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과 자공(子貢)
무릇 인류의 큰 스승 뒤에는 큰 제자들이 있었다. 공자에게도 많은 제자들이 있었으며 석가모니에게도 많은 제자들이 있었으며 예수님에게도 12사도가 있었다. 제자들의 역할이 어떠하였는가에 따라 스승의 발자취와 남긴 업적이 커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스승이 돌아가신 후 제자들의 활약이 별로 돋보이지 못하면 스승도 별 볼일 없이 되는 경우도 있다.
공자와 석가와 예수는 훌륭한 제자를 많이 두었다. 공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로 당시에는 인기가 공자를 앞질렀던 묵자(墨子)나 추연(鄒衍) 같은 이들에게는 똑똑한 제자가 별로 없었던 탓에 그들의 업적은 사후에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성경에 요한이라는 이름은 여러 명이 있다. 세례자 요한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신 분이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은 공관(共觀) 복음서에 모두 보인다. 요한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부터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군중을 향해 외치며 세례를 베풀던 분이었다.
요한은 말한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다. 나는 그 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 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이렇게 설파하고 다니던 요한이 예수님에게도 물로 세례를 베풀게 된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주동적으로 갈릴래아에서 요르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서 부탁하신 것이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요한은 세례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도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의 아들로 오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면서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 형상으로 내려오면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하늘의 소리가 들려왔다고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다.
성경기록에 나타난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관계는 <논어(論語)>에서 보이는 공자와 제자인 자공(子貢)의 일화를 많이 연상하게 한다. 자공의 성은 단목(端木)이고 이름은 사(賜)이다. 춘추시대 위(衛)나라 사람으로서 공자보다 31세 연하였다. 자공은 안연 자로 등과 함께 논어에 자주 등장하는 대표적인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공자의 많은 제자들 중 보기 드물게 경제적 재능을 보인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스승이신 공자를 따르던 일행이 여러 나라를 주유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스폰서해준 인물이다. 그것뿐만 아니고 자공은 언어재주가 뛰어나 논어에 담겨진 그의 표현을 일어보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그는 공자가 제자들에게 평소 가장 강조한 실무적 행정능력도 겸비하여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도 가졌으니, 어쩌면 내심으로 공자의 가장 마음에 드는(?) 이상적인 제자라 할만하다.
공자와 자공과의 대화 한 토막을 들어보자.
“선생님, 사람이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겠습니까?(貧而無諂, 富而無驕, 何如?)”라고 묻자, 공자는 대답하기를 “나쁘지는 않지만, 가난하면서도 즐거워 할 줄 알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차릴 줄 아는 것만은 못하다.(未若, 貧而好樂, 富而好禮者也)”라고 말해, 자공이 부유해 진후에도 거만해지지 않도록 일깨워 주었다.
그러자 자공은 “마치 옥돌을 끊는 듯이 하고(切), 가는 듯이(磋) 하고, 쪼는 듯이(琢)하고, 닦는 듯이(磨) 하라는 말씀이시군요.”라며 <시경(詩經)> 출처의 유명한 ‘절차탁마’ 구절을 인용하여 화답하였다. 공자는 무릎을 탁 치면서 “사(賜)야, 내 이제야 너와 더불어 시(詩)를 얘기할 수 있겠구나!(賜也, 始可與言詩已矣)”라고 정겹게 자공의 이름을 부르면서 말하였다.
세례를 받으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서 세례를 베푸셨다. 요한도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과 다른 지역에서 여전히 세례를 주고 있었다. 요한이 아직 감옥에 갇히기 전의 일이라고 성경에서는 기록하고 있는데, 제자들 중에는 유다인들과의 사이에 정결례를 두고 다툼이 있었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 분도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 분에게로 가고 있습니다.”라고 고해 바쳤다.
그러자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에게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가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 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그 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라고 대답하여 요한은 예수님 앞에서 한없이 자기를 낮추었다.
공자가 죽고 나자 제자들은 각지로 흩어졌고, 또한 각자 제자들을 모아 나름대로 학파를 형성해 갔다. 공자를 직접 대면하지 못 했던 다음세대 제자들은 현재의 스승이 공자보다 오히려 위대함을 말하는 이가 있었다. 자공 문하의 제자들 중에도 자공이 공자보다 뛰어남을 말하는 이가 있었다.
그 중 진자금(陳子禽)이라는 제자가 자공이 공자보다 훌륭함을 말하였다. 이에 자공은 “내가 스승에 미칠 수 없음은, 사다리를 놓아 하늘에 오를 수 없음과 마찬가지이다.(夫子之不可及也, 猶天之不可階而升也)”라고 말하였다.
조정대신들 중에서도 공자 사후 그를 헐뜯는 이가 있었다. 그 중 숙손무숙(叔孫武叔)이라는 대부가 자공이 공자보다 뛰어남을 공공연하게 이야기 하고 다녔다. 이에 자공은 말하였다.
“스승님과 나를 집 담에 비유컨대, 저의 집 담은 어깨높이 밖에 되지 않아 밖에서도 안을 한 눈에 다 들여다 볼 수 있지만, 스승님의 집 담은 몇 길이나 높아 대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종묘의 아름다움이나 백관이 늘어선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譬諸宮薔, 賜之薔也及肩, 窺見室家之好, 夫子之薔數仞, 不得其門而入, 不見宗廟之美百官之富)”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자공은 과연 상대를 봐 가면서 적절한 비유를 적절한 장소에서 들 줄 아는, 공문(孔門) 중에서 탁월한 언어능력과 재주를 가진 제자임에 틀림없다. 부유한 사람이면서도 평소 겸손하기를 가르친 공자의 참된 제자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남을 높이기 위하여 자기를 낮추는 것은 말은 쉽지만, 실제로 아무나 쉽게 흉내를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자공이 오늘날에 이르도록 성경과 논어에 기록이 남아 전해져 오는 것도 다 그런 까닭이 있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요즈음 세상에서는 남들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낮추면 스스로 바보가 되는 줄로 착각하고 낮추어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내남없이 모두 그러할테지만, 실은 낮춤으로 높아지는 것이다. 노자(老子)가 말한 ‘뒤로 물러나고자 하면 떠밀려서 앞서게 되고, 임하고 싶지 않으나 추대되어지는(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이치를 알아야 한다. 우리도 평소에 얼마나 자기를 낮추고 사는지 한번 되돌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박 인 수
2012. 1. 29
(원문, 천주교 오클랜드 한인 성가정 성당 월보 2010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