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질문을 한 번도 받아보지 않은 분은 거의 없으실 것 같습니다.
사실은 엄마 아빠가 다 좋은데, 둘 중 하나로 대답하기를 은근히 강요(?)하는 질문자의 의도에 말려들어 어쩔 수 없이 한 분을 선택했던 기억을 갖고 계시는 교우님도 많으실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아이들은 “둘 다 좋아!”라고 씩씩하게 대답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드시 둘 중 하나만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사람의 책인가, 하나님의 말씀인가?”라는 질문에도 어느 한 쪽만 선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둘 중 하나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흑백논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이삼천년 전 근동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당시 그 지역의 언어로 쓴 ‘사람의 책’입니다.
하지만 깨어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각성된 체험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거룩한 경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서를 읽는 사람은, 먼저 성서가 ‘사람의 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종이와 문자의 집합으로 구성된 물리적 성서를 기록한 것은 ‘일차적으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살았던 ‘그 시대와 사회’라는 시공의 울타리 안에 갇혀서 살아가기에, 역사적 사실이나 우주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한계 내지는 오류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창세기 기자가 지구는 천체의 중심이고 움직이지 않으며, 그 주위를 태양을 비롯한 뭇별들이 떠다닌다고 “의심 없이” 믿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동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서가 ‘천동설’이라는 원시세계관 아래 기록되었다고 해서 성서의 가치가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과학적 사실’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찬란한 태양이 짙은 안개를 뚫고 저 하늘 위로 솟아올랐습니다.”라는 말은 신년벽두가 될 때마다 매스컴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태양이 떠오른 것이 아니라 지구의 자전으로 생긴 현상이기에 ‘과학의 언어’로 그렇게 말했다면 틀린 표현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과학의 언어’가 아니라 ‘삶의 언어’로 하는 말이기에 그 말에 시비를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처럼 과학적으로는 맞지 않지만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는 여전히 의미를 주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동의하실 수 있다면, “성서의 내용이 과학적으로는 틀릴 수 있다.”는 데에도 기꺼이 동의하셔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서에는 오류가 없다.”는 오래된 교리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사실은, 성서 기자가 하나님께 영적으로 사로잡힌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지식의 한계나 오류의 가능성을 완전히 넘어설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주요 교리를 만들어낸 사람들 역시 대부분 1500~2000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이기에 ‘그 시대의 세계관’ 안에서 생각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여 천체의 움직임이나 물리적 세계의 질서에 대한 이해는 오늘날 초등학생의 이해수준보다도 훨씬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남긴 연구 결과와 기록이 아무리 신중하고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과학적 사실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한계와 오류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처럼 성서가 ‘사람의 책’이기에 담겨있을 수밖에 없는 오류나 한계를 정직하게 인정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 한계와 오류를 돌파하여 정금과도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금광석을 용광로에 넣어 정련한 후에야 비로소 순금을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