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이 되어버린 ‘예수는 그리스도’ / 정연복

by 나누리 posted Aug 0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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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문이 되어버린 ‘예수는 그리스도’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 자랑스러운 고백의 전통에는 이제는 정녕 폐기처분되어야 할 불순물도 많이 섞여 있다.
교회가 세상에 어엿하게 자리를 잡고 세상 권력자들과 야합하는 과정에서 이 고백의 최초의 의미와는 상반되는 왜곡되고 뒤틀린 요소들이 하나 둘 끼어들게 되었다.

목숨 걸고 해야 했던 이 고백이 교회사의 어느 순간 앵무새처럼 주절거리는 주문으로 변질되면서 이 고백 본래의 생명적·해방적·전복적 성격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대신 반생명적·억압적·체제 유지적 성격이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이 고백이 인간 예수를 우리 평범한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신적·초월적 그리스도로 둔갑시킴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마술적인 종교,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을 인간을 대신해 말끔하게 처리해 주는 그리스도에 대한 노예적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로 변질시켜 오지나 않았나 하는 점이다.

예수는 인간에게 깃든 신적이며 성스러운 힘을 믿고 이 힘의 발아를 통해 인간이 인간답게 되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기독교는 신앙과 신학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잠재적 힘을 멸시하고 이로써 인간을 예수의 노예로 만들어온 것은 아닌가.
 
예수가 믿음의 길 십자가의 길을 통해 참된 인간성을 구현했음에 기초하여 시작된 이 고백이 이제 오늘 우리 시대에는 참된 인간화의 길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애물로 전락하고 만 것은 아닌가.

오늘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 800만에 육박하는 기독교인들이 존재한다던가?
이들 중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그런데 왜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가.
왜 우리 사회에는 사랑과 자유와 정의와 평등과 평화와 생명과 통일과 인간적인 친교가 아니라 무관심과 억압과 불의와 불평등과 전쟁과 폭력과 죽음과 분열과 다툼이 판을 치고 있는가.
아니, 왜 한국교회 내부에서도 온갖 추잡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이기심과 파벌싸움과 권력욕과 빈부의 격차가 존재하는가.

고백이 부족해서? 아니다.
이 땅 이 교회에 고백은 차고 넘친다. 신앙이 부족해서? 아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처럼 뜨겁게 불타는 신앙을 가진 민족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문제는 고백의 내용이다. 신앙의 내용이다. 고백과 신앙의 자세이다.

예수에게서 모범적으로 드러났듯이 고백은 행동으로, 신앙은 해방의 몸부림으로 구체화되고 승화되어야 한다.
입술만의 고백, 주체적인 해방의 몸부림이 없는 신앙은 반예수적인 것이요, 따라서 반기독교적인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인간 예수에게서 모든 참되게 인간적인 요소들이 발견된다’는 고백으로,
인간 예수의 삶에서 인간의 선한 자질이 활짝 꽃을 피웠다’는 고백으로
해석될 수 있고 또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예수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리스도였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태초에 각본이 짜인 드라마이며, 바로 이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고백하는 데만 인간의 구원이 있다고 ‘신비하게, 마술적으로’ 풀이하면 안 될 것이다.

예수가 끊임없는 배움과 성장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인간됨을 멋지게 실현하였듯이 우리도 예수를 닮아 우리 안의 인간적 자질들을 부단히 계발하고 발전시켜 사람다운 사람으로 완성되어져가야 한다는 고백으로 ‘평범하게, 실천적으로’ 풀이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닮아가야 한다?
우리 역시 오늘 이 땅의 예수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 예수가 원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이 예수의 뜨거운 목소리였다.

예수는 엄연히 인간이었는데,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이었는데, 이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다정한 벗이었는데, 왜 교회의 지배적인 신학과 교리에서는 너무도 명백한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이단’으로 낙인찍으려 하는가.
신이 되려는 인간의 거만을 우려해서인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상투적인 ‘이단’ 시비에는 뭔가 불순한 동기,
예를 들어 신자들을 신격화된 초월적 그리스도 앞에서 주눅 들게 하고 자기 비하적·노예적·굴종적·비주체적 인간으로 길들임으로써 교권을 합리화하고 이 교권에 기대어 자기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종교지배자들의 교활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닌가.

2000년 교회사에서 불의한 시대와 타락한 교회, 그리고 신앙의 해방적 생명력을 질식시키는 교리와 신학에 반기를 든 소수의 예언자적 목소리가 ‘이단’의 이름으로 박해받고 처형당한 일이 그 얼마이던가.

참으로 창피한 노릇이지만,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세상권력과 야합한 교권세력이,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신앙의 참된 가치를 외치는 자들을 다름 아닌 ‘정통’ 교리와 신학의 이름으로 이단시하고 처단한 일은 부지기수였다.

말이 교회사지 실은 세속권력에 못지않은 권력욕과 지배욕과 기득권 유지에 눈먼 교회 권력자들의 온갖 독선과 음모와 계략이 판을 쳐온 역사, 우리 기독교의 역사는 바로 이런 수치와 오욕의 역사였다.

이 부끄러운 역사, 이 역사의 끝자락에 서 있는 오늘 나의 삶과 신앙 속에도 깃든 이 왜곡된 역사 전통을 바로 알고 이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이것이 오늘 이 땅의 종교개혁이요, 예수를 진실로 믿는 신자들에게 피할 수 없이 주어진 십자가의 길이 아니겠는가.

사람을 억누르는 종교,
다른 것도 아닌 예수와 신앙의 이름으로 인간성을 짓밟는 교회와 신학,
진리와 생명에 대적하는 숨 막히게 틀이 짜인 닳고 닳은 교리체계들,
예수가 의도했던 것보다 의도하지 않았던 것으로 예수를 신격화시켜 우리와 예수 사이의 거리를 한없이 멀게 만드는 잘못된 기독론,

이제 이 모든 것들은 역사적 예수, 반역의 정신으로 충만했던 갈릴리 예수의 이름으로 과감히 척결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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