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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그마의 예수”에 묻혀 실종된 “역사적 예수”


                                                                                   김준우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 전 감신대  교수


기독교가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급류를 거치며 변화하면서 흐르는 동안 기독교의 기초가 된 역사적 예수는 실종되고 말았다. 따라서 “도그마의 예수”에 대한 철저한 재해석은 우선 실종된 역사적 예수를 다시 찾는 작업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나사렛 예수에 대해 기독교 외부에서 최초로 기록한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와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가 똑같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예수에 대해 가장 확실한 사실은 그가

(1) 기독교 운동의 창시자였으며,
(2) 로마제국의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처형되었지만
(3) 그 운동이 계속되었고
(4) 확장되었다는 사실이다.

\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드러난 것처럼, 로마제국에 의해 반역죄로 처형된 예수를 하느님이 다시 살리셨고 그 예수가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한다는 확신과 선언, 그리고 예수의 치유 행위의 계속(행 3:13-16)은 예수처럼 비장한 “순교를 각오하는 용기가 없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이것이 초기 기독교의 확장의 근원적 힘이었다.

그리고 이 확장은 주로 지중해 연안의 디아스포라, 그 정치적 역량을 상실한 “뿌리뽑힌 공동체”를 중심으로 활동한 바울의 이방인 선교의 결과였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의 삶의 방식을 계속함으로써 부활한 예수의 삶을 살던 제자들이 “랍비”와 “예언자” 예수를 “주님”과 “메시아/그리스도”로 높여서 고백하는 과정,

즉 “이
땅 위에서의 하느님의 통치”를 가르쳤던 “선포자 예수”(proclaimer Jesus)를 “구원자로 선포된 예수”(proclaimed Jesus as the redeemer Christ)로 정의하는 과정,

“하느님의 무차별적 사랑”을 믿고 살도록 가르쳤던 “예수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만드는 과정

에서도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바울은 예수의 목회의 사건들과 가르침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를 목적으로 오직 예수의 죽음과 부활승천(빌 2:5-11)만을 지중해 지역의 밀의종교인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 즉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우주적 구원자 신화와 연결시킴으로써, 예수는 역사적 인간이 아니라, 우주적이며 보편적인 “영적 실체”가 되어버렸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를 “옷 입어”(롬 13:14; 갈 3:27),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롬 10:12; 갈 3:28; 고전 12:13)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를 비인격적 그리스도로 바꾸었다.


뒤이어 요한의 창조 이전부터 선재하는 로고스 기독론이 당시의 영육 이원론 세계 속에 전파되면서, 구원이 “이 세상으로부터의 영적 탈출”을 뜻하게 되었다.
 
제자들의 현재적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부활한 예수에 대한 존경심과 흠모를 넘어, 이처럼 지중해 연안의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로 해석된 결과, 예수는 이제 더 이상 제자들의 삶 속에 재현되지 않은 채, 단지 신적인 구원자로서 신앙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로버트 펑크의 지적대로, 예수의 “비전”(the vision)을 바라보는 대신에
“그 비전을 지녔던 분”(the visionary)을 바라보고,
그의 이야기(the story)로부터 돌아서서 “그 이야기꾼”(the storyteller)을 바라보고,
우상파괴자(iconoclast)를 “우상/성상”(icon)으로 만든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는 “교회”로 대치되었고,
“도그마의 예수”는 비인간으로서 신화적 존재가 되었으며,
인간은 비인간적 고통 속에서 “영적인 구원”을 희망함으로써,
이 세상은 더 이상 인간의 변혁의 대상이 아니라 신의 섭리에 맡겨졌고,
인간은 역사의 방관자로 머물게 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를 유대인들의 서사적 전통에 따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이 후에 배타적으로 “하느님의 독생자”로 바뀌게 되었을 때,
또한 하느님의 독생자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로 가르쳐지기 시작했을 때,
모든 사람이 스스로를 하느님의 자녀로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영적 신비가 예수,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어떤 중개자(브로커)도 필요 없이 직접 하느님과 만날 수 있다고 가르쳤던 역사적 예수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복음서 기자들은 로마 당국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예수 처형의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림으로써, 결국 후대에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에 대해 무자비한 박해와 학살을 끊임없이 자행할 때, 원수까지 사랑하도록 가르쳤던 유대인 예수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초대교회가 기다렸던 예수의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자, 그 이후 기독교인들이 “하느님 나라” 혹은 “새 하늘과 새 땅” 대신에, 모세를 기다리던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 듯, 죽은 다음의 “천당과 지옥”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또한 예수를 믿는 사람들만 그 영혼이 천당에 들어갈 자격이 주어지는 것으로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세례 요한의 “미래적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이 땅 위의 현재적 하느님 나라”를 실연하느라 몸바쳤던 사회적 혁명가 예수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3세기 초엽까지 간헐적으로 로마제국의 극심한 박해를 받던 기독교가 3세기 중엽에는 “예수의 아버지는 요셉이었다”고 주장한 안디옥 교회의 감독 사모사타의 바울(Paul of Samosata)을 감독직에서 쫓아내고(268년),
콘스탄틴
황제의 관용 칙령에 의해 순교를 면한 신자들이 아리우스 논쟁, 즉 예수는 하느님의 피조물인가 아니면, 하느님과 “동일본질”(아타나시우스파)인가 하는 논쟁 때문에 서로를 돌로 쳐죽인 사건들(324년),
그래서 극장의 코메디언들이 “기독교인들을 더 이상 사자들에게 던질 필요가 없다. 그들은 서로를 잡아먹으니까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던지면 된다”고 외칠 때, “함께 아파하는 삶의 세계를 향한 정치”를 펼쳐나갔던 예수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니케아 신조(325년)에서 “동일본질”이 선언된 이후 아리우스파가 강제추방을 당하고, 337년 콘스탄틴 황제가 죽고 제국이 둘로 나뉘어지자, 동방에서는 아리우스파가 정통이 되고, 서방에서는 아타나시우스파가 정통이 되었을 때 머리 둘 곳조차 없던 예수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또한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생일을 로마제국의 군대 수호신 미트라스(Mithras)의 생일을 택해 기념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예수가 “가이사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철저하게 구분할 것을 가르친 탈정치화된 예수가 되었을 때,
로마 군대에 의해 정치범으로 처형된 예수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또한 어거스틴과 터툴리안이 주장했듯이, 여자들은 “아내이건 어머니이건 간에 유혹자 이브”로서 “임신을 통해 원죄를 다음 세대에게 성병처럼 전염시키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느님이 요구하는 완전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가 문자적으로 동정녀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할 때, 여인들과 어린이, 가난한 자들과 죄인 등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잔치했던 예수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기독교의 핵심적 교리들, 즉 원죄(어거스틴), 성육신(아타나시우스), 삼위일체(가파도키아 교부들), 속죄론(안셀름) 등의 교리들을 예수가 가르친 적이 있는가?

예수가 스스로를 “주님”이나 “구세주”라고 불렀던 적이 있었는가?
 
예수는 자신이 흘릴 “피의 공로”를 믿는 사람들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가르친 적이 있는가?

또한 예수의 부활을 뒤따를 신자들의 부활이 영혼불멸과 동일시될 뿐 아니라 육체부활마저 문자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죽을 운명(mortality)을 부인하고, 최후의 신성모독, 즉 “너희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는 뱀의 유혹에 항복하도록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이 아닌가?


한 마디로 여성학대뿐 아니라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노예제도를 정당화하고, 유대인뿐 아니라 유색인종, 동성연애자, 심지어 동물들에게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나쁜 소식”이었으며, 오늘날 인류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초강대국 미국, 그 “예수를 가장 존경한다”는 부시를 위시해서 미국의 기독교 우파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며 자행하는 아마겟돈 전쟁 속에 예수는 실존하지 않는다.

이처럼 역사의 예수는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인의 생활과 교리 속에서 실종되었다.

기독교는 “역사의 예수”가 아니라 바울의 “케리그마의 그리스도,” 그 “도그마의 예수” 위에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종교”라기보다는 “예수에 관한 종교”가 된 때문이다.

예수가 목숨 바쳐 가르친 “이 땅 위의 하느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자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죽은 다음에 갈 저 하늘의 나라”를 바라보는 종교가 된 때문이다.

물론 교리적으로는 예수의 인성과 신성 모두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예수의 신성이 인성을 덮어버림으로써 도케티즘이 되어버렸고, 예수는 수퍼맨이나 외계인 E.T.처럼 초인간적 혹은 비인간적인 존재로 간주되었다. 철저한 우상타파자(iconoclast)였던 예수가 성상(icon)으로 변하여 교회 벽 속에 갇혀버린 것이다.

갈릴리의 겸허한 교사 예수, 하느님
의 정의를 실연하다가 처형된 예수가 천상의 그리스도 속에, '금관의 예수'(김지하) 속에 묻혀 실종된 것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가 실종된 이유는

첫째로,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조에는 모두 예수의 출생에 이어 곧바로 그의 죽음과 부활이 이어질 뿐, 예수의 생애의 “가운데 알맹이,” 즉 그의 가르침과 행적에 대한 고백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즉 바울의 “그리스도 케리그마”에 기초한 기독교의 기본적인 신앙고백들에서 예수의 핵심적 삶은 실종되고 말았다.

물론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매주일 복음서를 읽고 설교를 해왔다. 그러나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해도,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는 데에는 “교리적으로 전혀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말이다.
 
이처럼 기독교의 신앙고백들은 예수의 생애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었다. 예수의 생애가 교리에서 실종됨으로써, 교회에서, 또한 기독교인의 삶에서 예수가 실종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고 판단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니케아-칼케돈 회의 이후, 신성과 인성이 함께 강조되었기 때문에, 신적인 능력을 지닌 그는 우리와 같은 진짜 인간도 아니었으며, 혹시 과거에는 인간이었다 할지라도 지금은 하늘에 올라가 하느님 우편에 앉아 있는 분으로서 미래에 다시 올 인물이기 때문에 현재에는 현존하지 않는 실종된 존재가 되었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고백, 즉 그의 잉태, 출생, 처형, 매장, 부활승천은 모두 수동태 동사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는 하느님의 계획에 철저하게 복종해서 움직여진 꼭두각시였을 뿐이지, 주체적인 자의식을 갖고 결단을 했던 적이 없었던 존재로 간주되었고,
예수에 대한 이런 수동적 이해는 결과적으로 기독교인들이 박해와 억압을 받는 상황에서는 수동적 고난 마조키즘을 초래하였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콘스탄틴 이후 기독교인들이 세력을 갖게 되었을 때는 지배적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야심과 개인적 안정 앞에서 예수마저도 수동적으로 이용당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역사의 현장에서 예수는 자주 실종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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