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의 세상이야기 : 우리 한인들은 거짓과 아첨과 편애하는 바람둥이를 조심해서 계획을 세울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사는 한인들의 세태에 맞는 말과 같았습니다. “교언영색, 선의인” (巧言令色, 鮮矣仁), 누구나 한 번쯤 학창시절에 들어 본 적 있는 유명한 말입니다. 오늘 정말 생각해 보고 싶었습니다. “교언영색”은 공자의 (기원전551년–기원전479년) 논어(論語)의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말을 교묘하게 하고, 얼굴빛을 화장 진하게 곱게 꾸미는 사람치고 선량하고 착한 사람이 별로 없다.”라는 뜻이었습니다.
논어(論語)의 학이(學而)편에서, 사람들에게 “교언영색이라 하면 무엇부터 떠오릅니까?”라고 물어 보면 “아첨이요”라고 답합니다. 꼭 틀렸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공자도 “나는 임금을 모시고 예를 다했는데 사람들은 내가 아첨한다고 여기는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교언영색”이란 말이 들어 있는 구절을 살펴보면, “교언영색”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시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언영색하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은 드물다.” 즉, “교언영색”이 어질지 못한 것이라 하지 않았으나, “교언영색하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은 드물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한 것일까?
조선시대에,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자신의 “논어고금주”에서 (論語古今注), “교언영색”은 뜻 그대로 해석하여, 말을 잘 가려서 하고 얼굴빛을 좋게 한다는 뜻으로 풀었습니다. 그러나 “교언영색”하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과 어질지 못한 사람이 섞여 있으니 잘 가려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언”도 못하고 “영색”도 못하는 사람은 어질다고 할 수 없었지만, “교언영색”하는 사람 중에 소수만이 진실로 어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그것이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언어적인 능력이나 유창한 화술이나 매끄러운 글쓰기 실력이 필수로 여겨지고, 속을 채우는 것 뿐만 아니라, 운동을 해서 몸을 만들고 옷을 잘 입으면서 자신의 외적인 면을 꾸미는 것도, 능력으로 인정받는 이 시대에서, 그래도 말 잘하고 꾸미는 것을 경계하라는 것이지만, 조금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공자의 뜻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언”은, 말을 교묘하게 한다는 것으로 말을 잘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듣기 좋게 말을 꾸며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색”은, 얼굴빛을 곱게 꾸민다는 것으로, 속마음이 어떠하든지 얼굴표정을 좋게 꾸민다는 것입니다. 공자는, 바로 “꾸미는” 사람들은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고 다른 사람이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속마음을 알 수 없으니 무조건 믿지 않고 지켜보라는 의미이었습니다.
이렇게 듣기 좋은 말을 꾸미고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는 일을 잘 하는 사람들의 한 유형이, 세상의 바람둥이와 같았습니다. 정말 말을 참 잘했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원하는 말만 골라서 해주고, 같이 말을 나누면 재미도 있었습니다. 얼굴은 선량하게 생겼는지, 진짜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걱정이 되어 공자는 사이비(似而非)를 가려내라는 것입니다.
오클랜드의 세상에서 언제나 타고난 성품이나 진심으로 좋아해 주는 사람만 만나면 좋겠지만, 그러나 말을 잘 하고 기분을 잘 맞춰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무조건 마음을 주기 보다는 한 번 생각해 보고, 진심인지 아니면 “교언영색” (巧言令色)을 하고 있는 것인지 살펴 보는 것입니다.
2,500년 전이면 기원전 500년 시대에, 한반도의 남쪽의 유적에는 움집과 화롯불이 발견된 시기보다 더 앞선 시대에, 그런 시대적 배경과 환경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도, 거의 현대를 사는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현대에 와서도, 공자가 말하는 군자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기본조건이었으며, 물론 돈만 많이 버는 것이 성공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채화아티스트/기도에세이스트/칼럼니스트 제임스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