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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자와 유키치(福澤兪吉, 1835-1901)를 논한다.

한·일 양국의 근대국가 모델 비교--김옥균과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과 실천

(오클랜드한인회 제3회 한국전통 역사문화강좌 요약문)



근대 일본 문명개화의 아버지로 불리며 일본인들의 추앙을 받는 후쿠자와 유키치 라는 인물이 있다. 현재 일본화폐의 최고액권인 만 엔(丹)권에는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 나라 화폐의 최고액 권에는 그 나라 국민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이 그를 얼마나 추앙하는지는 이 사실로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그는 명치유신 직후에 정부의 각료로 입각하라는 여러 사람들의 권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3차례에 걸친 서구와 미국 유람에서 돌아온 후 오직 일본의 문명개화에만 전념한 전형적인 선각자라 할 수 있다. 그는 게이오대학(慶應大學)의 전신인 경응의숙(慶應義塾)을 설립하여 명치유신으로 서구화한 일본정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하는데 일생을 전념하였다.


첫 번째 외유에서 돌아온 후 그는 <서양사정>(西洋事情, 1866)이란 책을 출간하여 앞선 서구의 제도와 문물을 소개하여 국가제도의 쇄신을 주장하였는데, 당시 일본인구 4천만 명에 이 책은 250만부가 팔렸다. 두 번째 외유에서 돌아온 후 그는 일본 국민 개개인의 계몽사상 고취와 서구합리주의 사상교육을 위한 <학문을 권장함>(學問の進め, 1872)이라는 책을 써서 340만부가 팔렸다. 바로 일본의 근대화와 일본인들의 전통적 사고를 서구적 방식으로 전환시킨 인물이었다.


명치유신 초창기에 그는 ‘란가쿠’(蘭學)라고 하는 네덜란드의 실용적인 학문, 즉 군함과 대포 등 서구식 기술을 받아들이는 분야의 인재를 배출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네덜란드로 유학을 보내는데 힘썼다. 일본도 19세기 말인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말기까지는 조선과 마찬가지로 쇄국정책을 폈다.


다만 쇄국정책을 펴면서도 나가사끼(長崎) 항구를 예외적으로 남겨 서구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러므로 유럽의 해양국인 네덜란드 상인과 뱃사람들은 대서양을 항해한 후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서 인도양과 말래카해협을 지나고, 서태평양의 타이완과 일본 그리고 한국에까지 도달하였다. 그들은 한국에서는 배척받았으나 일본에서는 환영을 받았으며 타이완에 상륙하여서 성곽과 포대도 건설하고 잠시 지배한 적도 있었다.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서구인들과 잦은 왕래를 통해 앞선 서구의 과학기술 문명의 우수성과 함포의 위력을 알게 된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를 수용하여 받아들일 인재양성에 전념하여 일본의 서구화에 크게 이바지 한 바 있다.


그가 일본을 서구화하면서 이웃한 조선도 동참시켜 서구화를 통한 근대국가를 이룩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시도하였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참으로 고마운 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우매한 조선국민들의 눈을 깨치는데 있어서 신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일본에서 그가 ‘지지신보’(時事新報, 1882)를 발간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근대적 신문을 발간하고자 하였다.


그의 제자 중에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 라는 이가 있었다. 명치시대 초기 이노우에라는 성(姓)을 가진 이 중,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라는 정치적 거물도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조선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조선에 파견하여, 한국최초의 근대적 신문으로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운 바 있는 국한문 혼용체로 쓰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케 한 것이다. 몇 년 후에 일본이 을미사변(1895)을 일으켜 일본인 폭도들이 궁중으로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할 당시의 낭인들은 한성순보 직원을 가장한 부랑자 약 50명 이었다.


조선을 근대화시키려는 방안을 생각하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조선의 인재로서 처음으로 만난 이는 동래(東萊) 범어사(梵魚寺)의 승려출신으로 속명을 이동인(李東仁)이라고 쓰는 이였다. 이동인은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으로 말미암은 스님의 제한적인 신분에도 불구하고 수 차 일본으로 밀항하여 아사쿠사(淺草) 별원에서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 조선개화에 관한 얘기를 몇 차례 나눴다. 이동인은 귀국하여 국왕고종도 알현하고, 한일 간의 교류를 위한 조언도 한 인물이지만 그의 급작스런 사망은 의문에 싸인 채로 남아있다.


승려들 사이에는 한국과 일본 간에는 과거부터 왕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에 왜놈 첩자가 스님으로 가장하여 조선으로 숨어들어 국정을 탐지한 사실이 있었음을 볼 때 한일양국의 스님 간에는 왕래가 잦았던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 명치유신을 근대국가의 모델로 삼아, 부패하고 무능한 조정을 혁파하고 조선을 단시일 내에 근대국가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젊은 지사들이 모였는데 이들을 개화파라고 부른다. 개화파 인물 중에는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 등과 같은 인사들이 있었다.


개화승(開化僧) 이동인은 후쿠자와 유키치에게 김옥균을 소개해 주었다. 김옥균은 이동인처럼 밀항하지 않고 조선의 일등 사대부답게 국왕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가서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났다.


명인은 재사를 알아보는 법, 후쿠자와 유키치는 김옥균을 만나자 그에게 호감을 보이고 조선의 근대화에 필요한 도움을 주겠노라고 약속하였다. 1882년의 일이었다. 그 다음 해 김옥균은 재차 도일하여 후쿠자와 유키치를 만나 조선의 국가개조를 위한 급진개혁(갑신정변)을 위해 필요한 자금을 빌리려고 하였다.


김옥균이 차관형식으로 빌리고자 한 금액은 당시 일본 돈으로 2백만 엔(丹)이었다. 갑신정변의 거사자금에 충당하고자 한 돈이었다. 그러나 조선국내에서 개화파를 질투하고 그들의 친일적 행각을 반대하던 조정 내의 집권파인 친 중국 사대파 정적들이 그들을 가만 두고 보지 않았다. 그들은 고종국왕이 김옥균에게 써 준 국서는 가짜이니까 일본 정부는 그의 차관교섭에 응하지 말 것을 일본공사에게 귀뜸하였고 일본공사는 본국정부에 보고하였다.


그것도 모르고 일본에 도착한 김옥균은 고종임금의 국서를 내보이며 일본 정부 요로에 차관제공을 요청하였으나 그들이 응할 리가 없었다. 차관교섭에 실패한 김옥균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개인적 명망에 힘입어 그의 주선으로 요코하마(橫濱) 정금은행(正金銀行)에서 겨우 5십만 엔의 차관을 얻어서 귀국하였다. 혁명정부의 개혁정책을 이끌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귀국한 김옥균은 내외적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된 가운데, 거사를 성사시켜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마음이 조급해진 가운데 궁정쿠데타인 갑신정변(1884)을 일으켜 일단 성공적으로 성사시켰고 국왕 고종의 윤음을 얻어 정치개혁을 일사천리로 단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서울에 주둔하던 청나라 병사 1천5백 명이 거사 3일 만에 궁궐을 포위하고 총격을 가한 후, 국왕고종을 생포하여 모시고(?) 가버리는 바람에 거사는 ‘3일천하’로 실패하고 말았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같은 이들은 철수하는 일본 공사관 직원의 도움으로 간신히 일본으로 망명가거나, 영의정 홍순목의 자제 신분으로 거사를 주동했던 홍영식 같은 이는 국왕고종이 보는 면전에서 청국병사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갑신정변의 주동자들이 믿는 힘이라고는 일본영사관 호위병 2백 명과, 총신이 녹 쓸어 쓸모없고 총알도 없는 조선인 궁궐수비대 5백 명이 고작이었다.


겨우 일본으로 망명한 주동자들은 일본에서 미운오리새끼 신세로 전락하였고 이내 모두 타국이나 각지로 쓸쓸하게 흩어진다. 김옥균은 일본 내 오지와 외딴 섬으로 유배와 진배없는 푸대접을 당하다가 십년 후 중국 상하이로 유인되어 암살당하고 시체는 서울로 돌아와 양화진에서 대역부도 죄인으로 길거리에 내걸렸다.


서재필은 굶어서 거리에 쓰러진 채 죽을 번하다가 미국인 선교사에게 발각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인 최초의 미국의학박사가 되고 미국인 부인을 얻었고 두 번 귀국한다. 첫 번 귀국해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설립하다가 미움을 받아 재차 미국행 했고, 두 번째는 해방직후 미군정의 고문자격으로 귀국한 것이다.


그거야 어떻던, 조선의 친일적 개화파 인사들의 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본 후쿠자와 유키치는 종래의 태도를 180도로 바꾸어 조선을 경멸하고, 조선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문명개화가 불가능한 나라로 치부해 버린다. 그리고 일본국내에서 일기 시작한, 조선을 하루속히 무력으로 정벌하자는 정객과 사무라이들의 주장인 소위 ‘세이칸론’(征韓論)을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후 일본 정계는 타이완을 정복한 것처럼 “조선도 하루속히 무력정벌하자” “안 된다, 좀 더 내실을 기한 후 천천히 정벌하자” 라는 정한론 논쟁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러나 정한론자의 주장보다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같은 신중론자들의 주장이 힘을 얻어 일본의 내실을 먼저 기한 후 차근차근 준비하자는 주장이 득세하였고, 그 후의 과정은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바대로 일본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화 길이었다.


조선에서 실망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아시아에서는 오직 일본만이 문명개화를 이룩할 수 있는 나라라고 보았다. 그의 문명개화론은 일본이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일본은 ‘아시아에 속하는 나라이지만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0세기가 끝나고 21세기로 접어든 현재도 일부 일본인의 심리저변에는 ‘일본은 유러피안 문명국가의 일원이다.’ 라는 어쭙잖은 자부가 아직도 남아있는데, 그 원조가 후쿠자와 유키치 이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갑신정변의 실패에서 우리는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으면 좋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하나는, 절대로 타국의 도움에 의하여 국내개혁을 단행코자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타국의 도움으로 설령 소기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한다 하더라도 결국 남의 하수인이 될 것임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국가를 불문하고 자력의 기반이 없이 타에 의존하여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성공할 수 없다.


둘째는, 갑신정변 당시의 조선을 둘러싼 청일 양국의 이해관계나 국제적 상황이, 갑신정변으로부터 130년이 지난 오늘날과 비교하여 볼 때 크게 변한 것이 없다는 점이다. 그동안 우리의 국력도 크게 신장하였고 국제적 지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지금 한국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대치하고 있는 현재, 주변 강대국의 국제적 역학관계에서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갑신정변 당시보다 더 불리한 상황으로 처지가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력에 의한 내실을 기하는데 잠시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박 인 수

(2011.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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