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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매장, 부활
                                                                           ~ 역사적 예수 와 신화적 예수 ~
                                                                                             
                                                                                                  정연복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1) 역사적인 것과 신화적인 것을 구별할 때가 되었다. 기독교의 이야기 가운데 의심받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도 전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수가 무덤에 묻혔다는 것이 사실인지도 우리는 모른다. 그의 시체는 십자가에 그대로 방치되어 개나 까마귀의 먹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부활 후 예수의 현현(顯現)에 대한 보도들도 그 장소, 시간, 목격자 등이 서로 매우 다르기 때문에, 이런 현현들이 실제로 어떤 종류의 사건이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

2) 예수는 아마도 예루살렘이 순례자들로 가득 찼을 때 공공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어 처형되었을 것이다. 그토록 많은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주변에 몰려들었던 절기들은 소요와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였다.
 
특히 유월절은 이집트 노예생활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절기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가야바와 그 밖의 다른 대제사장 당국자들은 성전 제의를 책임지던 사람들로서, 예수가 성전 지역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빌라도에게 고발했을 가능성이 크다. 빌라도는 아마도 가야바의 지원 아래 자신의 재량권을 행사했을 것이다.

유대 당국자들 앞에서의 재판은 전적으로 창작일 가능성이 있다. 얼마 뒤 예수에게 헌신했던 추종자들이 다시 모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기억과 확신을 조직해서 하나의 운동이 되었다.

3) 물론 우리는 예수의 시신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기독교 전승의 발전 과정에서 시신 처리에 얼마나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는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시신 처리와 관련된 소름끼치는 장면은, 그랬기를 바라는 기대와 상상 속에, 적절한 매장의 모습으로, 심지어 왕족에게나 해당하는 매장의 모습으로 탈바꿈함에 따라, 이에 대한 전승의 보도들도 계속하여 점점 위엄을 갖추게 되고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전승이 발전됨에 따라, 예수의 매장은 적의 손으로부터 친구의 손으로 옮겨갔고, 부적절하고도 황급한 절차로부터 충분하고도 완전한 절차로 손질이 가해졌다. 이 결과가 마가복음 15:42-46의 잘 알려진 이야기에서 나타난다.

4) 예수가 그의 친구들에 의해 매장되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비역사적이다. 만약 그가 어떤 식으로든 매장되었다면, 그는 친구들이 아니라 적들에 의해 매장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돌을 캐내어 만든 무덤이 아니라, 죽은 고기를 먹는 동물들이 예수의 몸을 쉽게 먹을 수 있도록 얕은 무덤에 묻혔을 것이다. 이것은 불유쾌하지만 피할 수 없는 결론이다.

5) 우리는 부활을 전혀 다르게 보도하는 4복음서의 본문들을 쉽게 조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의도와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간단히 말해 결론은 이렇다:
 
첫째, 부활 이야기는 단 하루만에 일어난 사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죽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그 죽은 예수가 자기들 사이에서 계속 힘을 불어넣고 있는 경험을 어떻게 설명할까 하는 몇 달이나 몇 년 동안의 제자들의 고민을 반영한다.

둘째, 부활한 예수가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난 이야기는 사실 "환상"(vision)에 관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지도력 싸움에서 생긴 문학적 창작들이다.

셋째, 부활은 예수가 그를 따랐던 사람들 및 친구들과 계속 함께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여러 은유들 중 하나다.

예수가 체포되어 처형되었을 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도망갔다는 것은 완벽한 사실이며 충분히 이해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금요일에 신앙을 완전히 상실했다가 일요일에 기적적으로 그 신앙을 회복했다고 상상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나는 초대 기독교인들을 깊이 존경한다.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해졌을 때, 그들은 신앙을 잃기는커녕 오히려 생생하게 지켰고 더욱 심화시켰다.

6) 빈 무덤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가 과거에 그들이 사는 동네에서 걸어다녔듯이, 지금도 세상에 현존하여 활동하고 있는 하느님의 지혜로 경험한다.

갈릴리의 가정들과 촌락 등지에서 무상의 치유와 개방된 밥상을 나누도록 예수에 의해 파견된 선교사들은 예수가 죽던 그 날에 정말로 그들의 모든 신앙을 일시에 잃었을까? 아니다.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그들은 지금도 예수에 의해 능력을 부여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며, 이것은 바로 예수가 아직도 그들과 함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이처럼 선교사들에게 능력을 불어넣으며 힘있게 현존하고 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했다. 그 길이 바로 부활절 이야기다.

7)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그의 추종자들로 하여금 몇 가지 매우 힘든 문제들과 씨름하게 만들었다.
 
예수 같은 분이 어떻게 십자가에 처형될 수 있었을까?

그 분이 어떻게 제국주의 권력에 의해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을 수 있으며, 그러한 그가 어떻게 아직도 우리의 경험이 증거하는 그러한 분, 즉 하느님의 지혜와 능력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물음과 관련하여 두 상이한 기독교 공동체를 그려볼 수 있다.

갈릴리의 유랑하는 선교사들은 발바닥에 불이 나고 발이 쑤시고 아프도록 이 집 저 집 걸어다니면서 예수의 활동을 계속 잇는 방식으로 이 일을 수행했다.

한편 예루살렘의 보다 학구적인 사람들은 그러한 사건들을 이해하려고 그들의 성서 본문을 뒤졌다. 그들의 신앙을 상실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이 아직도 살아있는지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누가복음 24장의 엠마오 도상의 제자 이야기는 그 좋은 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비디오 카메라로 잡을 수 있었을 단 하루의 사건으로 생각하지 말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을 전체적으로 재고하는 고뇌 과정에 대한 회화적 요약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문자적 보도라는 의미에서 역사적이지 않지만,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발생했던 긴 시간의 과정을 묘사한다는 의미에서는 확실히 역사적이다. 즉 이들은 살아 있는 예수가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서를 이해할 수 있게 했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전통 속에서 그들이 찾고 있던 암시, 즉 예수는 그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목적을 수행하는 대행자였다는 암시를 발견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시작했던 개방된 공동식사를 위해 계속 모임으로써, 그가 그들과 함께 계심을 경험했다. 엠마오 이야기는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이다. 이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심화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상징적 묘사다.

8) 부활한 예수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는 이야기들에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가 누구에게 나타났느냐?”라는 것이다. 즉 이 이야기들은 예수가 더 이상 육체적으로 현존하지 않는 지금, 누가 그 일을 책임질 것인가 하는 정치적 목적에서 극화되었다.

요한복음 20장에서 결국 사랑받는 제자는 베드로에게서 첫 번째 자리를 빼앗는다. 사랑 받는 제자에게 종속되는 또 다른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 받는 제자는 “의심하는 도마”로 낙인이 찍힌 도마보다 높여진다.
 
이런 이야기들은 기독교 신앙의 역사적 기원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것들을 제공하지 않지만, 기독교의 권위의 기원에 관해서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즉 이 이야기들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누가 우위에 있고 누가 더 힘이 있었는가 하는 경쟁적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신약성서 외부에는 베드로 복음서, 마리아 복음서, 도마 복음서도 있다. 예수의 나타남에 관한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아마도 한 세대나 두 세대 동안 존속했던 어떤 공동체를 전제한다. 이것들은 초대 교회에서 힘과 권위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들은 전혀 때묻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 만약 여러분이 이 이야기들을 조심스럽게 읽으면, 예수의 평등주의 공동체로부터 집단지도체제(12제자), 혹은 특수한 개인들(예를 들면, 베드로나 사랑 받는 제자)에게로 권위가 넘어가는 조짐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교회는 남성 중심의 교권체제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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