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의 세상이야기 : 오클랜드에서 우리 한인들도 문학, 아트, 또는 음악을 통해 얻은 고운 에너지를 마음의 양식으로 쌓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원래 본인은 에세이 쓰기를 주저했었습니다. 첫째로 게으르기 때문이었고, 둘째로 풍족한 유머나 감각이 많지 않은 이유 때문이었고, 셋째로 단편 에세이를 잘 구성하기가 어렵다는 편견과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에세이를 쓰게 되면, 잘난 체 하는 것 같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 같았고,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는 것 같았고, 그리고 에세이를 써서 알려야 할 어떤 의무와 책임도 있어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전 같으면, 보타니 쇼핑몰의 서점이나 라이브러리로 달려 가야 볼 수 있는 내용들을 가만히 앉아서 세상의 정보들이 쏟아지니, 일부러 졸필을 써야 할 까닭이 없어졌기 때문이었으며, 바로 에세이로 보내지 않아도 될 만큼 세상이 편리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트감상 및 평론들과 막걸리 찬가와 세상이야기 에세이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책이 아직도 없다고 말하니, 친구 아티스트들과 교수들은 의아해 하기도 했었습니다.
지금까지 오클랜드에서 생각해 보면, 무슨 철학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음악이 좋아서, 틈만 나면 카세트 테이프나 CD와 DVD로 음악감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가 지금보다 음악을 더 많이 들었던 것 같았습니다. 세상의 철학들이 모든 학문이나 생각이나 행동양식에 기초가 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무엇을 행하든지, 이곳 오클랜드에서 삶의 철학이 없거나 결여된다면 중심을 잃는다는 것을 오클랜드의 삶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공학을 전공했던 한 친구 교수의 에세이 서문에 플라톤이나 칸트 등을 전제하는 것을 보고 당연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클래식음악을 듣거나 또는 아트나 시를 감상하면, 그 높은 품위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라는 어떤 강의를 사랑했었습니다. 클래식음악이나 아트나 시를 품위가 있다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즐기는 누구에게나 품위가 있다고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습니다. 노래방에 가는 친구들을 붙잡고 품위가 있어 보인다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의 오클랜드의 삶 속에 그 어떤 배움에도 항상 사람이 중심이었고, 항상 사람이 먼저이었습니다. 항상 사람이 중심이 되지 않는 배움도 있었습니까? 그래서 철학이든 개념이든 아이디어가 되는 교양영역에서, 항상 계속 배우고 또 배우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인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어루만져 주는 문학이나 아트나 음악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오클랜드의 삶 속에 한인들의 중심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품위가 있는 문학이나 아트나 음악을 통해 얻은 고운 에너지를 마음의 양식으로 쌓아 두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아무렇게 만들어서 자랑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혹은 시인이나 예술가나 작곡가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그러나 요즘에 세속적이거나 예능적인 이야기들만으로 이상하게 달콤한 가면을 쓰고 포장되어 마치 진짜인 것처럼 전해 주고 있는 것이 서글퍼지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한인들도 끝없는 오클랜드의 세상이야기를, 무슨 재주인 것처럼 모든 공허한 미사여구(Empty Rhetoric)를 동원해서 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나누는 언행이, 항상 답답하지 않아야 하고, 우리의 기쁨이 있고, 진실된 통로들이 되도록 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환희나, 비발디의 사계절이나, 브람스의 항가리 무곡들이나, 애드가 앨런 포우의 아나벨리의 시나, 워즈워드의 무지개의 시 등을 통해서, 지금도 우리가 사는 오클랜드에서, 우리 한인들이 언제나 품위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고운 에너지를 품으며, 언제나 영원한 마음의 양식으로 쌓도록 충고하는 것 같았습니다.
수채화아티스트/기도에세이스트/칼럼니스트/제임스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