다. 그때 수송기에서 뛰어내린 대원 22명은 산개하면서 그들과 전의가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기관단총을 모두 어깨에 걸쳤지만, 무기를 잡은 손에는 땀이 스몄다고 장준하 선생은 그의 회고록 <돌베개>에서 말합니다.
이윽고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 조츠키(上月良夫) 중장이 참모장 이하라(井原) 소장 및 참모들을 거느리고 다가섰습니다. “나니시니 이라시타노(무슨 일로 왔소)? 라고 묻자, 비어드 중령을 중심으로 좌우로 벌려선 대원들은 대답대신 여의도 상공에 뿌리던 일본어와 한국어로 된 선전전단을 내밀고 입국사유를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조츠키는 지금 일본은 정전만 한 상태이고 동경 대본영으로부터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았으므로 일단 돌아갔다가 휴전조약이 체결된 다음에 재입국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지금 일본 병사들은 꽤 흥분해 있으므로 대원들의 신변보호에 안전책임을 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비어드 중령은 “일본 천황이 이미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 사실을 모르느냐? 이제부터는 동경의 지시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으나, 조츠키는 구실을 들어 물러가버리고 여의도 경비사령관 시부자와(澁澤) 대좌에게 맡기자, 시부자와는 맥주와 사이다를 가져오라고 명한 후, 일행대표에게 날씨가 더우니 포플러 나무그늘 밑에서 이야기 하자고 말했습니다. 무더운 뙤약볕에서 연속된 긴장감으로 목이 타들어가던 순간에 이보다 더 반가운 말이 없었다고 장준하 선생은 <돌베개>에서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첫 사이다 잔을 비우기도 전에 일본군은 여전히 포위망을 좁히며 생포할 기세로 눈빛에 독을 내뿜으면서 반경 7-8미터 거리로 다가서고 있었습니다. 접대하던 일군 장교들은 하나 둘 슬금슬금 자리를 비우고 통역졸병 하나만이 남자, 순간 이범석 장군이 “심상치 않다. 깨끗이 살아온 우리가 여기서 욕을 보나보다”라고 각오를 다지자, 대원들은 모두 재빨리 사격거리를 유지하며 기관단총을 앞으로 하고 권총의 안전장치도 풀었습니다. 미군대원들은 눈만 두리번거리며 있을 때, 비어드 중령은 “전쟁은 끝났소. 쓸데없는 일이오.” 라고 외쳤다. 여의도에 착륙한지 3시간 10분의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고 합니다.
욕되지 않는 죽음을 맞기 위하여 깨끗하게 한바탕 해버릴 결심을 굳히고 있는 그때, 여의도 경비사령관이 헐레벌떡 뛰어와 포위병 지휘관에게 몇 마디 말을 하자 그제서야 일군 포위병들은 뒤로돌아 자세를 하였고 철모와 총검도 내렸습니다. 경비사령관은 재차 대원일행에게 도저히 흥분된 자기 병사들을 억누를 길이 없으니 그만 돌아가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대원들도 총을 내렸고, 비어드 중령은 당장 돌아가고 싶어도 연료가 없어 불가능하므로 항공기 가솔린 보급요청을 하였습니다. 일군 사령관은 여의도엔 가솔린이 없어 내일 중으로 운반해 주겠다는 약속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광복군 대원들에게는 해방된 고국에서 첫 날과 첫 밤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미군 교관과 함께 중국 쿤밍(昆明=곤명)의 미군 사령부와 통신시도를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고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데, 시부자와 대좌가 맥주와 안주를 든 병졸을 데리고 숙소로 들어와 낮의 서슬 등등하던 기세와 달리 꿇어앉아 일행모두에게 직접 맥주를 따르자 일본의 항복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평생 술과 담배를 일체 입에 대지 않던 장준하 선생도 이 날만은 주위의 강권에 의하여 승리의 축하로 한 잔의 맥주를 마셨다고 합니다.
김준엽 선생은 어떻게든 대원들의 임무를 국내의 애국지사들에게 알릴 궁리를 하다가 소변이 마려워 변소를 찾았다고 합니다. 그때 문 앞에서 경계임무를 맡던 일본 헌병 중 한 명이 변소를 안내하였는데, 아무리 보아도 한적사병 같기에 우리말로 “요새 서울 사정은 어떻소?”라고 묻자, 놀라 당황하면서도 기쁜 얼굴로 쳐다보더라고 합니다. 이에 얼른 다음과 같이 나지막하게 말했습니다.
“우리 일행은 4명이고 지휘관은 이범석 장군입니다. 우리는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국내 정진대원이며, 내일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휴전조인 후 다시 입국할 것입니다. 그러니 급히 이 사실을 신석우 선생, 조만식 선생, 여운형 선생, 김성수 선생, 안재홍 선생께 알려주시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니 남에게 이야기하지 말고 꼭 해주시오.”
그 한적헌병은 놀라면서도 희색이 만면했고, 틀림없이 알리겠다고 대답하면서 흥분된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음 날 19일, 급할 것이 없는 미군 대원들과는 달리 광복군 정진대 4명은 어떻게든 국내인사들에게 그들의 입국사실을 알리려고 노력하면서 이범석 장군은 사절단의 고문자격으로 왔기 때문에 비어드 중령을 설득하여 일본인 총독을 만나 담판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습니다. 오후 2시 가솔린 연료보충을 마친 미군 수송기는 대원들을 싣고 여의도를 이륙하여 중국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4인의 국내정진대원은 해방된 조국의 주인으로 제 나라에 돌아왔지만 아무런 발언권도 없는 설움을 눈물로 삼켰다고 합니다.
해방직후 전후 한국에 관한 아주 중요한 정세급변이 있었습니다. 원폭투하와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한반도 상황을 둘러싼 이제와 전혀 다른 하나의 일이 전개되었습니다. 한국은 지금까지는 중국전구(中國戰區)에 속하였으나, 1945년 9월 1일부터는 한국이 태평양 전구로 이관되어 미군의 관할구로 이관된 것입니다.
따라서 전후 한국문제는 중국전구 최고 사령관 장개석이나 중국내 미군사령관인 웨드마이어(Wedmeyer) 장군이 아닌 태평양전구 맥아더 사령관의 소관사항으로 이관되었습니다. 중국정부는 3.1운동 이후 수십 년간 한국임시정부를 지원하고서도 한국의 전후처리 문제에 발언권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중국내 약 10만에 이르는 광복군이 임시정부의 정식군대 자격으로 한국으로 귀국할 기회가 원천적으로 박탈되었습니다.
중국전구에서 태평양전구로의 관할권 이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에게는 너무나 안타깝고 우리민족에게 한으로 남는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임정 지도부가 비록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로 분열되어 있었지만, 이 말은 동시에 임정 내부에는 민족주의 계열의 광복군과 공산주의 계열의 조선의용군을 포용할 수 있는 지도력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양대 계열이 무장한 채로 입국했더라면 미소 군대가 일본의 무장해제를 위하여 38선으로 분단하여 행할 임무를 대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김준엽 총장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를 두고 ‘천추의 한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고 통탄하십니다.
오늘 강연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범석 장군은 광복 후 귀국하여 정치에 투신합니다. 귀국 후 1946년 혼란한 국내 정세에 ‘민족청년단’을 창설하여 다방면에서 국가를 이끌어갈 인재양성에 주력하였습니다. 2년 동안에 100만 명이 넘는 청년들이 가입하여 훗날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국방 사회 문화 학계를 두루 이끄는 지도자로 헌신한 분들이 많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 장군을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에 지명을 합니다. 그러나 국방부 내 정보국의 신설로 미국 고문단과 마찰로 국방부 장관을 사임하였습니다. 6.25 직전에는 국무총리에서도 물러납니다. 전쟁 중 부산정치파동의 배후자라는 누명도 쓰게 된 그는 이승만대통령과 정치적 입장이 달라 많은 정치적 마찰을 겪었고, 이승만 대통령의 애국심을 믿고 따랐다가 자유당 창당에 또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5.16 후에는 정계를 은퇴합니다.
현재 천안의 독립기념관 내 철기 이범석 장군 기념비석에는 다음의 여덟 자 한문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苟存猶今 志在報國’(구존유금 지재보국). 뜻풀이를 하자면, ‘구차하게 오늘까지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조국에 보답하고자 할뿐이다.’
조국에 보답한다는 말은 철기 이범석 장군께서 평생을 일관한 신념이자 철학이었다고 합니다. 그 글귀는 이범석 장군께서 중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특수훈련의 책임자로 있을 당시 대원들에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제68주년 광복절 기념행사를 맞아 우리는 다시금 이범석 장군의 나라사랑과 국가를 위한 숭고한 헌신을 재조명해 봄으로써, 후손으로서 우리가 그 분께서 일생을 통하여 보여주시고 실천하신 애국애족의 정신을 본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해방 후 친일파들이 득세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민족정기는 사라져 버린 대신에 기회주의가 판을 쳤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위정자들의 가식적인 애국과 국가지도층의 부정부패는 사회 구석구석에 독버섯처럼 만연한 조국의 현실은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 민족정기가 점차로 사라지고 부터 사회의 윤리기강도 무너져갔고 개인의 도덕심도 따라서 실종된 지금,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입으로는 애국과 사회정의를 말하지만 머리에는 간사한 생각이, 행동은 기회주의로, 추구하는 바는 사리사욕과 당리당략뿐인 오늘의 한국현실이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동포사회로도 퍼져가는 것을 보자니 참으로 개탄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범석 장군께서 일생을 통해 보여주시고 실천하신 그 마음 그 정신이 되살아나서 오늘의 우리를 편달(鞭撻)하는 정신적 채찍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만 강연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2013. 8. 15
박 인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