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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예수와 역사적 예수의 사이에서...

                                                                 김준우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 전 감신대  교수

교회의 예수는
(1) 하느님의 독생자로서 창조 이전 태초부터 계셨고, 만물의 창조자이다.
즉 구약에서는 야훼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아버지의 대리인으로서 창조한다(요 1:3; 고전 8:6).
(2) 삼위일체의 제2격으로서 세상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 인간 예수 속에 성육하신 분이다.
(3) 역사적 인물로서 2천 년 전에 팔레스타인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났으며, 후에 자신이 메시아임을 알고 기적을 일으키는 치병자가 되어 공생애를 사시다가 인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4)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아난 그리스도로서, 하늘에 오르사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동안에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으로서 어느 곳에나 계시는 분이시다.
(5) 세상이 끝날 때 다시 오실 심판자이시다.
(6) 예수를 믿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죽은 다음에 천당에 가기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 연구를 통해 알려진 중요한 사실은

첫째로, 예수 당시의 사회적 세계가 극도로 착취적인 세계였다는 사실이다.

로마의 지배가 시작된 이후, 제1차 유대-로마 전쟁(67 CE)까지 거의 한 세기 동안에 보수적인 농민들이 33차례에 걸쳐 소요사태를 일으켰다는 사실은, 입에 풀칠만 할 수 있어도 견디는 농민들이 얼마나 착취당했기에 그처럼 죽기 살기로 저항운동을 펼쳤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 주변에 그처럼 많은 병자들이 모여들었던 것도 농민들이 소작료와 각종 세금, 빚 때문에 거의 다 빼앗기고, 영양실조에 걸렸기 때문에 결국 여러 가지 질병에 시달렸음을 보여준다.

둘째로, 이런 상황 속에서 소작농이며 문맹이었을 예수의 핵심적 메시지는 “하느님의 궁극적 목적이 하늘을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의 형태로 가져오는 것”이라는 점이다.

세례 요한은 그 나라가 임박한 미래의 사건으로 기다렸기 때문에 금식했지만,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힌 예수는 그 나라, 즉 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지금 이곳에 현존하기 때문에,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무상의 치유와 아무나 참석하는 공동식사를 결합시킨 “계산된 전략”을 통해 “브로커 없는 하느님 나라”(unbrokered Kingdom of God)의 잔치를 즐기며 그 나라를 실연함으로써, 당시 로마제국의 브로커 체제와 세계화에 저항하는 대안공동체를 형성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묵시종말론을 현재화시킨 비종말론적 사회적 혁명가였다. 예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전통
적 권위와 관습적 지혜에 대해 도전하고, 비유와 경구들을 통해 체제전복적인 대안적 지혜를 가르친 “자생적인 견유철학자”, “말썽꾼”이며 “언어의 천재”였으며 “시인”으로서, 그의 삶의 모토(motto)가 “축하하고 축하하고 축하하는”(celebrate, celebrate, celebrate) 것일 만큼 사람들에게 신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메시아라는 자의식을 품을 만큼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니라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예수는 착취당하고 짓밟히던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율법의 규정을 뛰어넘으며, 억압과 폭력에 맞서 비폭력적으로 자신의 존엄성과 주체성(subjectivity)을 지키며, 그리스의 독자적 견유철학자들과는 달리 상호의존하는 연대성(solidarity)의 생활방식을 가르쳤다.
자신의 가르침을 구체화한 성전 사건을 계기로 예수는 십자가에 정치범으로 처형된 후, 무덤에 매장되었다기보다는 아마도 “석회를 뿌린 구덩이”에 던져졌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한다.


셋째로, 역사적 예수는 이처럼 “대의를 지닌 반란자”였을 뿐 아니라, 제자들과 복음서 기자들, 그리고 기독교 신자들이 현재 자신들의 삶 속에서 계속적으로 그의 삶의 방식을 구현함으로써 나타나는 “부활한 예수”이며 “하느님의 성육신으로서의 예수”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크로산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지상의 예수는 단순히 사상가였을 뿐만 아니라, 대의를 지닌 반란자(a rebel with a cause)였다. 그는 태도로 보아 유대인 농부였으며, 또한 그는 자신의 태도가 유대인들의 하느님의 태도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 속에, 또한 자신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 하느님의 나라가 계시되었으며, 유대인들의 정의의 하느님이 불의한 세상 속에 성육신하였다고 말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결코 말과 사상, 경구와 비유, 말씀과 대화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생활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하느님 나라가 육신과 피로 이루어진 몸에 관한 것임을 뜻했다. 정의는 단순히 말과 사상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언제나 몸과 생활에 관한 것이다.

부활은 단순히 예수의 영이나 혼이 이 세상에 계속해서 살아 있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단순히 예수의 추종자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것도 아니다. 부활은 그 구체화된 삶이 이 세상에서 강력하게 능력을 발휘하는 상태로 남아 있다는 뜻임에 틀림없다.

나는 역사가로서 이렇게 주장하며,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주장을 믿는다. 그러므로 오직 한 예수만 있다. 그 갈릴리 사람은 이 불의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았으며, 이 세상의 대표자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또한 법적으로 처형되었으며, 그가 계속해서 힘을 불어넣는 존재로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신자들에게 하느님이 불의의 편이 아니라는 점, 심지어 (혹은 특히) 제국의 불의의 편이 아니라는 점을 가리킨다.
 
두 명의 예수, 즉 부활절 이전의 예수(pre-Easter Jesus)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post-Easter Jesus), 지상의 예수와 천상의 예수, 육체적 몸을 입은 예수와 영적인 몸을 입은 예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한 예수, 즉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만이 있을 뿐인데, 그는 심지어 예수가 죽은 후에도 예수와 같이 정의의 하느님을 성육신하는 삶을 계속하기로 결단하는 신앙공동체에게는 유대인의 정의의 하느님을 성육신한 예수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과 삶은 옳은 것이며 귀한 것이었지만,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실제로 죽음을 나눌 용기는 없었던” 베드로, “예수와 함께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지키기 위해 죽을 수 있는 용기는 없었던” 베드로에게,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었던 예수가 “베드로의 지식을 행동과 실천으로 옮기게 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이었다.
 
이런 점에서 크로산은 예수의 부활이 그가 사라진 후에도 제자들 자신들의 “살과 피”로써 예수의 삶을 강력하게 이어갔다는 고백으로서, 단순한 “영혼의 부활”이나 “몸의 부활”이 아니라 “육체 부활”이라고 주장한다.


넷째로, 역사적 예수 연구는 “예수의 종교”가 “예수에 관한 종교”로 고백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신화화되었는지를 매우 치밀하게 밝히고 있다.
 
한 예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후대의 기독교인들이 고백한, 생물학적 진술이 아니라 신앙고백적 진술로서 예수를 통해 하느님을 만난 경험을 신화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성품과 속성을 온몸으로 드러낸 예수가 언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순간에 대해 바울은 “부활”을 통해서(롬 1:4), 마가는 “세례”를 통해서(막 1:11), 마태와 누가는 “잉태”를 통해서(마 1:20; 눅 1:32), 요한은 “태초”부터(요 1:1- 18)라고 주장한다.
즉 후대에 기록된 문서일수록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된 것이 시간적으로 앞당겨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1) 관계의 유비로서, 이스라엘의 왕은 전통적으로 대관식에서 “하느님의 아들”로 불려졌으며(삼하 7:14; 시 2:7; 시 89:26), 천사들도 흔히 “하느님의 아들”로 불려졌지만(욥 38:7; 시 29:1),
(2) 생물학적 유비가 되어 예수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하느님(성령)인 것으로 이해되고,
(3) 형이상학적 유비가 되어 삼위일체의 제2격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 더 나아가 “동일본질”과 “성육신”으로 고백되는 이런 신화화 과정은 근본적으로 예수가 하느님의 성품과 속성을 보여준 “하느님의 얼굴” 혹은 “창문”이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존 쉘비 스퐁 감독은 예수가 인간의 영적인 가능성, 즉 우리가 하느님의 품성과 속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준 인물로 이해한다.

“복음서 기자들이 자신들의 제한된 개념 속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영의 사람 예수의 특정한 생애 속에서 자신들은 단지 하나님을 본 것만이 아니라, 우리들 각자가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완성했을 때에 어떤 모습일지(a picture of what each of us might look like in our fulfilled spirit state)를 보았다는 사실이다.
 
즉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가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운명에 대한 초상화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매일같이 새로운 인간적 극대화(human heights)에 대해 개방적일 때 영의 사람 예수는 우리들 각자 속에서 계속해서 찾아질 수 있다고 암시하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와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가 자신의 인생을 마치 소유한 것처럼 완전히 내어줄 수 있음을 보여주었으며, 혹은 자신의 인생을 마치 생명의 원천과 접촉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마도 바로 그 생명의 원천과 하나인 것처럼 완전히 내어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십자가의 길은 한결같은 취약성의 길이 된다. 하나님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계시한 것은 바로 예수의 존재,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the full humanity of Jesus)이었다. 또한 우리를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의미와 연결시킬 것도 역시 우리 각자의 존재, 우리의 완전한 인간성(our full humanity)이다.

그러므로 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나에게 유신론적 하나님의 실재에 관한 명제적 교리들, 즉 우리의 세계에 침입하며, 예수라는 인간 속에서만 잠시 동안 우리와 함께 살았던 유신론적 하나님의 실재에 관한 문자화된 교리들을 강요하지 않는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내가 충만한 삶을 통해, 무진장한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창조한 모든 잠재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용기를 통해,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현존을 모방하는 데 있어서 예수에 의해 능력을 얻는 것만을 요구한다.

그것은 내가 거룩한 존재와 접촉하기 위해 나의 인생에 등을 돌린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존재는 내 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나의 목숨과 사랑과 존재를 내어주는 정도까지만 교제한다는 말이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생명의 대리인이 되지 않고서는 내가 이해하기 시작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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