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과 중용(中庸)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을 친다~~ ”
그 약간 코믹스럽게 생긴 신신애 라는 여가수가 몸을 비틀비틀 꼬면서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을, 근 10년간 해외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처음 보고서는 배꼽을 잡은 적이 있다. 춤 이름도 ‘이판사판’ 춤이라고 하였다. 알고 보니 IMF 직전인 1990년대 중반 당시 한국사회의 부패와 부조리 현상을 노래가사와 춤으로 조롱하는 풍자였다.
세상에는 참(眞)이 있고 참이 아닌 가짜(假)가 있다. 가짜를 우리는 사이비(似而非)라고 부른다. 글자 뜻대로 보면 ‘비슷하지만 아닌’ 것이 사이비이다. 사람도 참된 사람이 있고 사이비(이 경우에는 ‘사쿠라’라는 일본어로 많이 쓰인다) 인간이 있고, 골동품, 고서, 고화, 유명한 작가가 그린 현대화는 물론이려니와, 명품의상, 명품핸드백, 명품 귀금속 등등........, 소위 값비싼 명품이라는 라텔이 붙는 제품에는 의례히 사이비가 따라 붙는 현상이 동서고금을 통하여 항상 있어왔다.
2천여 년 전의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이미 당시의 가짜 골동품에 대하여 언급한 적이 있고, 중국에서도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귀중한 보석인 ‘화씨벽’(和氏璧)의 진품을 둘러싼 진위(眞僞)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었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짜나 위조품에 대한 열망은 희소가치가 있는 ‘명품’이 있는 곳에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따라다녔다는 말이 된다.
요한복음과 중용을 두고 말하고자 하면서 왜 가짜이야기를 하는가? 바로 고서(古書)에 대한 진위를 말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하필 왜 신약성경의 중요한 복음서의 하나인 <요한복음>과 유가 경전모음집인 13경(十三經) 중 철학적으로 백미(白眉)에 해당하는 <중용>인가? 거기에는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 생전의 행적을 기록한 공관복음서 중 요한복음과, 유가사상 중 철학적으로 가장 깊이가 있는 중용, 이 두 가지 서물(書物)의 기록에 의심이 가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공관복음서 중에서 특히 요한복음을 중시하고 나도 이 점에서 마찬가지이지만, 그러나 솔직한 느낌으로 말하여 4대 공관복음 중 가장 ‘가짜’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 또한 요한복음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말을 하기에는 사실 매우 조심스럽지만, 옛 경전이나 오래된 고서(古書)만 보면 일단 그것에 대한 진위여부를 의심하고, 함축하는 의미와 글자 자구를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이 나에게는 이제 버릇처럼 되어 버린 까닭이 있다.
우선 중용은 어떤 책인가? 원래는 한 대(漢代)에 집성된 예기(禮記)라는 서물의 한 편(篇)으로 들어 있던 것을, 1천년이 지난 후 남송(南宋)때의 대학자 주희(朱熹)가 대학(大學)과 함께 독립된 책으로 분류하여 경전의 위치에 격상시켜, 논어 ·맹자· 중용· 대학으로 소위 말하는 사서(四書)로 분류한 것이다.
그러니까 공자 사후 약 5백년이 지난 후, 즉 예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서 활동하신 AD1세기 초 무렵에 해당하는 당시의 중국 한대 경학자(經學者)들이 편집한 것을, 다시 1천년이 지난 후에 주희에 의해 독립한 책으로 분류된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경'(經, Canon) 내지 '경전'(經典)으로 분류된 책들은 그 배경에 모두 당시의 정치권력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기에 ‘경전화’(Canonize)를 위한 편찬사업은 정치권력의 비호(庇護)하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이점에서 성경도 또한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고 12사도들도 모두 돌아가신 후, 또 약 3백 년이 흐른 시기에, 당시 예수님의 일생을 기록한 서물과 사도들의 편지 비슷한 서간들이 세상에 많이 돌아다녔다고 한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 라고 생각한 알렉산드리아 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에 의해 신약성경의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대 공관복음을 비롯한 정경(正經)으로 신약 27편이 성립한 것이다.
불경(佛經)도 이 점에서 볼 때 또한 결코 예외가 아니다. 석가모니가 입적한 후 약 1백년이 지나자, 세상에 널리 퍼진 설법 중 어느 것이 석가모니의 진짜 설법인지 아닌지를 두고 세인들 간에 워낙 중구난방이라, 권력(아소카 왕)에 의해 불전결집이라는 경전 편찬사업을 시작한 후로, 약 5백년간 4차례나 경전화를 위한 편찬과정을 거친 후에 성립한 것이 오늘날 불경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보면 동서고금의 경전 편찬사업은 곧 ‘시시비비에 대하여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조치의 일환으로, 그 당시의 정치권력이 아니고서는 그런 결정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비근한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면,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친일파 청산작업’이나 ‘역사 바로 세우기’ 라든가, 내 눈으로 본 현대사의 사건들을 두고 30년도 안되어 기록을 하는데 ‘이다, 아니다, 옳다, 그르다.’하는 시비를 보고 느낀 점은, 과연 수 백 년이 지난 후의 일을 기록하는데서 ‘역사적으로 판단하여 중요성을 지니는(historically significant) 사실(true fact)’에 대한 기록에서는 사가(historian)들의 주관적 판단이 개재할 가능성은 매우 높기 때문이고 여기에는 기록당시의 정치권력이 개재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 때문이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통하여 경전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게 된 고전이라면, 그 자체로 이미 그것을 믿고 신봉하는 이들에게는 신성화되기에 족하다. 진위여부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한 요한복음은 나에게는 말 그대로 ‘신성한’ 복음인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요한복음을 거론하는지 의아해 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한 가지만 들어본다면, 누구나 잘 아는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기적이 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에는 보이지 않고 요한복음서에만 보인다. 그처럼 중대한 ‘사건’은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다른 복음서에도 보여야 마땅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복음서 기록의 첫 시작도 요한복음은 다른 점이 있다. 성서고고학자가 아니어서 더 이상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기록시기로 보아 요한복음이 가장 나중(AD10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하고, 문체도 가장 유려하다는 점으로 보아서 그렇게 생각해 볼 뿐이다. 혼인잔치에서 보인 예수님의 기적을 믿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전지전능한 주님의 능력으로는 하시고자한다면 불가능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중국의 유가경전 중에서도 나는 중용을 가장 좋아한다. 문장길이는 짧지만 내용은 아주 교훈적이고 철학적이다. 그러나 주자가 중용의 서문에서 말한 ‘중용의 글은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가 공자의 가르침이 전해지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핵심을 글로 적어 후세에 남긴 것이다.’는 이 코멘트를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주자 당시(남송시대)에 인도에서 들어온 외래사상인 불교는 이미 중국의 사상계를 뒤덮은 상황이었고, 이에 대항하여 중국문명의 르네상스를 꿈꾸던 주희가 학문적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지어낸 말일 것이라고 나는 본다.
그 정통성을 중국학자들은 왕조권력의 정통(政統)과 독립하여 전해지는 도통(道統)이라 불렀고, 도통은 정통보다 높고 고귀하다고 믿었다. 조선의 학자들은 주희가 죽고 나서 그 도통이 조선으로 건너왔다는 자부심에서 살다가 나라가 망했다.
병자호란 이후로 우리가 ‘호로(胡虜)’ 라고 욕하던 청나라 만주족이 임진왜란 당시 구국의 은인인 명나라를 멸망한 후 중국을 석권하자, 중국의 대중화(大中華)를 대신하여 조선이 ‘소중화(小中華)’의 도통을 유지하고 있다고 자부한, 조선학자들의 착각인 것이다.
중국은 중국이고 조선은 조선일 뿐일 것을 말이다. 글을 쓰다가 보니 가볍게 시작하여 점점 무겁게 흘러 미안하게 되었지만, 짜가를 오래 믿으면 망한다는 역사적 교훈이 될 성 싶기 때문이다. 그것도 일반인이 아닌 지도층이 그랬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다시 중용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희로애락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태를 중(中) 이라고 하고, 희로애락이 생겨나 세세절절 상황에 들어맞은 상태를 화(和)라 한다.(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중이란 하늘아래 큰 근본이요, 화는 하늘아래 으뜸 길이로다.(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그러므로 중화에 이르게 되면 하늘과 땅이 제자리를 찾게 되고 만물이 자라나게 된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희로애락), 우리 인생살이는 이 4가지 큰 감정의 카테고리 안에 다 포함되어 있다. 이 구절은 감정을 장소와 때에 따라 알맞게 표출하여 세상이 조화롭게 될 것을 강조한 말이다. 나는 인간감정과 천지만물의 관계를 이처럼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기쁠 때는 당연히 기뻐하고, 노여울 때는 참지 말고 노여움을 표하라는 말이다. 참는다고 무조건 사회가 조화롭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 목적은 사회의 조화인 것이다. 이처럼 훌륭한 말을 아무리 찾아봐도 논어 맹자에는 없다. 하늘과 땅과 인간 세상을 하나로 아우르는 사회심리학적이고 우주론적인 철학이 없다.
중용이란 서물을 누가 지었는지 진위를 떠나, 공자의 가르침이 5백년이 흘러 한 대에 들어와서 통치자들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되면서 처음의 순수한 것에서 많이 짜깁기가 되어 버렸다. 다만 그 내용이 내가 본받고 따를만한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로써 볼 때 요한복음의 말씀과 중용의 가르침은 나에게는 최고의 지침으로 내가 믿음으로써 나의 인생의 등불이 되기에 족하다. 나에게 있어서 중용은 고전학문 영역이고, 요한복음은 신앙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이성을 마비시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사람에 따라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아니 될 수도 있다. ‘이성적 종교’일 것인가 ‘종교적 이성’일 것인가? 나는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앙드레 미고(Andre Migot)는 <부처(Le Bouddha)>에서 다음같이 말하였다. “신앙은 이성과 멀어질 때 미신이 되며, 이성에 대립할 때는 더욱더 그렇다. 그러나 신앙이 이성과 결합되어 있을 때는 이성이 단순한 지적유희로 떨어지는 것을 막는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성이 마비되는 것을 경계한 말이라고 본다. 주위에는 ‘대롱을 통하여 하늘을 보는(以管窺天)’듯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없지 않은 듯하며 사람들은 이들을 사이비 종교인이라고 부른다.
세상에 사이비나 ‘짜가’가 완전히 없을 수는 없지만, 이들이 판치는 세상은 온전한 세상이 결코 아니다. 진정한 그리스도 종교인이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말하고 진리에 따라 살아가고, 신도들을 그 길로 이끌어 가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그 진리 속에서 살 때 우리는 자유롭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이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 34-39)
박 인 수
(2011. 1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