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3)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선교해야 합니다.
1. 역대상 16:8 :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해야 합니다. Proclaim His greatness.
다윗 때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의 이름이란 지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성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이란 그 사람의 인격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 만큼 소중하고 각별하였다고 본다. 그러니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너무 어렵게 생각한 나머지 기록할 때 “주”'(Lord)로 기록하므로 점점 그 발음을 잊어버리게 까지 되었던 것이 아닌가?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은 두렵고도 거룩한 이름이었다.
사실 높으신 분의 이름은 부르기조차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찬양할 때 얼마나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가?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아버지의 이름은 거의 부를 일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더더욱 그랬고 그래서 잘 몰랐던 것이 사실이다. 또 교장 선생님의 이름도 그렇고, 아무튼 어른들의 이름은 그렇게 어려웠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이름에 대해 십계명에서도 망령되이 일컫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 그런데 오직 찬양할 때만큼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우리가 찬양할 때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에는 감사와 감격이 있다.
때로는 기도할 때나 찬양할 때 주님을 부르는 것 만으로도 목이 메일 때가 있다. 그것은 그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과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감격으로 밀려오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불러놓고 흐르는 침묵 속에는 그 시간에 할 수 있는 말보다도 더 많은 말과 마음을 전할 수 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위력이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진실되이 부르는 순간 우리는 많은 찬양을 쏟아낼 수 있다. 만일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감격이 없다면 그 다음의 찬양의 내용도 감격이 없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똑같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더라도 그 단어는 우리에게 다 똑같지 않다. 그것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각자가 다 다르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대 속일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내가 주님의 은혜를 얼마나 깨닫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걸 임의로 우리가 어떻게 조장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평소에 주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이제 한번 눈을 감고 주님을 불러보자. 주님이 내게 얼마나 가까이 다가오시는가?
2. 역대상 16:8 :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온 세상에 알게 하라.
Let the whole world know what He has done. 찬양의 또 다른 면은 선포이며, 선교이다. 주님의 행하신 일, 그 아들을 내어주신 일, 십자가를 지신 일은 마땅히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
수채화아티스트/기도에세이스트/칼럼니스트 제임스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