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들바람
오늘날 일부 설교자들이 교회의 재산 증식과 증축을 위한 수단으로 자주 인용하여 우리 교우님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을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복도 백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 말씀이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에게 갈등을 주는 이유는 “신앙이 가정보다 우선한다.”는 전제를 지지한다는 데 있습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복음서에 기록된 이런 말씀들에 근거하여 우리 기독교는 “교회는 가정 뿐 아니라 민족이나 국가 등 그 어떤 조직체보다 우선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마가복음이 기록된 서기 70년 당시의 정황 아래에서 읽어야 합니다.
로마제국에 체계적으로 저항했던 유다민족의 독립운동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 복음서 기자가 예수님의 입을 빌어 표현한 대로 예루살렘 성전이 “돌(기초석) 위에 돌(건축물) 하나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유대 독립군이 최후의 저항을 벌이던 마사다 요새까지 점령되어 유다공동체 자체가 붕괴될 위기에 처한 극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공동체가 붕괴되면 그 공동체 내에서 시작된 예수운동 역시 공동체와 함께 궤멸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어떻게든 예수님의 가르침을 유지하고 계승하기 위해서는 개인이나 가정보다 예수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개인의 안락과 가정의 행복을 유보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던 애국지사들의 선택에 비견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극단의 선택이 극한상황에서는 아름다운 선택일 수 있지만, 평화의 시기에도 변함없이 강조되면 가정과 사회가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개인의 꿈과 공동체의 이상이 함께 존중받아야 평화롭고 건강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건 두말 할 나위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본문이 이런 특수한 상황의 산물임을 이해하지 않고 그냥 문자 그대로 읽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너무나 무모하고 맹목적이 되어 우리의 소중한 가정과 사회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히고 가슴 아픈 일은, 본문을 인용하는 설교자 중에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는 말씀에서 “가진 것을 다 팔아”라는 앞부분만 인용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뒷부분을 “교회를 위해 아낌없이 헌금하라.”는 논리로 바꾸어, 교회를 새로 건축하거나 부흥회를 열 때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교우님들에게 큰 부담을 안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살예살서’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록자의 의도와 당시의 사회적 정황을 이해하지 않고 무조건 문자 그대로 믿는 신앙이 이렇게 무모하고 위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 문자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문자우상숭배와 ‘기록된 예수’를 넘어서지 않으면 참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서 본문을 이용하여 무리한 헌금을 요구하거나 교우님들께 감당하기 어려운 희생을 요구하는 설교자는 거짓 목자입니다.
그런 자는 우리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기꾼일 뿐이니 잘 분별하여 교회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가정에 무리가 될 정도로 경제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교회도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교회입니다.
무엇보다 본문 말씀은 개인의 욕심에만 갇혀있지 말고, 다 함께 누리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말씀이지 개인의 행복 자체를 부정하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종교 조직에 휘둘려 신음하는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와 행복을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교우님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 교회, 교우님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교회들이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도록 채찍을 들어주십시오.
그래도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퇴출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 주십시오.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셨다”고 기록된 구절이라 하더라도 비판적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성서에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기록된 구절 중에서 실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그리 많지 않고, 전달자나 기록자, 또는 후대의 교회 공동체가 예수님의 입을 빌어 말한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뛰어난 혜안을 갖고 우리에게 천금 같은 가르침을 주셨지만, 예수님 역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에, 당신께서 사셨던 시대의 한계 뿐 아니라 개인의 편견이나 유한성에 갇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예수께서 편협하고 극단적인 생각의 결과로 그렇게 말한 것이라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넘어서기를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자 청년이 근심하며 돌아간 후에 본문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개인의 한계와 연약성을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걱정하는 제자들의 장탄식에 예수님은 이렇게 시원하게 답변해주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다.”
이 말씀을 저는 이렇게 읽습니다.
“부자가 재산을 내놓아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는 매우 어렵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 뜻과 힘을 합하면 정의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
종교 강요가 없는 세상과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는 한 젊은이의 말이 생각납니다.
“혼자 꾸는 꿈은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함께 꾸는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