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중심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기독교 사영리(四靈理) / 한인철 교수

by 나누리 posted Jun 0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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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을 중심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기독교 사영리(四靈理) 

                                                                                                                                                        한 인 철        연세대학교   교목실장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삶의 부재’에 있다고 본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기독교는 본래 예수의 가르침과 삶으로부터 발생되었지만, 오늘의 한국 기독교는 더 이상 예수의 가르침이나 삶에 관심하지도 않고, 더욱이 이를 계승하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그 동안 한국 기독교의 신앙체계를 대변해 온 사영리(四靈理) 가 그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가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기 위한 한 방편으로, ‘삶을 중심으로 다시 생각해보는 기독교 사영리’라는 주제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사영리(四靈理) 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참 삶의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 길치 인간
2)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할 참 삶의 길을 가리켜주시는 분이시다 ==> 길잡이 하나님
3) 예수는 우리가 가야할 참 삶의 길을 앞 서 가신 분이시다 ==> 선생 예수
4)기독교인은 예수를 벗 삼아 예수와 같은 길 가는 사람들이다 ==> 길벗 기독교인


I. 우리는 참 삶의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 길치 인간

1. 사람들은, 그 차이를 무론하고, 어느 정도 공통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산다.

2.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는 대체로 재물, 권력, 명예로 대변되는 세상적인 가치이다.

3. 사람들은 이러한 세상적인 가치를 소유하게 되었을 때 성공했다고 하고, 또한 행복하다고 한다. 최근 한국인의 최고의 덕담은 ‘부자되세요’라는 말인데, 이 말 속에는 한국 사람들 누구나가 추구하는 세속적인 가치 전체가 용해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4. 사람들이 재물, 권력, 명예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한, 그것들은 필요하고 그것 없이 살기는 어렵다.

5. 그러나 재물, 권력, 명예에 집착하여,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이웃을 짓밟고, 자연을 파괴하게 되면, 재물, 권력, 명예는 우리에게 우상이 될 수 있고, 참 삶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 사탄이 될 수 있다.

6.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이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결국은 어느 하나를 더 사랑하게 되고, 다른 하나는 포기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사람들은 대개 재물을 택하고, 하나님은 포기한다.

7. 두 주인을 섬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한국의 기독교인들 속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의 상당수 기독교인들은 세상적인 가치에 대한 욕망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예수를 믿으려는 경향이 있고, 한국의 교회는 이러한 교인들의 요구를 예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에 대한 우리들의 지금까지의 관점이 잘못되었다는 자각 속에서, 새로운 가치관에 입각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II.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 할 참 삶의 길을 가리켜주시는 분이시다. ==> 길잡이 하나님

1. 하나님은 우리가 가야 할 참 삶의 길,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을 가리켜주시는 분이다.

2. 그런데 사람들의 눈에는 이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눈에 이상한 비늘이 덮혀 있기 때문이다.

3. 사람들의 눈에 덮혀 있는 비늘은 다름 아닌,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집착이다.

4.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참 삶의 길을 발견하려면, 먼저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5. 그런데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대개의 경우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혹은 그와 유사한 어떤 경험이 있고나서야, 비로소 재물과 권력과 명예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게 되고, 이를 지푸라기처럼 여기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6. 그러나 세상적인 가치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참 삶의 길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저절로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사이에는 또 한 번 건너야 하는 큰 강이 있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참 삶의 길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이미 가지고 있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조차도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생명조차 포기할 수 있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궁극에 가서는 재물과 하나님은 동시에 섬길 수 없고, 결국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8.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지금까지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궁극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이것을 얻기 위해 하나님도 인간도 자연도 모두 저버렸던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가치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포기할 수 있는,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생명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으로 철저히 변화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전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III. 예수는 우리가 가야 할 참 삶의 길을 앞 서 가신 분이시다 ==> 선생 예수

1. 예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이 참으로 사는 길이라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의 요체라고 말할 수 있다.

2.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길이 참으로 사는 길이라고 가르치신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길을 따라 앞 서 사신 분이다. 예수는 다른 사람에게 가르친 대로, 자신이 앞장서서 그렇게 살았다.
특별히 생명의 위협이 있는 순간에도, 예수는 자신의 삶을 굽히지 않고, 자신이 가르친 그대로 살았다.
예수는 참다운 의미에서 선생(先生)이었다.

3. 그러면 예수는 하나님과 같다는 삼위일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예수는 최소한 하나님의 아들, 더 나아가면 하나님 자신이라는 이 고백은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만약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라면, 예수가 선생이라는 말과는 모순이 되지 않겠는가?

4.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삼위일체의 성서적 근거는 오직 요한복음의 두 구절,
즉 10장 30절의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는 말과,
14장 9절의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사람이다”라는 구절뿐이다.

5. 이 두 구절이 예수를 하나님과 동일시할 수 있는 근거이면서, 동시에 예수를 선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을까?
그래서 예수를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과 예수를 선생으로 이해하는 것이 같은 고백이 될 수는 없을까?

6. 예수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었다. 예수에게 하나님은 매순간 그의 삶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근원이었다. 예수와 하나님은 예수의 삶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삶을 깊이 들여다 본 사람은, 예수의 삶 속에서 예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래서 예수를 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본 것과 다름없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적 고백은, 예수는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참 삶의 길을 걸어가신 분이라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의미에서 이 고백은 예수가 참 삶의 길을 앞서 살아내셨다는 고백과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고백과 예수는 선생이라는 고백은 동일한 고백의 서로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IV. 기독교인은 예수를 벗 삼아 예수와 같은 길 가는 사람들이다 ==> 길벗 기독교인

1.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앞 서 살아낸 삶을 우리도 살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기독교인의 대답은 항상 부정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이고, 우리는 죄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와 우리 사이에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2. 기독교인은 ‘예수는 하나님이고 우리는 죄인’이라는 교리적 이유를 갖고, 우리가 예수의 삶을 살아낼 수 없는 이유를 대고 있지만, 사실 그 저변에는 보다 근원적인 인간적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는 예수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올바른 삶이었고, 또 그러한 예수의 삶을 우리가 살아낼 수 있다손 치더라도, 나는 솔직히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포기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뜻을 포기하고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갖고 사는 것을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3. 이제 우리는 안다. 예수가 앞서 살아낸 삶은 우리도 충분히 살아낼 수 있는 삶이지만, 우리는 솔직히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딜렘마가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예수와 우리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4. 그렇다면 기독교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한마디로, 기독교인은 예수를 평생의 벗으로 삼아, 예수와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다.
달리 말하면, 기독교인은 근본적으로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얻는 것에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을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사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위배될 때에는 언제든지 재물과 권력과 명예를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사람이다.

5. 이러한 기독교인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대개 이 질문은 기독교인으로서 제 길을 가고 있지 못한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묻는다. 그런데 이 질문이 예측하는 대답과는 달리, 세상에는 이미 예수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많다. 우리가 예수의 길벗으로 살지 못할 때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지만, 우리가 예수의 길벗으로 사는 순간, 그 사람들은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과연 예수의 길벗으로, 평생 예수와 같은 길 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여기에 기꺼이 ‘예’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가히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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