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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2011.08.24 21:00

못 잊을 ‘말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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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잊을 ‘말씀’들



1985년의 어느 여름 날 오후라 기억된다. 대만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며칠 앞서 출국인사를 드리러 은사님 댁을 방문하였다. 은사님은 친구 분과 바둑을 두고 계셨다. 은사님께서는 평소의 장고바둑이 아닌 속기로 바둑알을 놓으셨다. 곁에서 나는 숨도 죽이지 않고 바둑을 관전하였다. 이윽고 판이 끝나고 은사님과 마주 앉았다. “대만으로 가게 되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중국인 교수들이 너의 학재(學才)를 아낄 정도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예, 은사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은사님과 작별하고 한국을 떠났다.


나의 석사학위논문을 지도하신 김영수(金泳洙) 교수님과 나눈 대화였다. 논문심사가 있던 날, 여러 심사위원들이 나의 논문을 예리한 칼로 난도질 할 때, 마지막에 일어서서 고개를 구십도 각도로 숙이시며 “제가 논문 지도를 잘못한 탓이니 모든 잘못은 저에게 돌리고, 자라나는 학생을 너그럽게 봐 주십시오.”라고 말씀하셨던 분이시다. 1993년 초, 내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얼마 안 되어서 암으로 세상을 뜨셨다.


1990년 한해가 저물어 가는 12월의 어느 날 저녁이라고 기억된다. 타이뻬이 시내의 최고급 식당. 그 해 그 은사님의 강의들 들은 학생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았었다. 지금은 대만정부의 고급 관료와 쟁쟁한 학자들이 된 이들과 함께 한 자리였다. 일류식당에 최고급 일류요리, 학생신분으로는 일 년에 한번 정도 맛보는 자리이다. 주견장(朱堅章) 은사님께서 제자들을 초청한 자리이다. 중국 강소성(江蘇省) 무석(無錫)이 고향이신 은사님이시다. 14세 때 공산당을 피해 국민당을 따라 고향을 등지고 대만으로 오신 분으로, 대만과 대륙이 교통한 후, 나중에는 고향을 가고 싶어도 고향이 기억에 남아있지 않아서 못 가신 분이다. 결국 대만에서 돌아가셨고 대만에서 묻히셨다. 평생 독신이셨다.


그날 저녁, 제자들에게는 온갖 맛난 요리를 시켜 주시면서, 은사님께서는 양념을 가하지 않은 면(麵) 한 그릇으로 저녁을 때우셨다. 지독한 감기 때문이었다. 평소 말씀은 안하셨지만, 은사님의 인품은 이미 제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젠틀맨’을 본 적이 없다. 그날 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나는 은사님 댁의 대문 초인종을 눌렀다. 한국에서 가져 간 홍삼 엑기스를 전해 드리려고 방문한 것이다. 일단 집안으로 들어가 마주앉아 찾아온 용건을 말씀드리고 5분 이내로 댁을 나서려 했다.


“나는 재학 중인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어떠한 선물도 받아본 적이 없네. 자네가 나의 이 신조를 깨지 말아주었으면 고맙겠네.......” 월광에 빛나는 푸른 검과 같은 인품을 가지신 분이셨다. 나는 가지고 간 홍삼 엑기스를 도로 가지고 올 수밖에 없었다. 들리는 바로는, 지금도 그 은사님의 묘소에는 제자들이 헌화한 생화가 일 년 내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호춘혜(胡春惠)교수님,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이 고향이신 분으로, 11세의 나이에 역시 국민당을 따라 대만으로 건너오셨다. 역사학이 전공이신 분으로, 내가 대만으로 떠나기 전에 이미 한국에서 안면을 익힌 분이시다. 중국현대사 중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전공하신 독특하신 분으로, 1980년대 초에 한국의 성균관대학교와 부산대학교 등에서 교환교수로 계신 적이 있으셨다. 중국학자 중 한국 독립운동사 분야에서 이 분만 한 학자는 없다.


얼마 전에 안부전화를 드리니 요사이는 주로 홍콩에서 거주하시며, 그 후덕하시던 사모님은 암으로 투병 중이시란다. 이국에서 맞이하던 매년 명절 때면 나를 댁으로 불러 가족과 함께 식사에 초대해주신 분이시고, 큰 아들이 타이뻬이에서 태어났을 때 사모님과 함께 집으로 오셔서 축하해 주신 분이시다. 갖은 통로를 경유하여, 대륙과 대만이 아직 자유롭게 교통하기 전인 1980년대 중반에, 중국대륙 고향에 계시던 연로한 부친을 대만으로 모셔 오셨다.


같은 학과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분은 아니셨지만, 내 삶에서 이처럼 귀감이 된 분은 드물다. 은사님의 부친은 모택동 이후 중국대륙에서 벌어진 경천동지할 현대사를 몸소 겪으신 산 증인이셨기에, 나는 시간만 나면 은사님 부친과 만나 얘기를 청하여 듣고자 하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으로, 양자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대교(長江大橋)를 1960년대 초 소련의 도움이 없이 중국인 자체 기술력으로 건설할 때, 15인 엔지니어 팀 중의 한 분이셨음을 자랑스럽게 들려주셨다. 부친께서는 대륙을 떠나 와서 모든 것이 풍요로운 대만에서 3년도 안 되어 돌아가셨다.


2000년에 은사님을 한국에서 모실일이 있어 서울에서 부산까지 새마을호를 타고 가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남북한이 통일되려면 먼저 대륙과 대만이 결합을 한 이후가 될 것이라”는 역사학자의 예견을 나에게 들려주셨다. 그리고 한국의 언론계에서는 어떤 이유에서 인지 본인이 ‘반한(反韓)인사’로 지목되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씁쓸한 웃음을 보이셨다. 이 분이 양성한 제자들은 다수 국내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그 분에 대한 올바른 평가는 역시 후일의 역사가 판정하리라고 믿는다.


도가 끊어진지 천 년이 흘렀고, 성현의 말씀이 잊혀 사라졌다지만(道喪千載, 聖言湮沒),


그래도 선각이 있으셨기에 나를 사람으로 인도하였네(不有先覺 孰開我人).


이 말은 주희(朱熹)가 그의 앞선 스승인 정자(程子)를 기리면서 한 말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스승이 있게 마련이다. 개인이 어느 때에 어떠한 스승을 만나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큰 스승을 만나면 크게 될 것이다. ‘수양산(首陽山) 그늘이 강동 팔십 리’ 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큰 사람 아래서 큰다는 말이 있다. 비단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스승이 아닐지라도 우리 주위에는 스승이 될 만한 이들이 많다. 부지런히 찾아가 배울 따름이다. 직접 찾아가 배우지 못하면 그 분들이 남긴 글을 통하여 열심히 배워 삶의 지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배움에 게을리 하지 말 일이다. 인생은 일평생 배움의 과정이 아닌가?


위에서 예를 든 세 분 이외에도, 나에게는 가르침을 통하여 혹은 평소의 생활을 통하여 나에게 베풀어 주신 그 은혜를 잊을 길이 없는 분들이 많다. 이제는 돌아가셨거나 자주 접할 길은 없지만, 앞에서 떠오르는 몇 분 스승께서 나에게 가르치신 말씀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잊을 길이 없다. 오늘 밤 꿈속에서나마 그 분들을 한 번 만나 뵈었으면 좋겠다.


그 분들이 오늘 나의 모습을 보신다면 무어라고 말씀하실까? ‘자식을 낳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으면 부모의 잘못이요(養而不敎父之過), 가르쳤어도 제자가 뛰어나지 못하면 스승의 잘못이다(敎而不優師之過)’ 라는 옛말에 따라, 틀림없이 이 못난 불초를 탓하지 않으시고 자책하실 것이 다만 두려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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