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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2011.10.03 19:13

짱깨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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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깨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인생을 ‘무계획의 프로젝트’(Unplanned project)라고 말한다. 내가 태어날지 태어나지 않을지, 내가 왜 꼭 태어나야 하는지는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세상으로 인생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태어난 이후로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정해지고 자신의 의지가 지향하는 목적으로 나아가게 된다. 물론 초지일관하여 한 직장 또는 한 가지 직업으로 평생을 일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인생은 서너 번에서 많게는 여러 번 직업이나 직장의 곡절로 진로를 바꾸며 인생길을 걸어간다.


뉴질랜드로 이민을 온 교민들의 경우는 더욱 직업이나 직장의 변동이 심하다. 고국이 아닌 나라를 제2의 고국으로 삼아 정착하여 살자니 언어생활에서부터 힘든 일이 한 두 가지뿐만 아니고, 생계를 안정적으로 도모하는데도 많은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오클랜드에서 학생들에게 중국어와 중국의 역사문화를 가르치는 일을 주업으로 한다. 내가 중국어와 중국역사문화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리라고는 나는 물론이거니와 나를 아는 다른 사람들도 아무도 예전에 상상하지 못했다.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보면, 나는 20대 중반에 타이뻬이로 유학을 가서 30대 중반에 귀국하였으니, 인생의 준비기간 중 가장 중요한 10년 기간을 대만유학 생활로 보냈다. 그때는 중국이 한국과 상호 국교수교 되지 않은 적성국가라 학문적으로 중국에 관하여 공부하고픈 많은 유학생들이 대만으로 유학을 떠났고, 유학 대상국의 언어시험을 쳐서 합격한 사람에게만 여권이 주어지던 시절이었다.


대학에서 중국어 전공도 아닌 내가 어쨌든 유학시험을 치르고 턱걸이로 패스하고 떠났다. 이 길은 내가 확실히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스스로 선택한 의지의 길이었다. 가형이 운영하던 미군군납 사업이 마침 필리핀의 클라크 미 공군기지나 수빅 만의 해군기지에 사업장을 확장하여, 내가 그리로 가서 일을 맡으면 많은 돈을 벌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대만으로 공부하러 떠난다고 했으니 형님 눈에 동생이 예쁘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선택하여 결정한 길이라 열심히 유학생활을 하였고 소기의 목적한 바도 달성하였다. 여기까지는 나의 의지로 확신에 가득 찬 ‘계획한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그 다음 일은 나의 의지와 때로는 유관하게, 때로는 무관하게 흐르기 시작하였다. 대만에서 귀국한 1990년대 중반의 일인데, 국내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서울에서 연구소를 설립하고 열심히 중국을 드나들며 일하던 중 뉴질랜드로 오게 되었다. 대만에서 귀국하기 전에는 내가 뉴질랜드로 오리라고는 역시 나를 포함한 아무도 생각조차 못하였다.


뉴질랜드로 이민을 온 후, 해밀턴의 와이카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한국 내 모 대학교수직 복귀권유에 응했다가 금전요구 부패상에 치를 떨고 단념한 후, 오클랜드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선생님, 중국어 선생님을 세 글자로 줄이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라고 물었다. “글쎄다, 어떻게 세 글자로 줄이지?” 하고 머뭇거리자, 그 학생 하는 말이 “짱깨쌤!” 이라고 하면서 깔깔 웃어댄다. 짱깨쌤......, 듣고 보니 참 우습기도 하지만 정확한 말이다.


대학졸업 후 10년을 공부만 했으니 이민을 올 당시 사업을 할만한 자금도 수중에 지니고 있지 않았고, 몸에 익힌 숙달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먹고살아야 할지 고민으로 새벽잠을 자지 못했던 나날이 그 얼마였던가? 무릇 모든 생업이 모두다 마찬가지겠지만,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몸이 아프거나를 불문하고 매달리게 마련이다. 가르치는 직업도 마찬가지이다. 몸이 피곤하고 아파도 가르쳐야 하고, 마음이 괴로워도 가르쳐야 하고, 아는 것은 당연히 가르치고 때로는 모르는 것도 가르쳐야 한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적어도 자기 분야에서만은 ‘모른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못한다거나 모른다는 이유를 댈 수가 없다. 정 모르면 지금은 모르겠으나 다음에 공부해서 가르쳐주겠다고 해야 한다. 비록 전공분야라 하더라도 선생이라고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것도 실은 대단한 공력이 필요하다.


무당이 마당 비뚤다고 굿 못 하겠다는 핑계를 댈 수 없다. 마당이 비뚤건 바르건 간에 무당의 소임은 굿을 잘 해야 하는 것이듯이, 선생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학생이 마음에 들던 마음에 들지 않던 간에 우선 잘 가르쳐야 한다. ‘짱깨샘’은 일단 중국어를 잘 가르쳐야 하는 것이 지상의 임무다.


공자는 ‘가르침에는 사람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有敎無類)’라고 했다. 또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의 자질에 알맞게 맞추어 가르쳐야 한다.(因才施敎)’라는 말도 하였다. 가르치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세심하게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앞으로 가르치는 일을 얼마나 더 오래 지속할지 지금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당분간은 계속해야 할 것 같다. 일본 속담에 ‘내년 일을 지금 말하면 귀신이 웃는다.’는 말이 있다고 들었다.


그만큼 미래는 확정적으로 단언하기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사람은 생각이 많은 동물이라서 시시각각으로 마음이 바뀌고, 오늘 내린 결정이 내일이면 번복되고, 금년의 결정이 내년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것이 인간의 나약한 마음이지 않은가.


수없이 흔들리고 바뀌는 것이 많은 우리 인생이지만, 그러나 인생살이에서 쉽사리 흔들리지 않고 쉽사리 바뀌지도 말아야 할 것도 많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청춘을 대만에서 보냈고, 뉴질랜드로 와서 살고 있는 지금 생각해보니 사람의 일생은 그야말로 부평초 같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가족의 사랑, 형제동기간의 우애, 오래된 우정, 오랫동안 지켜온 자신의 신앙이나 신념 등은 쉬이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이다.


노자(老子)가 말한 불변의 상(常)이 바로 인간이 본받아야할 내용이다. 하늘이 춘하추동(春夏秋冬)을 바꾸지 않고, 땅이 생장수장(生長收藏)하는 큰 덕을 바꾸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먹여 살리듯이 말이다. 그래서 하늘에는 천도(天道) 땅에는 지도(地道)가 있듯이, 인간사회에는 인도(人道)가 불가폐(不可廢)한 것이다.


유한한 나의 이성으로 내 아무리 똑똑하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한들, 그것은 어찌 보면 보잘 것 없고 미련하고 아둔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지나온 나의 과거를 통하여 느끼게 된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흘러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가야할 길은 생각하다보니 떠오르는 라틴어 노래가 하나 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라는 제목의 노래 ‘돈데 보이’(Donde voy)가 떠오른다. 과연 나의 인생은 어디로 가는 걸까?


박인수

(2011 10. 3 開天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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