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두얼굴 / 산들바람

by 나누리 posted May 1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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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두 얼굴

                                                                                                    산들바람

신약성서 마태복음 25장에는 이른바 ‘최후심판’에 대한 특기할만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 날에 ‘사람의 아들’이 천사들을 거느리고 영광스런 보좌에 앉아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을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오른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고, 왼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악마를 가두기 위해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심판을 통해 사람이 갈 수 있는 세계는 극과 극을 달리는 두 세계 뿐, 중간 지점에 대한 언급이나 암시는 없다.

 

심판의 기준도 매우 단순하고 명확하다. ‘사람의 아들’이 헐벗고 굶주렸을 때 그를 도와준 사람들은 모두 준비된 나라를 상속받고, 그를 외면한 사람들은 모두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른바 ‘천국과 지옥’이 되겠다. 이에 대한 본문 구절을 자세히 들어보자.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마태오 25:34~36, 공동번역)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마태오 25:41~43, 공동번역)

 

하지만 심판의 내용이 발표되자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이나 왼편에 있는 사람들 모두 판결의 이유에 대해 납득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절대심판권을 쥐고 왕(임금)의 자리에 앉은 ‘사람의 아들’에게 묻는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을 도와드렸습니까?”,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을 모른 체하고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이에 대해 ‘사람의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웬만큼 신앙생활을 한 그리스도인 중에 이 비유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는 해석자에 따라 매우 완고한 교리를 지지해주는 근거로 이해되기도 하고, 따뜻한 인류애를 가르쳐주는 말씀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본문이 보수 개신교 설교자에 의해 선포될 경우, 사람들이 죽은 후에 가야 할 곳은 천국과 지옥 오직 둘 중 하나 밖에 없다는 (즉 중간 단계는 없다는) 배타적 교리를 지지하는 결정적 근거로 종종 해석된다. 또한 심판의 기준 역시 오직 한가지 기준 밖에 없다는 (주님을 영접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라는) 독선적 흑백논리를 지지하는 근거로 해석된다.

 

하지만 똑같은 이 본문이 진보 기독교 설교자에 의해 선포될 때는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 예수께서 본문 말씀을 주신 중심 의도는 교리적인 재료를 제공하려는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춥고 배고픈 이웃을 섬기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따뜻한 휴머니즘을 가르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사람의 아들’이 내리는 심판이나,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이 가게 되는 영원한 나라, 왼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가게 되는 영원한 불 등의 비유는 모두 지극한 이웃사랑을 가르치는 데 필요한 극적 배경일 뿐, 그것들 하나하나를 미래에 실제 이루어질 ‘사실의 언어’로 이해하는 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 진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이처럼 같은 성서 본문에 대해 매우 다르게 해석하기는 하지만, 보수건 진보건 본문을 대하는 해석자들의 공통점은 철저하게 본문을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본문 자체의 권위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보수적인 해석자는 물론 진보적인 해석자도 성서의 본문 자체의 권위에 의혹을 제기하거나 비판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심지어 성서비평학을 통해 본문을 파헤치는 학자들조차도 결국은 해체한 본문을 다시 조합하여 보다 합리적이고 현대인이 받아들일만한 근사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성서 자체의 권위에 도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성서의 권위에 대한 최종 승복, 이것은 보수건 진보건 기독교 신앙인들의 공통분모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성서는 신의 말씀’이라는 전제에 매여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는 점에서, 똑같이 자유로운 사고를 제약받는 학문적 장애인이라고 할 수 있다. 보수 기독교인이 사납고 편협하며 배타적인 교리에 매여 본문을 해석하는 것처럼, 소위 열려있다는 진보 기독교인도 2천 년 전에 편찬된 성서의 권위에 굴복하여 자유롭게 사유하지 못한 채 본문에 갇혀버리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성서가 진정 현대인에게 의미를 가지려면, 경전의 권위에 해석자들이 구속되지 말아야 한다. ‘성서는 신의 말씀’이라는 전제 아래 해석하면 본문을 솔직하게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냥 아무 전제 없이 고문서, 고대 기록을 연구하는 학자들처럼 전제 없이 객관적으로 본문을 비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본문에는, 보수와 진보가 해석하는 두 가지 요소가 모두 들어있다. 2천 년 전 당시 사람들의 시각이 고스란히 담겨있기에, 심오한 이웃 사랑의 정신과 함께 그들이 갖고 있는 원시적이고 유아적인 흑백 논리가 함께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원석을 용광로에 녹여 금을 뽑아내듯이, text뿐 아니라 성서 본문이 기록된 역사적 배경, 저자의 의도 등 context를 충분히 연구한 후에, text와 context를 우리의 이성과 판단력이라는 용광로에 함께 넣어 녹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정금을 얻은 후에는 불순물을 버려야 한다.

 

해석자가 성서의 권위에 구속되지 말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수학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피타고라스와 비교해도, 오늘날 평범한 수학교사가 알고 있는 수학 지식에 대한 총량은 그보다 훨씬 더 많다. 피타고라스가 당대에는 뛰어난 석학이었지만, 지난 2500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그의 후예들이 만들어낸 지식의 진화와 그것이 쌓여진 결과의 총합은 그 옛날 피타고라스와 동시대 사람들이 발견해낸 수학 원리와 지식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롭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동의할 수 있는 이런 관점이 종교의 영역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있을까? 아무리 기독교의 ‘성서’라도 그것은 2000년 전에 정립된 지식체계일 뿐이다. 현대 과학과 지식체계에 의해 걸러져,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가려내야 마땅하다. 그것은 다른 종교의 ‘성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굳이 기독교의 경전을 ‘기독교 성서’라고 말하는 이유는 기독교 경전만 ‘성서’라고 말하는 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 경전 역시 ‘기독교 성서’ 못지않게 ‘성서’, 즉 거룩한 책이다.)

 

“성서는 인간의 책인가, 하나님의 말씀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다. 둘 중 하나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흑백논리가 아닐까? 성서는 사람이 쓴 사람의 책이다. 하지만 깨어있는 신의 사람이 신과 만나 각성된 체험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사람의 책’임을 먼저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성서가 더 가치를 발할 뿐 아니라 현대인에게 여전히 유용하며 지혜를 밝혀주는 책으로 남을 수 있다.

 

기독교 성서가 여전히 하느님의 말씀을 담은 거룩한 책으로 인정받으려면, 성서가 두 얼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성서는 천사의 얼굴도 갖고 있지만, 악마의 얼굴도 함께 갖고 있다. 기독교 성서가 갖고 있는 악마성을 부정하면 기독교 성서는 계속 구성원들을 암흑 속에 가두는 악마의 책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 악마의 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힘들게 했는지는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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