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준엽(金俊燁) 선생을 추모합니다.
우리들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최후의 독립군 출신이자,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신 김준엽 선생께서 지난 6월 7일에 영면하셨다는 소식을 뉴질랜드에서 인터넷뉴스로 접했다. 선생께서 일제의 학병에 징집당해서, 학창시절 그가 다녔던 고향 신의주 고보를 뒤로하고, 평양에서 신의주 철로를 건너 광활한 중국대륙으로 끌려가신 것은 1944년 2월 13일의 일로 선생은 회고록 <장정>에서 기억하신다. 살아서 돌아올 가망이 거의 희박하다고 느끼면서 평양과 신의주 간을 5년간 내왕하였던 그 철로로, 어릴 적 학창시절 추억을 뒤로하고 끌려가신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그러나 그 일은 선생께서 사전에 세심하게 준비하고 각오하신 학병지원 과정이었다. 일제말기에 일본의 게이오(慶應)대학교에 재학중이던 선생은 조선인 학생으로서는 강제징집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는 지원을 하셨고, 지원 후 탈출이라는 주도면밀한 사전계획을 세우고 실행하신 것이다. 국경을 건넌 열차가 만주벌판을 이틀 동안 달려 다다른 곳은 예상했던 북만(北滿)이나 남만(南滿)이 아닌 중국대륙의 중부전선이었다고 하셨다.
불안과 미지의 전지에 떨구어진 상황에서도 선생은 ‘그렇다면 탈출이 가능하리라’고 판단하셨단다. 탈출만 성공하면 만주와 같은 일본군세상이 아닌 대륙에서는 중국군에 찾아가 새로운 모색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셨다. 탈출에 성공하면 집으로 보내는 일본어로 쓴 엽서 끝에 인사말로 ‘초초’(草草)라고 쓰기로 하셨다니 얼마나 주도면밀하신 분이신가! 일본형사의 감시를 피하고, 본인의 학병지원 덕택으로 말미암아 부모와 형제에게 닥칠 압박을 미리 덜어 드리고자 하셨다니 또 얼마나 마음속 깊은 효자이셨던가.
당시의 조선인학병 중에는 본인이 진정으로 원하여 자원하는 이가 많았던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중에는 무공을 세우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앞으로 ‘국운이 창창한 일본’이 곧 중국을 패배시킬 것이고, 일본이 지배하는 조선 땅에서 출세의 길이 보장되는 것으로 믿는 이들이 많았다. 이 점에서 볼 때 선생의 결단과 삶은 오늘날 우리들이 인생을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는 가, 바른 길 올바른 정도를 귀감으로 일깨워 주신 분이다.
선생께서는 일본유학중 학도병징집을 예견하고 장차 중국에서 탈출을 예상하실 때부터 중국어를 열심히 독학으로 공부하였고, 탈출하고서는 중국인과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으셨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선생께서 권력의 압력에 의해 고려대 총장에서 물러나실 때 고대학생들이 총장퇴임저지를 위해 데모를 하였던 분이시자, 노태우 정부의 국무총리직 권유를 끝까지 고사하셨던 분으로, 양심적인 학자요 지조 높은 선비이기도 하셨다.
나는 가끔씩 김준엽 선생을 생각하고 그 분의 뜻을 기릴 때 마다, 또 한분 독립군출신이자 일제의 강제 학병징집에 끌려가 중국대륙에서 탈출하여 독립군을 찾아간 분을 잊을 길 없다. 암울하던 시대에 <사상계> 편집인을 지내셨고 사인(死因)이 아직도 미혹에 빠진 채로 불의에 타계하신 고 장준하(張俊河) 선생이 바로 그분이시다. 두 분 선생의 중국에서의 행적과 그 이후 보여준 애국애족심은 나의 뇌리에서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다.
개인적으로 두 분과 일면식도 없고 인사도 한번 드린 적이 없지만, 내가 살아오면서 읽고 사색한 책을 통하여,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군의 활동과 당시 중국에서 살다간 한국인 선각(先覺) 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이 두 분께 한없는 존경의 념(念)을 표한다. 서울에 들러 기회가 닿으면 문안인사라도 한번은 드려야 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야말로 생각뿐으로 그만 선생의 부음을 접하게 된 것이다. 뉴질랜드 교민들 중에도 김준엽의 <장정>이나 장준하의 <돌베개>를 읽어보신 분들이 계실 것이고, 많은 점에서 저와 공감을 하시리라 믿는다.
내가 대만에 유학하던 1980년대 중반, 한국독립운동을 전공하시는 중국인 교수가 나에게 김준엽을 아느냐고 물으셨다. 선생은 이미 대만학계는 물론이고 공산당이 통치하는 중국에서도 명망이 꽤 높으셨다. 그때까지 나는 그 분이 그저 고려대학교 총장으로만 막연히 알고 있었다. 십 년 가까운 대만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과 중국의 국교수교 후 중국왕래가 자유롭던 1990년대 초에 나는 상해임시정부와 중경임시정부의 청사를 찾아가 보았다. 규모면에서 한마디로 충격을 받기에 족하였다. 나라를 잃은 애국선각자들의 울분이 어떠하였을까 짐작하고도 남았다.
상해의 홍구공원(현재 노신공원)에 들러 윤봉길의사 장거(壯擧) 장소를 찾고자 하였으나, 공원 관리인조차 그런 인물과 그런 의거가 그 공원에서 일어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수년 후에 다시 가보니 그제야 의거장소에 돌기둥도 세우고 윤봉길의사의 아호인 매헌(梅軒)을 따서 매정(梅亭)이라는 정자도 지어져 있었다.
김준엽선생과 장준하선생은 같은 시기에, 중국의 각각 다른 장소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였고, 후일 함께 만난 조선인 일행 50여명의 젊은이들과 산을 넘고 물을 건너면서,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던 과정에서 겪은 고초는 눈물 없이는 읽을 수가 없다. 중국인 사창가에 넘겨져 몸을 팔던 젊은 조선 여인도 일행에 함께 있었다.
일본군의 주둔지가 있던 중국의 산둥성에서 탈출하면서부터, 중국군 군대를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중국군에 포로 대접을 받다가, 진심을 알고 난 후 도움을 얻을 수 있게 되기까지, 가끔씩 중국국민당 군대의 도움을 얻어 지프나 달구지를 얻어 탈때도 있었지만, 오로지 두 발로 걸어서 새들도 날아 넘기 힘들다는 험준한 파촉령(巴蜀嶺)을 짚신을 신고 넘어 촉(蜀)나라 땅, 사천성 중경에 도착하였다고 두 분의 회고록에서는 공히 기술하신다.
광할한 중국대륙을 헤매면서 조국을 잃은 젊은이들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오로지 그 울분에 찬 일념과 의지가 없었던들 파촉령은 넘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때 그 분들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 분들이 느낀 서러움과 울분은 어떠했을까?
험준한 산길의 조도(鳥道)를 넘으면서 허기진 배를 얼음과 눈으로 채우면서 추위에 떨면서 밤길을 걸어간 그 신산고초를 어찌 필설로 다 할 수가 있으리오. 산속에서 길을 잘못 들어 마적들의 소굴을 중국군대의 요새로 착각하고 찾아 들어가 가진 물건을 모두 빼앗기고, 사정을 설명하고 살려달라고 빌고 빌어 겨우 목숨만 겨우 건져 나온 이야기도 들어있다.
나는 김준엽 선생 일행이 출발하여 도착하기까지 걸어 넘었다는 산길을 중국의 지도에서 찾아서 꼼꼼하게 살펴본 적이 있고, 양자강 상류의 지류를 뱃길로 여행한 적이 있다. 유방(劉邦)과 항우(項羽)가 초한쟁패(楚漢爭覇)의 건곤일척(乾坤一擲) 싸움을 벌일 때, 실력이 월등한 항우가 유방에게 패하는 결정적 이유는 파촉(사천성) 땅을 유방에게 장악당했기 때문이다. 양자강 수로를 제외하고는 육로로는 쉽게 드나들 수 없는 천험 길이다. 풍부한 물자의 무한한 보고인 사천땅은 장개석 국민당군이 일본군에 최후까지 저항할 수 있는 근거지가 된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다.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얻어 사천성 중경까지 셋방살이로 옮겨간 임시정부는 나라를 빼앗기고 헤매는 50명 청년의 유일한 기대이자 희망의 등불이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찾아간 임시정부 내부의 분열상은 이들 젊은이들의 희망을 천길만길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게 하였다. 그 실망이 어떠했을까! 어찌 나라 잃은 백성들의 대표기구로 정부의 이름을 내다 건 단체가 그럴 수 있었을까? 찾아가면 실망할 것이므로 찾아가지 말라는, 중도에서 만난 독립지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일지라도 한국정부일진데 나라 잃은 서러움에 겨운 젊은이들은 기어이 찾아갔다. 그리고는 실망하여 하남성 낙양으로 돌아와 독립군대장 이청천(李靑天, 본명 池大亨) 장군을 찾아갔고 해방될 때까지 그의 부관으로 계시다가 해방을 맞았다. 선생은 독립군 동지들과 국내침투 특수훈련을 중국군 특수부대에 의해 받으셨다고 한다.
임정으로부터 국내침투 명령을 기다리던 중 갑자기 해방되던 날, 산둥성 기지에서 이륙한 중국군용 전투기를 타고 서울로 날아와, 비행장에서 완전무장한 상태에서 적의에 불타는 일본군수비대와 대결하다 실패하여, 이미 패망하였으면서도 여전히 주인 행세하는 일본군 수비대장의 집중포격 협박에 눈물을 머금고 중국으로 되돌아간 이야기를 알고 있는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국민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KBS는 이걸 반드시 제작해야 한다.
파촉령을 넘는 밤길 도중, 추위와 허기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산중의 어느 외딴 민간인 집을 찾아가 두부탕을 얻어먹으며 허기를 면하고 밤을 꼬박 지새울 때의 일이라고 한다. 어디선가 멀리서 한 여성의 노래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여성합창단의 노래로 들려왔다. 역시 파촉령을 넘어 중경으로 국민당 정부를 찾아가던 중국인 애국젊은이들이 추위 속에서 용기를 잃지 않기 위하여 부른 노래일거라고 선생은 추측하셨다. 다음날 아침 산길을 걷던 도중에 그 노래의 주인공들을 만나서 전날 밤의 노래얘기를 해보니 추측이 맞더라고 하셨다.
그날 밤 그 중국여학생들이 부른 노래 중, 기억에 남는 몇 곡을 김준엽 선생은 회고록에서 가사까지 정확하게 적어 놓으셨다. 그 중에는 내가 아는 것도 들어 있었는데, 제목은 ‘첫사랑의 여인’(初戀女)이라는 노래다. 선생의 서거소식을 접하고 애절한 마음을 이길 수 없어 추모하는 마음에서 그 노래 가사를 아래에 적어, 삼가 고 김준엽선생의 영전에 헌상하고자 한다. 독립군 시절 중국대륙에서는 물론이려니와, 독립 후 한국으로 돌아오신 후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 노래와 가사는 선생의 뇌리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아 있었으리라.
初戀女(초연녀)
我走遍漫漫的天涯路, 我望斷遙遠的雲和樹
多少的往事堪重數, 你呀, 你在何處
我難忘你哀怨的眼睛, 我知道你那沈黙的情意.
你牽引我到一個夢中, 我却在別個夢中忘記你
啊! 我的夢和遺忘的人, 啊! 受我最初祝福的人
終日我灌漑著薔薇, 却讓幽蘭枯萎.
(나는 세상길을 두루 걸으면서, 멀리서 피어나는 구름과 나무를 바라 보았네,
지나간 많은 일들 홀로 다 헤아릴 수 없는데, 그대여, 그대는 어디로 가버렸나.
애원하던 그대 눈빛 난 아직 잊을 수 없고, 침묵하던 그 마음도 내 잘 안다네.
그대는 나를 꿈길로 이끌었건만, 난 그 꿈속에서 그대를 잃고 헤매고 있다네
아! 나의 꿈이여 사라진 님이여, 아! 처음으로 나의 축복을 받은 님이여
난 종일 장미꽃에 물을 뿌렸건만, 오히려 한란 꽃을 시들게 하였구나)
이 노래는 제목이 첫사랑의 여인이지만, 실은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같이 나라를 잃은 지사들의 허전함과 절통함을 사랑하는 님에 비유하여 애소(哀訴)한 것임을 독자들께서는 아실 것이다.
선생의 생년(生年)은 1920년 8월 평북 강계이시고, 졸년(卒年)은 2011년 6월7일, 향년91세 이시다.
영령(英靈)이시어 이제 고이 잠드소서! 우리시대의 참된 인인(仁人)이자 지사(志士)였던 분이시여, 김준엽 선생이여!
오클랜드중국문화원
박인수 再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