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의 노하우를 배웠습니다.
다윗은 그야말로 찬양의 일가견이 있는 사람임은 두말 할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언약궤를 가져오면서 그 언약궤를 놓아둔 장막에서 섬길 레위인 찬양대를 세우고, 어떻게 할 것을 명한 역대상 16장 7절부터의 말씀을 살펴 보았고 다윗의 찬양의 노하우를 배우고자 했던 마지막 글입니다. Be happy! Be Holy!
4. 역대상 16장 8절 : 선포 –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온 세상에 알게 하라.
Make known among the nations what He has done.
찬양의 또 다른 면은 선포이며, 선교이다. 주님의 행하신 일, 그 아들을 내어주신 일, 십자가를 지신 일은 마땅히 선포되어야 할 것이다.
5. 역대상 16장 9절 : 그에게 노래하며...
Sing to Him.
너무도 당연하고 너무도 단순해서 우리가 자주 잊어버리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누구에게 노래하며 누구에게 찬양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찬양할 때에 과연 주님께 눈을 맞추고 있는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냥 막연히 주님께 드린다고 생각만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일까? 우리에게는 실재적이고 구체적인 “상대”가 있는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가수들은 상대 없는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거의 대부분은 노래 자체가 그렇습니다. 대상이 없는 노래들이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찬양 중에도 그런 곡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대상이 있는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사탄숭배자들의 노래와 찬양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과 대상이 있습니다.
내 노래는 누가 듣고 있습니까? 나는 누구에게 노래합니까? 그분을 알지 못한 채 그분이 오른쪽에 계신데 나는 왼쪽을 쳐다 보고 노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허공에 대고 노래하고 있지는 않을까? 정말 뜨겁게 찬양하고 열정으로 노래했는데 그냥 허공으로 흩어져 버리는 느낌이 들 때는 없었는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노래하는 것과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 노래하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사랑의 “세레나데”를 한 두 번 만난 것 뿐인 여자에게 부른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제대로 눈이나 맞출 수 있을까? 나는 주님께 노래하면서 얼마나 감동한 눈빛으로 그 분을 바라보고 있나요?
우리는 그에게 노래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분을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노래가 나와야 합니다. 그 분이 계신 곳과 반대 쪽을 보면서 마치 감격한 것처럼 꾸미지 말아야 합니다.
6. 역대상 16장 9절 : 하나님의 신기한 일들을 (Wonders) 말하라.
Tell of all his wonderful acts.
남 몰래 훌륭한 일을 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것이 나에게 행한 일이 아닐 지라도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훌륭함”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고로 찬양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위해 선을 베풀어준 사람을 다른 사람 앞에서 칭찬하는 것이야 말로 인지상정(人之常情, Human Nature)입니다. 오히려 나에게 잘 해준 사람을 모함한다면 스스로도 엄청난 죄책감에 시달리고, 다른 사람의 신랄한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고 느낍니다. 그것이 양심(Conscience)이고 당연한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때 그 분의 행하신 일을 칭찬합니다. 목소리를 높여 그분이 나에게 해주신 일을 자랑합니다. 영어성경에 보니 “그의 모든 아름다운 행동들을 말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분명히 그 분은 나에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일을 행해주셨습니다.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십자가의 무서운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 높은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나를 참아주시고, 기다려주셨습니다. 더러운 나를 안아주셨습니다. 지금의 행복을 주셨습니다.
나의 삶 어느 것 하나 주님의 사랑 아닌 것이 있나요? 고로 당연히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붙들고 이야기 해주어야 합니다. 열변을 토해도 부족하잖아요.
누구에게 그렇게 힘주어 얘기하려면 주님과의 구체적인 사건이 있어야 됩니다. “막연히 그 분은 좋은 분이야” 하고 얘기하는 것은 아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분을 믿지 않는 사람도 그렇게 얘기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런 추상적인 찬양이 아니라 구체적인 찬양을 해야 합니다. “주님은 지난 겨울 내가 힘들 때 오셔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내 고민을 해결해 주셨어요.” “주님은 내게 얼마나 친절하신지 몰랐습니다.”
나의 찬양에 생동감이 없다는 것은 주님과의 관계가 생동감이 없다는 말입니다. 나의 찬양이 무언가 빠진 것 같은 것은 주님과의 관계가 추상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언제든지 주님과의 최근 러브스토리를 한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찬양의 가사 하나 하나가 내 고백이 되지 않을까요? 세상노래도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자기 이야기같이 생각되어진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찬양은 “너무나” 시적이지 않아도 됩니다. 오히려 우리의 찬양은 너무나 실제적(Real)이어야 합니다. 그 분이 내게 행하신 일들을 소리 높여 말하는 것이 바로 찬양(Praise)이기 때문입니다.
수채화아티스트/기도에세이스트/칼럼니스트 제임스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