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바람
몇개월 전, 신문을 통해 안타까운 소식을 접했습니다.
“중학교 성적이 석차 상위 2% 안에 들어야 입학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경북지역 자율형사립고에서 전교 1등도 했던 고교생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는 소식입니다. (한겨레신문, 2013.03.28.)
위의 기사를 보도한 신문은 4월 2일자 기사에서
“서울에서 일반 고등학교를 다니다 그만두는 학업중단 학생이 강남·서초·송파 등 강남 3구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3구의 학업중단 학생은 계속 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요구된다.”
는 내용의 기사도 내보냈습니다. 이 기사의 일부를 조금 더 소개하겠습니다.
“1일 입시업체 하늘교육이 2009~2011년 3년간 서울시내 일반 고교 학업중단자를 분석한 결과, 전체 학생 가운데 학업중단 학생이 차지하는 학업중단율은 강남구가 2.4%(1408명)로 1위를 기록했다. 서초구는 학업중단율이 2.3%(825명)로 2위였고, 송파구는 1.9%(1183명)로 공동 5위였다.”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공부와 성적에 대한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여 학업을 중단하거나 스스로 생을 접는 안타까운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언가 이루어내지 않으면 우리 삶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업적주의가 낳은 결과가 아닐까요?
제가 교직생활을 시작한 첫 해, 고입연합고사 성적 발표를 며칠 앞두고 목숨을 끊은 학생이 있었습니다.
벽제화장터에서 한 줌 재가 되어 나오는 기막힌 모습을 보며 대답할 수 없는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공부 때문에 네가 산 거냐? 네 인생을 위해 공부를 한 거냐?”
아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선생님들이, 부모님들이, 어른들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학생들이 친구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장난삼아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공부도 못하는 게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얼굴도 못생긴 게 왜 태어났니?”
사람을 외모와 성적으로 평가하는 세태에 짓눌린 자신들의 슬픈 현실을 억지웃음으로 푸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왜 사느냐고 묻는다면
“삶 자체의 가치 때문에 산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 여기서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향유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제 삶이 의미 있어지는 것이 아니구요.
“(좋은) 대학가기 위해 산다.”는 대답이 진실이라면 원하는 성적이 나오지 않을 경우 살고 싶지 않은 게 당연합니다.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야 내 인생이 가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별 볼일 없는 인생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학생에게는 입시 실패가 자살의 이유가 될 수 있겠지요.
학교공부가 재미있고 노력할수록 성적도 오르는 학생이라면 학업을 계속 하여 자신의 꿈도 이루고 사회에도 봉사하며 축복받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노력한다고 다 성적이 무한히 오르는 건 아닙니다.
한 학급에 30명의 학생이 있을 경우, 모두가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으로 산출하면 일등 하는 학생과 30등 하는 학생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노력을 해도 한계가 있고, 분명히 재능과 관심은 다른 분야에 있는데, 이 사회가 오로지 성적과 학벌로 사람을 평가하기에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하지만 성적은 오르지 않고 괴롭기만 하다면, 대학으로부터, 또한 성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아이들을 놓아주는 건 어떨까요?
이스라엘의 지혜서 탈무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능력을 비교하면 다 죽고 개성을 비교하면 다 산다.”
대학도, 돈도, 명예도, 결국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일 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우리 모두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사회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을까요?
성적 때문에 고민하며 학업에 대한 부담으로 힘들어하는 자녀를 두신 부모님께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들딸의 손을 잡고 “엄마 아빠에게 중요한 건 성적이 아니라 너 자신”이라고,
“네가 엄마의 아들로, 아빠의 딸로 이렇게 커가는 것 자체로 엄마 아빠는 기쁘고 행복하다.”
고 웃으며 말씀해 주십사 부탁드리고 싶은데, 그렇게 해주실 수 있겠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