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시는 아버지 / 산들바람

by 나누리 posted Jun 2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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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리시는 아버지

                                                                                                                                              산들바람

오늘은 주님께서 들려주신 탕자의 비유, 즉 집 떠난 둘째 아들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비유를 함께 나누며 ‘오늘의 우리 한국 교회, 이대로 좋은지’ 돌아보고자 합니다.


                           1.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시는 아버지

누가복음 15장에 나타난 이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에 내용을 잘 모르시는 교우님을 위해 요점만 간략히 정리하겠습니다.

어느 날 가출을 결심한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졸라 상속받을 재산 중 절반을 받아내 집을 떠났습니다.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모두 탕진한 아들은 뒤늦은 후회와 함께 그리운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아버지께서 다시 받아주실지 확신하지 못한 탕자는 고심 끝에 종으로라도 일하겠다고 다짐했지만, 집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던 아버지는 멀리서 그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맨 발로 뛰어나가 끌어안으며 성대한 잔치로 환영해주었습니다.


 이야기는 아마도 우리 한국 교회 강단에서 가장 많이 선포되는 말씀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탕자의 비유’라고 알려져 있지만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라고 해야 더 적절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저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라는 표현이 본문의 뜻을 이해하는데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을 가려내자면, 둘째 아들을 주인공으로 보기보다 두 아들을 무한히 기다리고 용서하시는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탕자의 비유’로만 이해하면 둘째 아들과 아버지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고, 큰아들은 조연의 역할로 그치게 되며 이야기를 듣는 분들의 관심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기다리는 아버지’로 이해하고 읽으면 작은 아들보다 오히려 큰 아들이 갖고 있는 문제가 더욱 심각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았던 이야기가 큰 아들의 불평과 항의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성경에 기록된 큰 아들의 항의 내용입니다.


밭에 나가 있던 큰아들이 돌아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주시다니요!” 하고 투덜거렸다. (누가복음 15:25~30, 공동번역)


아들의 항의를 받은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그를 달래주었습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누가복음 15:31~32)


듣기에 따라 공평하지 못한 아버지의 궁색한 변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버지의 이 말씀이 우리 기독교 복음을 한 마디로 정리한 명쾌한 선언문처럼 들립니다.
 

“하나님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가리지 않고 햇볕과 비를 내려주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절대무한의 사랑과 용서를 나타내는 간단명료하면서도 완벽한 선언으로 저에게는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들은 큰아들의 반응이 나타나지 않은 채로 이야기가 중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의 가출 문제는 그의 몸과 마음이 다 돌아옴으로 해결되었지만, 큰 아들은 몸만 아버지와 함께 있을 뿐 마음은 아버지를 떠나있는데 그의 마음이 어디로 향할 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기다리는 아버지는 오래 참고 기다려서 작은 아들을 되찾았으나 이제는 큰 아들이 돌아오기를 다시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큰아들은 결국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될까요?
 

저와 함께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고민하시는 교우님들이 계시기에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믿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2. 큰 아들의 가출


그러면 왜 큰아들은 동생의 돌아옴을 아버지와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주지 못했을까요? 그가 보기에는, 아버지의 처사가 매우 불공평했기 때문입니다.


큰아들은 가출한 적도 없고 아버지의 재산을 팔아먹는 짓도 하지 않았으며,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지 않기 위해 애썼습니다. 반면에 동생은 재산의 절반을 가지고 가출한 문제아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자신에게 해 준 것이 별로 없는데 반해 재산을 날리고 거지꼴로 돌아온 동생에게는 지난 잘못은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환대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이야기에서 큰아들을 등장시킨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예수께서 이 비유 말씀을 하시면서 진정으로 새겨듣기를 원하는 대상은 둘째 아들보다 큰아들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 그러니까 겉으로는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으나 안에는 용서 없는 이기심으로 가득 찬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아니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했고, 거룩한 삶을 사는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총애를 받기에 합당한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을 떠나 제멋대로 살아가는 죄인들과 이방인들은 그에 합당한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과 가르침은 그들의 신앙을 송두리째 뒤흔들었습니다.
여인들과 이방인, 죄인 가릴 것 없이 아무하고나 어울리고, 죄에 찌든 그들이 오히려 자기들보다 더 옳고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고 독설을 퍼붓는 예수님을 그들은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습니다.


자기들은 평생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왔는데, 실컷 죄 짓고 살다가 뒤늦게 회개한답시고 예수와 어울리는 파렴치한 사람들도 용서할 수 없지만, 그들과 어울려 희희락락하는 예수는 더더욱 용서할 수 없는 악독한 자요 유대 공동체 신앙의 근간을 뒤흔드는 이단자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를 중시하는 사람들과 조건 없이 모든 생명을 하늘 아버지의 존귀한 딸 아들로 품으시는 예수님의 시각 차이는 그토록 컸고 메우기 어려운 골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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