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이야기
‘그림자 벗을 삼아 걷는 길은~ 서산에 해가 지면 멈추지만~~, 마음의 님을 따라 가고 있는 나의 길은~ 꿈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길~~........’
가사가 듣기에 참으로 좋은 오래된 노래가 생각난다. 이지적인 얼굴의 박인희라는 여가수가 차분한 음성으로 부른 방랑자라는 노래이다. 그림자는 무엇일까. 실체의 허상이다. 분명히 눈에는 보이는 것이, 손에는 잡히지도 않으면서 때때로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것이다. 하늘에 태양이 비추는 한 모든 만물에는 그림자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옛날에 그림자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림자만 보면 무서워서 내달리곤 하였다. 여름날 태양이 내리쬐는 낮에 길을 나서다가 땅바닥에 자신의 그림자가 나타나자 무서워서 내달렸다. 달리면서 보니 그림자도 계속 자신을 따라 오는 것이었다. 그림자를 떨치기 위해 더욱 빨리 달렸다. 그런데 그림자가 떨어지기는커녕 같은 속도로 계속 자신을 따라 붙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 빨리 달리고 달리기를 계속하다 숨이 차서 그만 스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고사이다. 그림자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태양이 비치지 않는 한적한 숲속그늘에 들어가 조용히 쉬는 것을,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공영자(恐影子)’는 몰랐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도 죽을 때 까지 그림자를 두려워 내달리는 것과 닮았다고나 할까.
강렬한 태양이나 빛이 비치면 그림자는 어떨 때는 하나도 아닌 두 겹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첫 그림자는 비교적 선명하지만 겹 그림자는 약간 희미하다. 어느 태양이 내리쬐는 날, 바깥쪽의 ‘겹 그림자(影外微影)’가 ‘그림자(影子)’를 보고 물었다. ‘영자야, 넌 방금 일어섰다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앉고, 앉았다가 또 갑자기 벌떡 일어서고,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다가, 팔을 휘두르기도 하고....... 난 너를 따라 움직이느라 정신을 못 차리겠다. 넌 어쩜 그렇게 지조도 없이 행동에 갈팡질팡하느냐?’
영자가 대답하였다. ‘미영아, 넌 그따위 소소한 일에 웬 신경을 그렇게 많이 쓰니? 실은 나도 내가 왜 그렇게 쉬지 않고 바삐 움직여야 하는지 알지 못해. 빛이 나타나면 나도 바삐 나타나야 하고, 빛이 사라지면 나도 사라져야 하고, 또 빛이란 놈이 언제 나타났다 언제 사라질지 내가 알 수가 없으니 내 마음이 항상 황황할 수밖에........난 나의 주인 몸의 껍데기에 불과해. 네가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난 말이야 실은, 매미허물이나 뱀의 허물만도 못한 것을 난들 어찌하나.’ 장자의 우언편(寓言篇)에 나오는 또 다른 그림자 이야기이다.
그림자의 주인은 실물이다. 실물이 움직이면 그림자는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실물인 우리 몸도 실은 행동을 주재하는 주인인 마음이 항상 변하니 몸이 따라서 움직여야 하고, 그림자는 따라서 움직이고 겹 그림자는 또 따라서 움직일밖에. 실체의 주인공(몸)이 아닌 그림자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딱한 신세일 수밖에 없다. 얻어먹는 것도 없이 수고로움만 항상 따라다니니까. 게다가 빛이라는 외물(外物)의 출현과 소멸에 따라 수시로 등장과 퇴장을 해야 하는 것이니 참으로 피곤한 신세인 것만은 분명하다.
과연 우리 일평생 삶은 위 우언 중의 두 그림자의 처지와 비교하여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일까. 먹고살고, 자식들 키우고, 남들보다 한 푼이라도 더 많이 벌고, 더 출세하기 위해 온종일 황황하지 않은 나날이 인생에서 얼마나 될까? 실물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와 곁 껍데기의 두 그림자처럼 일생동안 바람처럼 휘날리며 황황한 것은 아닐까? 자신을 위하여 준비해 둔 조용히 쉴 시간과 장소가 얼마나 될까? 조용한 곳에서 주님을 우러러 기도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고 존재에 대한 사색을 해볼 시간이 얼마나 될까?
인생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생동안 수많은 관계 속에서 엮어지는 것이다. 장자의 말을 빌자면, 인생의 모든 의존관계를 ‘유대(有待)’라고 한다. 그것은 나와 남의 상호의존관계이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내가 의지할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나의 자유를 속박한다. 곧 나의 생각과 행동을 속박하는 것이다. ‘유대’ 속에서 인간은 참 자유를 가질 수가 없다. 새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강에서 헤엄치는 것을 우리는 아주 자유스럽게 생각하지만, 장자는 그것을 자유롭게 보지 않았다. 물고기는 헤엄을 치기 위하여 물의 부력에 의존해야 하고, 새는 하늘을 날기 위하여 날개 짓으로 공기의 부력을 얻어야 날 수가 있다. 새나 물고기도 나의 것이 아닌 남(공기와 물)의 힘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전혀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홀로서기 수 있는 자만이 바로 절대적 자유상태인 ‘무대(無待)’의 상태에 드는 것이고 ‘무대’의 폭이 클수록 인생은 더 자유롭게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나와 남의 얽힌 칡덩굴처럼 수많은 ‘유대’ 속에 영위되는 것이지만, 가끔씩은 그림자를 피하기 위하여 찾아들 조용한 숲속그림자가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도 자주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에 홀로 드셔서 기도를 하셨다는 성경말씀이 있다. 나날이 바쁜 ‘유대’ 상황에서도 ‘무대’를 찾아 마음속 짐을 벗어던지고 어두운 그림자를 벗어나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많기를 기대해본다.
주님, 오로지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저의 삶이 그림자처럼 무상하게 생멸하는 무의미한 일생이 되지 않도록 저를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주님을 향하는 저의 방랑자길이 꿈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길이 되도록 해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