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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2011.10.17 20:39

수(壽)와 요(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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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壽)와 요(夭)




일생일사(一生一死)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고, 죽음 앞에서 만인은 절대적으로 평등하다. 태어나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다.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존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우둔한 사람을 불문하고 죽음은 만인에게 공평하게 찾아온다.


살아있을 동안 인간의 모든 상대적 불평등은 죽음 앞에서는 절대적으로 평등하다. 사람은 태어나서 누구나 장수하기를 원하고, 타고난 생명을 다하는 날에는 누구나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하나뿐인 생명은 누구에게나 고귀한 것이고, 생명은 인간에게 있어서 이 세상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고의 가치를 가진다.


매번 연도(煉禱, 죽은 이의 영혼을 연옥에서 천상낙원으로 가도록 비는 카톨릭 기도) 소식을 접할 때 마다 우리는 망자의 나이를 먼저 묻는다. 망자가 천수(天壽)를 다한 고종명(告終命)일 때는 연도하러 가는 마음이 다소 홀가분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러 있다. 아직 팔팔한 젊은 나이에 죽거나, 한창 피어나는 나이에 불의의 사고나 예기치 못한 경우로 생명의 가치가 꽃처럼 피어나야 할 나이에 피어보지도 못하고 요절(夭折)한 경우는 연도하는 마음이 비통하기가 이루 비길 곳이 없다. 남의 자식이라도 그럴진대 내 자식을 잃는 부모의 심정은 어떠할까? 단장(斷腸)의 슬픔일 것이다.


새끼를 빼앗긴 어미 원숭이가 울면서 따라오다가 지쳐서 죽었는데, 속을 갈라보니 창자 마디가 모두 끊어져 있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물며 미물도 그럴진대 사람이야 어떻겠는가? ‘부모가 돌아가시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라는 우리 속담도 있고,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은 ‘흰머리가 검은 머리를 먼저 보내는 것(白髮送黑髮)’ 이라는 중국속담도 있다.


사람이 살면서 미래에 닥칠 죽음에 대한 준비는 어느 정도 세상을 살아온 사람은 누구나 생각하게 된다. 나이가 젊은 사람은 다가올 죽음에 대한 염두가 적은 반면, 나이가 많아질수록 죽음에 대한 염두도 많아지는 것은 생명과정의 필연적인 현상이다. 젊은 사람은 영과 육에서 육적인 삶의 가치가 앞서지만, 나이가 들수록 영적인 가치가 차지하는 부분이 많아져서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인생을 관조하며 예지하는 능력이 발달하기 때문이다.


천수와 요절의 차이는 인간전인 가치기준이고, 하느님이라는 절대적 존재자의 입장에서 보면 달라질 수가 있다. 이 세상의 인간적인 가치는 모두가 상대적이며 절대적이지 못하다. 절대자의 입장에서는 90나이나 20나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90년은 긴 시간처럼 느껴지고, 20년은 한 사람의 일생을 마감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특히 요절한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에서 보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허망함과 비통한 일일 것이다.


만일 삶과 죽음의 차이를 극복하여 초월한 지혜로운 철인이 있다면 그는 ‘삶과 죽음을 동일시(生死一如)’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보통사람들에게는 매우 힘든 일이다. 고대 중국의 철학자 장자(莊子)는 ‘삶이 죽음과 동시에 있고 죽음도 삶과 동시에 같이 한다.’(方生方死, 方死方生) 라는 말을 하였다.


죽음과 삶이 통시적(通時的)으로 함께 존재한다는 말이다. 방금 갓 태어난 생명은 바로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죽음으로 가는 것이니 죽음이 생명 안에 이미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본다. 반대로 죽음도 언젠가는 우주에 떠돌던 기가 응집하여 생명으로 다시 잉태할 가능성을 가진다.


장자에 따르면,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자연에서 온 기(氣)가 응축하여서 나의 몸을 빌려 생명기간 동안 육체를 형성했다가(氣聚者則生), 다시 나의 육체를 떠나 흩어져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氣散者則死)’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생과 사는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났다고 크게 기뻐할 것이 아니요, 죽었다고 그리 슬퍼할 일도 아니다. 그래서 장자는 아내가 죽자 분(盆)을 엎어놓고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 세상의 온갖 노고를 떠나 자연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아내의 기를 기뻐하면서 장송곡을 불렀다. 자연을 떠돌던 기는 때가 되어 뭉쳐지면 또 다른 생명으로 살아 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자는 생명기간의 장단(長短)을 기준으로 사람의 수와 요를 말하지 않았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요절한 갓난아기는 장수했으며, 700년을 산 팽조(彭祖)와 3000천년을 산 대춘(大椿)은 요절했다고 말했다. ‘삶 안에 죽음이 있고 동시에 죽음 안에 삶이 있다’고 본 까닭이다.


얼른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자세히 생각하면 맞는 말이고 깊은 이치가 있다. 성경에서는 말씀하신다. “인간의 수명은 기껏 백년이지만 영면의 시간은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 바다의 물 한 방울과 모래 한 알처럼 인간의 수명은 영원한 날수 안에서 불과 몇 해 일뿐이다.”(집회서18, 9-10)


우리들에게 귀거래사(歸去來辭)로 잘 알려진 도연명(陶淵明)이라는 중국의 시인은, 그의 잡시에서 ‘인생은 뿌리도 없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먼지인 것을(人生無根蒂 飄如陌上塵), 흩어져 바람결 따라 날리다가 나의 몸을 이루었도다(分散逐風轉 此已非常身), 땅에 떨어져 잠시 피붙이로 맺어진 것이니, 골육의 정이 깊다한들 어이할 수 있으랴(落地爲兄弟 何必骨肉情).’ 라고 읊었다. 성경에서도 “주님께서 사람을 흙에서 창조하시고 그를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그분께서는 정해진 날수와 시간을 그들에게 주시고 땅위에 있는 것들을 다스릴 권한을 그들에게 주셨다.”(집회서17, 1-3)라고 말씀하셨다.


눈앞의 속세에 매달려서 살면서 한치 앞을 가늠하기 힘든 우리들 가치기준으로 보면, 장자나 도연명의 생각은 우리와 거리가 멀다. 이 세상에서 골육의 정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이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무리 소중한 골육지정이라 해도,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님의 섭리에 따라 때가 되면 모두 흩어지기 마련인 것을 사람이 어찌할 것인가?


언제 헤어져도 필연적으로 헤어져야 할 운명인데, 다만 속세에서 혈육으로 만나 그 정을 나눈 기간이 너무 짧은 것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장자나 도연명이 그런 말을 하기 까지는 수많은 인생의 비통함과 슬픔을 겪고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불쌍하고 가엾은 넋을 달래기 위해 그런 말과 시를 지었다.


세상에 원통하지 않을 죽음이 어디에 있고, 보내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슬프지 않은 장례식이 어디에 있을까마는, 특히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심정은 비통함의 극치로 그보다 더 큰 슬픔은 없다. 그러나 언제까지 비통함에 젖어 살 수 만은 없고 가급적 빨리 그 슬픔에서 헤어나야 한다.


무슨 말과 글로써 마음에 위안이 될 것인가 마는, 이국 땅 뉴질랜드에서 자식을 먼저 보낸 모든 한국 부모님들께 이 글이 조금의 위안이라도 되기를 바라면서 기도한다.


주님, 그분들의 가정에 특별한 은총과 축복을 내려 주시고, 그 분들이 하루 빨리 슬픔의 늪에서 헤어나게 하시어 삶의 용기를 되찾게 해 주소서. 아멘!



박 인 수


(2011. 10. 16)


(원문, 오클랜드 한인 천주교 성가정성당 월보, 2010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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