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金信)의 회고록 출간을 기다리며
지금 타이뻬이(臺北) 민선시장 하오룽빈(郝龍斌)의 부친은 하오보춘(郝栢村)이라는 분이다. 중국 강소성(江蘇省) 태생으로, 얼굴모습이 윈스턴 처칠을 닮아서 불독(Bulldog)을 연상하게 한다. 장제스(蔣介石)총통의 경호실 실장을 역임하였고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후, 타이완 행정원 원장(국무총리)을 지낼 때 있었던 일화의 한 장면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4개월 정도 시간이 지난 1992년 12월 어느 날, 한국의 대통령 특사자격으로 대만을 방문한 고 정일권(丁一權)씨와의 면담장면이 티비화면에 잠시 비쳤다. 일그러진 얼굴을 한 하오보춘이 노기 띤 언성으로 정일권씨에게 하던 말, “너희들 독립군 이청천(李靑天) 장군은 대륙에서 나와 함께 피를 흘린 전우였다. 내가 아직 눈을 뜨고 살아있는데 너희들이 어찌 이럴 수가 있나?”라고 하던........ 그 말을 나는 영원히 잊을 길 없다.
사연은 이러하다. 1992년 8월 23일, 노태우 정부는 한국과 오랜 우방이던 중화민국(대만)과의 단교와 동시에 중국과의 수교를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은인(恩人)이다. 백범 김구가 윤봉길 의사로 하여금 상하이 홍구(虹口)공원에서 거사를 성공시켜(1932.4.29) 현장의 일본군 수뇌들을 폭사시키자, 장제스는 중국의 10만 대군이 할 수 없는 일을 한국의 한 의사(義士)가 해냈다라고 극구 찬양하였다.
그전에는 임시정부가 중국인들에게 별다른 주의를 끌지 못했으나, 윤봉길 의사의 거사성공 후 장제스는 백범을 불러 임시정부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계기가 되었다. 조국을 잃고 뿔뿔이 흩어진 애국지사들이 어렵게 성립시킨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땅에서 일본군에 쫓겨 상하이에서 이리저리로 옮겨 다니다가 국민당을 따라서 마지막으로 충칭으로 옮겨간 후 해방될 때까지 필요한 모든 도움을 주었다. 임시정부 자금, 독립군양성 지원비, 자녀들의 학비, 심지어 국내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생계비까지 모두 무상으로 주었다.
백범이 장제스에게 지출내용을 적어 보낸 친필편지의 사본을 대만정부 문서보관소에서 나는 본적이 있다. 편지는 한 두 번이 아니고 여러 차례 있었다. 백범이 돈을 ‘구걸하는’ 내용이 많았고, 장제스는 돈을 주고는 국민당 특무를 시켜 돈을 어떻게 쓰는지 뒷조사를 시켰다. 임정의 좌익계열 일파는 그 돈을 나눠 가진 후, 공산당 아지트가 있는 연안(延安)의 마오쩌둥(毛澤東) 편으로 가면서 개를 잡아먹는데 돈을 쓰는 경우도 있었다. 얼마나 허기가 졌으면 그랬을까? 라고 이해한다. 해방 이후 역대 한국정부는 그 돈을 하나도 갚지 않았다. 국민당 정부도 갚으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헌법 전문에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라고 명시하고 있다. 임시정부가 얻어 썼던 그 돈은 당시의 정부차관이다.
백범이 한인괴한의 총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을 무렵, 중국인 의사들이 가망이 없다고 포기하고자 했을 때, 장제스는 멀리 광저우(廣州)에서 전화를 걸어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백범을 살려 내라고 지시하였다. 의사들은 추가 암살을 피하기 위해 백범을 실은 배를 호수에 띄우고 호남성 성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술하여 결국 백범의 목숨을 살려냈다.
백범의 둘째 아드님이 김신(金信) 이시다. 첫째 아드님 김인(金仁)은 안개가 많은 첩첩산중의 도시 충칭(重慶)에서 폐병으로 죽었다. 돈이 없어 약도 한 번 제대로 못써보고 죽었다는데, 그 때 백범의 수중에는 미화 300달러가 있었다. 그 돈은 하와이교민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일해서 보내준 독립운동지원금이었고, 백범은 그 돈에는 손도 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90년대 중반에 상하이와 충칭 임시정부 청사를 둘러본 적이 있는데, 규모가 그렇게 작을 줄은 미처 몰랐다.
백범의 모친 곽마리아 여사는 상하이의 시장바닥 쓰레기통을 뒤져 중국인들이 버린 야채를 주워와 삶아 먹이면서 손자들을 키웠다. 어느 날 곽마리아 여사가 백범에게 가장으로서 호구책을 마련하라고 일렀다. 백범이 잃은 나라를 되찾기 전에 다른 일은 못하겠노라고 대답하시자, 곽마리아 여사는 기어이 회초리를 들고 백범의 종아리를 때리셨다. 이 때 사돈지간이던 안중근 의사의 모친이 방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그 장면을 보고 “임시정부의 관리를 왜 때리느냐”고 항의하시자, 그제서야 회초리를 거두셨다고 한다. 김신의 회고록에도 나오게 될 이야기의 일단일 것이다.
김신의 회고록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며칠 전 중국어 인터넷 사이트에서 ‘하오보춘’을 검색하다가 눈에 띄는 문장제목이 있었다. ‘나는 한사람의 중국인이다(我是一个中國人)’라는 제목이었다. 바로 김신이 상하이에서 태어나 해방되던 해까지 살았던 중국에서의 가정이야기, 학창시절이야기, 임시정부 이야기, 해방된 조국에서 공군을 창설한 이야기, 초대 중화민국(대만)대사로 부임하여 장제스와 재회한 이야기, 박정희의 특사로 자주 대만에 가서 어려운 부탁을 한 이야기 등등, 모두 나의 심금을 크게 울리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인터넷 사이트에 그 글을 올린 2005년 당시의 연세가 여든이라고 하셨으니, 금년 86세 일 것이다. 말미에 회고록을 집필하고 계신다하니 하루빨리 세상에 나오기를 기대한다.
1992년은 나의 대만유학 마지막 해였다. 논문완성을 위해 수개월동안 밤을 지새우던 무더운 여름철 8월 22일, 나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들렸다. 한국이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한다는 뉴스가 날아든 것이다. 매일 대면하던 중국친구들의 얼굴을 나는 하루아침에 볼 면목이 없게 되었다. 그날로 기숙사 방문을 걸어 잠그고 두문불출하였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밤에 몰래 나가 일주일치 음식거리를 준비해 들어와서는 칩거하였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중국인 친구들이 찾아와 오히려 나를 위로해 주었다. 지도교수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댁으로 불렀다. 아직 분량이 절반이나 남아있는 논문을 한국으로 돌아가서 완성하라고 하셨고, 나는 완성하기 전에는 대만을 떠나지 못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당시 국제정세의 흐름으로 보아 한국과 중국의 수교는 당연한 추세였다. 대만(국민당) 사람들이 그걸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한국의 국익을 위해 한국정부가 언제까지 미룰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고, 대륙을 통치한 경험이 있는 국민당 정부가 그걸 방해할 소인의 국량도 절대로 아니다. 다만, 오직 다만 한 가지, 일본이 했던 방식으로 자신들을 배반하지 말아달라고 한국정부에 부탁한 것이다.
중국과의 수교일정을 사전에 알려주어 한국 내에 소재한 대사관 부지와 소유자산을 처분하여 중국(공산당) 정부가 빼앗지 못하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한국정부는 매몰차게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그 결과 청나라말기 위안스카이(袁世凱) 시절부터 치욕의 장소인,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71번지 일대의 ‘중화민국’ 대사관 부지와 건물은 ‘중화인민공화국’의 대사관으로 간판을 바꿔서 걸 수 있게 하였다.
만주의 일본군 육군사관학교를 나왔고 중국어가 유창하던 정일권 씨는 1992년 12월, 한국정부의 ‘사죄단’ 단장 자격으로 타이뻬이를 방문하였다. 정일권씨는 대만을 방문하여 장제스의 미망인 쑹메이링(宋美齡) 여사와 단독면담도 수차 나눈 적이 있던 친 국민당 인사였고, 당시 일행 중에는 이청천 장군의 아드님도 있었다. 회담도중 하오보춘이 이청천 장군 말을 꺼내는 순간, 정일권 씨가 그의 아들도 함께 왔다는 말을 하자 곧장 그를 들여보내라 하였다. 들어서는 그를 보자마자, 그토록 냉랭하던 하오보춘이 일그러진 불독 표정을 바꾸고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자네는 부친을 많이 닮았군. 자네 부친의 사격솜씨는 일품이었지.......”라고 회상하였다.
정일권씨는 국민당 정부의 수장들을 만난 자리에서 ‘가시를 걸머지고 죄를 빌러 왔다(負荊請罪)’라는 중국인 속담을 인용하면서 사죄하였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97년 말, 한국이 IMF를 맞아 급하게 되자 대만정부에 돈을 빌리러 갔다. 당시 선거에서 국민당이 패하고 대만독립을 주장하면서 야당에서 집권에 성공한 민주진보당 정부는, 한국정부가 수용하기 어려운 몇 가지 조건을 붙여서 거절하였는데 단교이야기는 한마디도 끄집어내지도 않았다. 중국인들은 가슴깊이 묻어둔 통한(痛恨)은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다.
2010년 상반기 통계에 의하면, 대만을 방문한 중국대륙 관광객 숫자가 관광허가 1년 만에 150만을 넘어섰다. 현재 대만(국민당정부 재집권)과 대륙(공산당)은 실제적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상호간 민간인 자유왕래 및 투자, 항공기 직항노선 개설, 은행신용카드 결재보장 등등, 남한과 북한과는 상상도 못할 일을 저들은 지금 하고 있다. 대만의 국민당은 말할 것도 없고, 대륙의 공산당도 한국과 중국의 당시 수교과정에서 한국정부가 보여준 미숙함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근시안적인 이분법 사고에 사로잡혀 중국인들의 전체적인 실상을 파악하지 못한 한국정부에 두고두고 약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남북한의 통일은 우리민족의 최대과제이다. 아직까지 이데올로기의 차이로 인해 민족이 분단된 채로 남아있는 국가는 지구상에 없다. 통일은 민족의 공존공영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분단된 상태로는 국제사회에서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한반도통일의 한 중요한 열쇠를 나는 중국공산당이 가지고 있다고 본다. 필자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연구를 학문적인 필요에서 뿐만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여긴다.
1950년 6월 김일성이 일으킨 6.25는 대륙에서 중국공산당의 휘몰아치는 선풍으로 말미암아 풍전등화에 놓여있던 대만의 국민당 정권을 구해주는 은인이 되었다. 참으로 역사적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역사에서 교훈을 배울 줄 모르는 민족은 장래를 보장받을 길이 없다. 무릇 일국의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사방으로 강대국에 둘려 쌓여있는 한국의 지도자는 꼭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