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전 일화(三錢 逸話)
중국이 오늘날의 국가적 강성을 이룩하는데 크게 공헌한 세 과학자에 관한 이야기를 아래에서 소개한다.
첫 번째 인물 전학삼(錢學森=첸쉐선, 1911-2009)에 관한 이야기이다. 1950년 9월, 첸쉐선은 미국 부두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귀국하려다가 미국 이민국 직원에 의해 체포당해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미군 정보당국은 그가 어디로 가든지 간에 그의 두뇌는 5개 사단의 군대병력을 이끄는 것과 맞먹는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20세기 중국이 낳은 대표적인 항공우주공학 분야의 석학이자 중국 미사일의 아버지라 불리는 첸쉐선은, 한반도에서 6.25가 발발한 지 3개월 만에,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때와 동시에 미중 양국 간 과학두뇌 쟁탈전을 놓고 벌인 또 하나의 대결의 중심에 놓였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으로 한국전쟁이 끝난 지 2년여 세월이 지나간 1955년 10월, 중국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는 한국전 기간 중 포로로 잡아둔 미군 고위 장령 11명과 첸쉐선 1인을 맞교환하는데 모든 외교력을 총동원하여 성사시켰다. 첸쉐선은 중국을 떠난 지 20년 만에 마침내 중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MIT와 캘리포니아 공대에서 항공우주공학을 공부한 그는 떠날 때는 국민당 정부의 국비유학생이었지만, 돌아올 때는 국민당은 이미 타이완으로 패퇴하고 공산당이 중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안내로 마오쩌둥(모택동) 주석을 만난 자리에서 마오(毛) 주석은 그에게 새로운 중국건설에 동참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 그에게 최고의 예우를 다할 것을 지시하였다. 1956년 그가 중국과학원 역학연구소(中國科學院力學硏究所) 소장을 맡은 이래 줄곧 중국 자체의 미사일과 유도탄 개발에 혼신의 열정을 쏟아 부은 결과 마침내 중국은 현재 러시아 미국에 이은 우주미사일 개발의 선두 그룹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는 중국의 항공우주 산업발달에 혁혁하게 공헌하였고 그가 배출한 제자들은 현재 중국 각지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는 1980년대 이후 국무원 산하 국방과학기술위원회 부주석, 중국과학원 명예주석, 전국과학기술위원회 주임 등을 역임하면서 중국의 과학인재들을 이끌었다. 국무원은 그에게 중국국가발전에 기여한 크나큰 공로에 보답하여 국가최고 훈장을 수여하였고, 현재 전국적으로 그의 이름을 붙인 위성과 국가연구소 대학도서관들이 수두룩하다. 장쩌민(강택민) 후진타오(호금도) 원자바오(온가보) 총리 등 주석과 총리는 그가 사망하기 전 매년 은퇴한 그를 자택으로 방문하여 일생동안 그의 국가에 대한 공로를 치하하였다. 그는 2009년 12월 10일 향년 98세로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인물은 전위장(錢偉長=첸웨이창, 1912-2010)에 관한 일화이다. 첸웨이창은 현대 중국을 대표하는 물리학자이자 중국 역학(力學)과 응용수학의 대부로 불리는 과학자이다. 첸웨이창은 유명한 역사학자 전목(錢穆=첸무)의 조카이다. 그는 고향 장수(江蘇) 우시(無錫)에서 고등학교를 졸업, 1931년 초 베이징의 칭화(靑華) 대학 문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였다. 대학1학년이던 1931년 가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한 9.18사변 당시 중국은 탱크가 한 대도 없어 그냥 일본에 만주를 내주게 되었다는 소식에 자극을 받아 문과에서 이과로 전과할 결심을 하였다.
물리학과 교수가 그에게 1년 동안 시간을 주고 물리학 기초과목 시험을 쳐서 70점을 받으면 입학을 허락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독학으로 물리학을 공부하여 일 년 후 그는 물리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원 연구시절인 1937년에 노구교 사건(7.7사변)을 일으킨 일본군이 베이징을 함락시킴으로써 촉발된 중일 간 전면전이 터지자 베이징에서는 더 이상 연구를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베이징대학 청화대학과 텐진(천진)의 난카이 대학 등 3개 대학은 중국 최 서남단인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곤명)에서 서남연합대학이란 이름으로 대학을 복교시켰고, 그는 거기서 연구를 계속하였다.
1940년에 정부에서 선발하는 관비 장학생모집 시험에 합격한 그는 캐나다 터론토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의 물리학 박사학위 논문은 아인슈타인으로부터 극도의 호평을 받았으며 일약 그는 북미 과학계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 소기의 학업목적을 이루고 1946년에 귀국한 그는 청화대학과 베이징 대학에서 가르치던 중, 1948년 당시 미국에 체재하던 첸쉐선이 그를 미국의 분사추진 연구소로 초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 대한 충성서약 거부로 끝내 미국입국 비자를 받지 못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러 나라의 많은 천재적 과학자들에게 미국의 뛰어난 연구 환경과 높은 대우는 동경하는 바이지만, 그의 조국에 대한 애국심은 그로 하여금 미국에 충성하기를 거부하도록 하였다.
미국으로 가는 대신 그는 베이징 대학에 부임하여 중국 최초의 역학과를 설립하여 가르치며 연구와 집필에 전념하였다. 그의 애국 충정은 많은 중국인들이 임종 때까지 그를 추앙하는 바이기도 하였으나, 중도에 그는 공산당이 일으킨 정치운동에 휩쓸려 시달리는 고통도 겪어야만 하였다. 즉 1957년 초에 불어 닥치기 시작한 ‘반 우파(反右派)’ 투쟁이 그것이었다. 그가 과학지에 발표한 문장은 우파 자본주의 색체가 짙다는 이유로 그는 우파 지식인으로 몰리게 되었고, 모택동의 지시로 교수직에서 쫓겨났고 농촌으로 추방되어 노동개조에 처해졌다. 뒤이은 문화대혁명 기간 중인 1968년에서 1971년 사이에 그는 베이징의 철강공장에서 일반 노동자로서 철강생산 현장으로 내몰리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1972년 세계과학자 협회가 중국과학자들을 초청하여 유럽과 미국을 방문할 기회가 주어졌을 때 첸웨이창도 초청명단에 이름이 들었다. 그러나 중국대표단 단장은 그의 정치적 망명을 염려한 나머지 단장직을 고사하였다. 새로 바뀐 단장도 여전히 그의 서구망명을 염려하였다. 그래서 그의 방문단 참가 통보는 출국하는 날까지 비밀에 부쳐졌고, 출국하는 날 아침에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는 그를 집무실로 불러 출국통보를 하였다. 철강공장의 낡은 노동자 복장으로 들어선 그에게 저우언라이 총리는 자신의 양복과 구두를 내주었다.
1979년 개혁개방의 시대를 연 등소평 집권기에 그동안 그를 옥죄었던 우파 지식인분자의 멍에를 벗을 수가 있었고, 이듬해 1980년에는 중국과학원 위원에 피선되어 연구직으로 복귀하였다. 일찍이 그의 능력을 알아본 등소평은 그를 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에 임명하여 연구와 병행하여 행정직을 부여하였다. 그 후 그는 상하이 공업대학 총장, 민주동맹 부주석 겸 명예주석, 홍콩과 마카오 특별행정구역 기본법 기초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94년에는 상하이 대학 총장, 1997년에는 남경대학 총장 및 남경 우주항공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다.
1980년대 이후 역학과 응용수학 분야에서 그의 이름을 딴 다수의 이론과 방정식이 국제학계로부터 공인받았다. 국무원 총리를 지낸 주룽지(朱鎔基=주용기)는 청화대학과 대학원 시절 그의 제자였으며, 총리에서 물러난 후에도 자주 그를 방문하고 위로하였다. 그가 사망하자 중국정부는 그에게 국가최고의 예우로 장례식을 치렀다.
세 번째 인물은 전삼강(錢三强=첸산창, 1913-1992)에 관한 일화이다. 첸산창은 중국의 저명한 핵물리학자로 중국 원자탄의 대부라 불리는 사람이다. 첸산창은 근대 중국의 저명한 언어문자 학자인 첸센퉁(錢玄同=전현동)의 아들이다. 첸센퉁은 근대 중국의 저명 학자들이 집단적으로 일으킨 ‘고사변(古史辨) 운동’을 주도한 학자였다. ‘고사변 운동’이란 중국의 근대 신문화운동(5.4운동)의 학풍으로, 역사학자 언어학자 철학자들이 총망라 되어 중국고대사에 대한 총체적인 자각과 비판적인 인식을 통하여 중국사학의 현대적 재정립을 지향한 신 학풍을 말한다.
첸산창은 역시 물리학자인 그의 부인 허쩌후이(何澤慧=하택혜)와 함께 유럽에서는 중국의 퀴리부부로 알려져 있다. 첸산창은 베이징 대학 학부와 칭화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후, 1937년 ‘중불 교육기금회’에서 선발하는 관비유학생 시험에 합격하여 프랑스 파리대학 퀴리연구소로 유학을 가서 퀴리부인의 장녀인 이레나 여사의 제자가 되었다. 1940년에 프랑스 국가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핵융합연구소 연구원으로 종사하면서 핵분열의 새로운 이론에 대한 연구업적으로 프랑스 정부가 수여한 국가 물리학상을 받았다.
1948년 귀국한 지 일 년이 지난 1949년 1월, 장제스의 애장(愛將)으로 베이징 위수사령관이던 푸쭤이(傅作毅=부작의)의 국민당 배반으로 베이징이 인민해방군에 의해 접수되었고 공산당이 베이징에 무혈 입성하였다. 예젠잉(葉劍英=섭검영) 원수가 첸산창에게 당시 미화 5만 달러를 그에게 주면서 프랑스로 가서 원자로 관련 자료와 설비를 구입해 오도록 임명하였다. 1956년 그는 과학자의 신분으로 국무원 공업부 부부장에 임명되어 원자폭탄 제조의 실질적 책임을 맡았다.
스탈린 사후 후르시초프 등장과 스탈린 격하운동으로 촉발된 모택동과 후르시초프의 관계는 악화일로에 놓였고, 1959년 소련 과학자들이 중국에서 모두 철수하였다. 소련과학자들은 ‘중국이 원자탄을 보유하려면 앞으로 20년은 더 걸릴 것이다’라는 모욕적인 언사를 하면서 떠났다. 당시 녜룽전(聶榮臻=섭영진) 부총리는 첸산창에게 원자폭탄 개발에 관련한 인력과 자금사용의 집행 전권을 위임한 결과, 소련과학자들이 중국을 떠난 지 5년 만인 1964년 10월 17일에 중국은 핵실험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첸산창은 1957년 ‘반 우파’ 투쟁 당시 그가 발표한 과학자 우대 정책에 관한 논문으로 말미암아 우파 지식인으로 몰려 정치적 박해를 받았고, 핵실험이 성공한 지 3일 후에 그는 허난성(河南省)의 농촌으로 하방(下放, 강제추방) 당하여 노동개조에 처해지는 수모를 겪었다. 문화대혁명 기간(1966-1976)에는 반 우파의 전력 때문에 또다시 많은 고초를 겪었으나, 만년에는 국가과학기술협회 부주석, 중국물리학회 이사장, 중국 핵물리학회 이사장 등의 직위를 누리며 명예를 회복하였다. 그의 일생은 과학자로서 영광과 치욕으로 점철되었으나 결국 명예가 회복되었다. 국무원은 국경 50주년(1999년) 기념행사에 맞추어 그가 개발한 성과인 ‘두 개의 핵탄과 한 개의 위성’(兩彈一星=양탄일성)을 기리기 위하여 순금 515그램으로 ‘양탄일성’ 훈장을 제작하여 그에게 추서하였다.
중국정부가 제1차 ‘국가과학발전 12년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당시 국무원 총리 저우언라이(주은래)는 위 3인의 과학자 첸쉐선, 첸웨이창, 첸산창을 중국을 빛낸 ‘산첸(3錢=3전)’으로 불렀고, 그들의 공적을 찬양한 후로 이들 3인은 ‘산첸’으로 불리며 중국과학의 대부로 자리매김하였다. “물리학에는 국적이 없지만 물리학자에게는 국적이 없을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한 사람은 퀴리 부처(夫妻)이다. 간단한 말이지만 자기 분야에서 높은 경지에 오른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과학자들은 명심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2012년 12월 12일, 북한은 광명성(光明星) 3호를 쏘아 올려 지구궤도에 진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장거리 우주로켓인지 미사일인지 왈가왈부 중이다. 그것이 탄두를 실어 대륙 간을 날아가는 미사일(ICBM)인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 세계에서 10번째로 지구궤도 진입을 성공시킨 업적이라고 한다. 남북한이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분단되어 갈라서지 않았다면, 그리고 북한 동포들의 민생고 걱정 없이 개발한 것이라면 같은 민족으로서 찬양할만한 일이다.
우리나라에도 중국의 ‘3전’씨와 같은 천재적 과학자들은 과거에 있었다. 또한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뛰어난 과학자들을 알아본 지도자도 있었다. 천리마(千里馬)를 알아보는 백락(伯樂)이 있었지만, 국제정치의 냉혹한 힘의 논리에 의해 우리는 우주로켓 개발에 박차를 가하지 못하고 있는 오늘의 실정이다.
‘백곰’으로 명명된 한국산 지대공 미사일을 자체적으로 개발하여 발사 성공시킨 것이 나의 대학 초년이던 1978년의 일로 기억한다. 그 때 밤낮없이 ‘자주국방’을 외치던 박정희 대통령은 비명에 운명하였다. 그 후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자주국방’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대통령이 없다. 주변 강대국들과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과 위성개발 관련 뉴스를 접할 때마다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게 된다. ‘천리마는 항상 있으나 백락은 항상 있지 않음(千里馬常有 伯樂不常在)’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박 인 수
2013. 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