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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들바람

1. 몸의 부활을 믿어야 할 것인가?


지금은 보편화되었지만 불과 20~30년 전까지도 기독교인은 화장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셨듯이 우리들도 언젠가 무덤을 열고 부활할 때가 올 텐데 재료가 남아있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매장보다 화장을 선호하는 교우님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몸의 부활을 믿는 신앙관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재료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전능하시므로 화장을 해도 우리 몸을 다시 살아나게 하실 수 있으며, 그때 살아나는 것은 썩어질 육신이 아니라 신령한 몸”이라고 믿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몸의 부활에 대한 이런 믿음은 성서의 기록에 의해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네 복음서 기자들은 모두 예수께서 무덤을 열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기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보다 거의 20년이나 앞서 기록을 남긴 사도 바울의 서신에는 예수님 뿐 아니라 신자들의 몸의 부활을 지지하는 글이 여러 곳에 나타납니다.

부활장이라는 별명을 가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사도 바울은 신자들의 몸의 부활에 대해 상세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인데, 썩어질 몸(physical body)으로 심고 신령한 몸(spiritual body)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의 핵심입니다.


하여 성서의 기록이 문자적으로 옳다면 ‘몸의 부활’은 이론의 여지가 없이 진리가 됩니다. 예수님은 변화된 몸이기는 하지만 이전과 똑같은 인격체로 다시 살아나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났다고 복음서 기자들과 사도 바울이 한결같이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 질서를 거스르고 역행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이유로도 한번 죽은 사람이 동일한 인격체로 다시 살아난다는 건 자연 상태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몸의 부활을 믿으려면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을 설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초자연적인 힘의 개입,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기적이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존재의 개입에 의해 발생한다면 기적을 일으키는 주체는 그 결과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성서에는 예수 부활 뿐 아니라 수많은 기적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런 놀라운 기적 사건을 기록한 동시대의 문헌이나 고고학적 자료가 성서 이외에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우리 기독교는 전통적으로 그 기적을 은유나 설화가 아닌 실제 사건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성서의 기록과 교리의 강력한 뒷받침을 받아,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불가능이 없다.”고 믿어왔기 때문입니다.


출애굽(이집트 탈출) 설화에는 수많은 기적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해를 멈추게 하셨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무사히 건너게 하셨는가 하면, 갈라졌던 물이 다시 합쳐지게 하여 뒤따라온 이집트 병사들을 몰살시키기도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허락하지 않는 파라오의 강퍅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아무 잘못도 없는 이집트 백성들의 맏아들 뿐 아니라 짐승들의 처음 난 새끼들까지 모두 죽였다는 기록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분이 자신이 만든 자연법칙을 스스로 깨뜨려가면서 그토록 무서운 형벌을 이집트의 죄 없는 일반 백성들에까지 내리신 것일까요?


기적 행위의 주체자인 하나님의 무자비한 형벌과 선택받지 못한 백성이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이방민족의 고통과 파멸, 그 잔혹한 기록으로 인해 오늘날까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기독교인들이 겪어야 했던 곤혹스러움과 두려움, 마음의 갈등, 제기되는 의문들을 기독교 전통 신학은 ‘인류의 조상이 지은 원죄 때문’이라는 설정으로 모두 묻어버렸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네 권의 복음서는 모두 예수님의 기적적인 부활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기적 이야기는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 오랜 전승 과정을 거쳐 기록된 설화이며, 부활에 대한 기록 역시 현장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 아니라 예수께서 죽으신 후 40년 이상 지나서 기록된 ‘전승설화’입니다.


이제 그 기록들을 대하는 우리는,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그것을 사실이 아닌 설화로 받아들일 것인지, 우리의 이성이 제기하는 의문을 계속 억누르며, 세상과 자연의 법칙과는 따로 움직이는 성서의 문자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라 살 것인지 정직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이 만드신 자연법칙을 스스로 거스르는 일을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열린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성서에 나오는 대부분의 기적 이야기에 대해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은유나 설화’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웬일인지 예수님의 부활 전승에 대해서만은 설화라고 말하는 분이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몸이 부활하셨다는 성서의 중심사상을 부정하면 기독교가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일까요? 아니면, 기독교라는 조직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조직의 근간을 거스를 수 없는 한계 때문일까요? 아니면, 다른 기적설화들은 실제 사건일 수 없지만 예수님의 몸의 부활만은 예외라고 진실로 믿고 있는 것일까요?



2. ‘지금 이 자리에서’ 보지 말고 ‘그때 그 자리에서’ 보기


예수님이 무덤을 열고 부활하셨고, 우리도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늙지도 병들지도 않고 끝없이 호강을 누리며 살 것이라고 믿었던 초대교회 신자들의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 교우님들과 함께 가상의 타임머쉰을 타고 이천 년 전의 세계로 거슬러 올라가 보고 싶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이 최소한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겪어왔고 그때 당시에도 조금만 깊이 관찰하고 생각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밤하늘을 하얗게 수놓은 수많은 별들, 그 가운데로 유유히 항해하는 아름답고 우아한 달, 새벽이 되면 찬란한 빛을 내뿜고 떠오르는 태양, 그것은 너무나 장엄하고 아름다운 ‘하늘나라의 존재’를 뚜렷이 보여주는 증표였습니다. 누구나 눈만 뜨면 확인할 수 있는 그 사실을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땅 위 저 높은 곳에 아름다운 천국이 존재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을 최상위 존재인 하나님을 수호하는 천사로, 또는 착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는 신적 존재나 천사로 이해한 것도 당시로서는 너무나 당연했습니다.


그와 아울러, 모든 사람이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지구마을 여기저기서 발생하는 화산 폭발과 용암의 분출, 지진의 발생 등을 목격한 사람들은 솟구치는 그 불덩어리와 갈라지는 땅을 보며, 땅 속 깊은 곳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며, 거기에는 꺼지지 않는 불로 사람들을 심판하는 신적 존재가 살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천체의 운행, 땅 속 용암의 존재, 지각의 움직임 등을 알 수 없었던 시대에 사람들이 세계를 관찰하고 사유한 결과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너무나 정직하고 당연한 결론이었습니다. 또한 그런 우주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천상의 세계를 동경하고, 땅 속 세계를 두려워한 것 또한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념은 이렇게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지구마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 현상입니다. 문제는 세상과 우주에 대한 이런 원시(무지하다는 뜻이 아니라 시대적으로 앞선다는 뜻입니다) 이해가 과학에 의해 투명하게 밝혀진 지금 시대에도 일부 사람들에게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과학보다 교리가 옳다는 교회의 오랜 가르침으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역사의 어느 시점에 사람의 몸이 다시 살아난다거나, 다시 오신 예수님이 모든 민족을 불러 모으고 예수님 좌우에 두 편으로 나누어 한 쪽은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게 하고, 다른 쪽은 지옥에 처해져서 죽지도 못하고 영원히 벌을 받게 한다는 신약성서의 기록은, 문자 그대로 사실이 아니라 당시 세계의 우주관을 토대로 우리에게 주신 은유적 교훈입니다.


이 비유에서 “어린 아이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금쪽같은 말씀이지만,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주셨고 성서에도 기록되어 있으니 그대로 사실로 믿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면 그 신념은 여러 가지 해로운 결과를 낳게 됩니다.


성서가 묘사하는 신자들의 몸의 부활, 그들에게 약속된 공간적 천국, 그 가르침을 거부하는 자에게 형벌로 주어지는 지옥의 존재, 그것은 이삼천 년 전 사람들의 원시 세계관을 바탕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때는 그렇게 이해하고 믿을 수 있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고 믿으면 우리의 이성과 판단력은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교우님들이 그 교리적 신념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그 신념이 현대과학에 의해 밝혀진 사실들과 정면으로 충돌할 뿐 아니라, 우리 교우님들의 삶도 왜곡시키고, 이웃들과의 소통도 불가능하게 하여 여러 가지 갈등을 양산하기 때문입니다.


3. 부활한 것은 예수님의 몸이 아니라 그분의 삶과 정신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여전히 제 신앙의 중심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온 교리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 십자가와 부활의 전승 안에 담긴 소중한 의미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부활신앙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님이 그토록 품고자 하셨던 소외된 민중과 제자들의 가슴 속에 다시 살아난 그 분의 삶과 정신이지 몸의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삶의 의미를 되찾은 민중과 제자들 가운데는 주님의 부활을 저와 같은 관점에서 이해하고 고백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으로 저는 추측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죽음 이후에도 “그는 여전히 살아계신다.”고 전한 것은 이렇게 자신의 가슴과 삶 가운데 살아계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증언은 20여년이 지난 후 바울의 서신에, 그리고 40년이 지나서는 복음서에 ‘몸의 부활’로 기록되었습니다.


4. 예수님은 여전히 저에게 특별하고 유일합니다.


어쩌면 그 동안 저를 이해하고 지지해주신 교우님들 중에 크게 실망하신 분도 계실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기독교인으로 남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사실 저에게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기보다는 예수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지금도 저는 누군가 “당신 기독교인이냐?”라고 물으면 얼른 대답을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다.”라는 전제 아래 묻는 것이라면 저의 대답은 “그렇습니다.”이지만, “기독교인은 반드시 정통 교리에 동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묻는 분들에게는 “아니오.”라고 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에는 하나님을 신랑으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신부로 비유하는 글이 종종 등장합니다. 신약성서에도 교회와 신자를 신랑 예수님과 결혼한 신부로 비유하는 글이 발견됩니다. 교리를 통해 이 비유를 읽으면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교회와 신자를 지배하는 가부장적 권위자가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비유를 교리가 아니라 관계성으로 읽습니다.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저와 함께 동행하시며, 저와 함께 먹고 마시는 제 인생의 동반자이십니다. 성서가 제시하는 비유의 틀에 의하면, 저는 제 인생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결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저의 신랑이며 저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저에게 특별하고 유일합니다. 예수님은 제 삶의 가장 힘든 순간에 찾아오셔서 제 손을 잡아주셨으며 저의 눈물을 닦아주셨고, 저는 그분의 초청을 받아들여 그분과 결혼하였습니다. 지금 그분은 제 안에, 저는 그분 안에 있어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5. 예수정신과 예수운동 이어가기

십자가 사건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났다면,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을 치유하고 그들에게 새롭게 살 소망을 주신 그분의 정신과 운동도 중단된 채, 예수사건은 하나의 역사적 이벤트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분이 현실세계에서 이루고자 그토록 애썼던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나라도 한낱 꿈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삶과 가르침이 너무나 소중했기에, 그분이 기득권 세력에 체포되어 가혹하게 처형된 이후에도 예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정신과 삶에 여전히 현존해 계신 ‘살아 계신 주님’을 증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삶의 무게에 눌려 힘겹게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 ‘미래의 저 천국’을 그리는 소박한 신앙은 그나마 현실의 부조리와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가게 하는 위로와 소망의 에너지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하여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예수님 잘 믿어서, 죽은 후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다시는 병들거나 늙지도 않고 죽음도 고통도 없는 그곳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고 싶다는 소박한 믿음 자체를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교리적 부활론은 그 교리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온갖 특혜(?)로 마음의 위로를 주지만, 결과적으로 기독교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의 형벌을 선포함으로써 이웃종교와 문화를 부정하고 기독교 교리에 순복하기를 내용으로 강요한다는 점에서 매우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며 반사회적인 교리입니다.


또한 교리적 부활론은 우리 삶을 왜곡하고 예수정신을 거스르며 비현실적인 도피신앙으로 유도하기에, 한국 교회가 반드시 넘어서야 할 숙제 중 하나입니다. 하여 이제는 우리 교우님들도 몸의 부활을 믿는 교리 신앙에서 벗어나 예수정신과 예수운동을 이어가는 진정한 예수사람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가슴과 삶 속에 살아계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전 세계 그리스도교 자매 형제님들과 함께 기뻐하며 찬미합니다. 교우님들에게도, 우리 주님의 부활의 은총과 인도하심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여,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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