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제국과 하나님의 제국 / 김준우 교수

by 나누리 posted May 2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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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의 제국과 하나님의 제국

                                                                                          김준우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 전 감신대 교수

동양사를 전공한 친구와 만주를 갔던 적이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농사지어봐야 이리저리 다 빼앗기고 몇 해씩 계속 흉년도 들어 만주로 가셨던 저의 외삼촌 한 분을 비롯해서 많은 선조들이 피눈물을 뿌렸던 지역을 직접 느껴보고 싶어서 따라갔던 것입니다.

닷새 동안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만주를 돌아다니며, 얼마나 많은 우리의 조상들이 가난 때문에, 전쟁 때문에, 포로로 끌려가서, 가슴 저미며 살았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이 정말 많이 있지만, 제가 새삼 충격을 받은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시겠습니까?

압록강 강가에 옛날 고구려의 초기 수도 국내성이 있는 집안이라는 도시의 박물관에서 보았던 손바닥만한 돌이었습니다. 같이 간 친구에게 저 돌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신석기 시대의 돌칼이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래서 저 돌칼로 무엇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벼이삭을 벨 때 사용했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정말 아차! 싶었습니다. 탈곡기가 없던 시절에 우리의 조상님들은 한 손에 돌칼을 쥐고 다른 한 손에는 한 움줌씩 볏단을 잡고 이삭을 베고 돌 위에 올려놓고 껍질을 벗기는 힘겨운 노동을 통해 자식들을 먹여살리던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새삼 그 생각을 하니 왈칵 눈물이 나올 듯이 목이 메였습니다.
 
이처럼 조상들의 힘겨운 노동과 간절한 기도와 사랑의 수고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새롭게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새롭게 깨닫게 합니다. 우리를 살아남도록 하기 위한 조상들의 그 모든 수고 앞에서 우리가 오늘 얼마나 부끄러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새삼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 민족이 무천의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춤출 무(舞), 하늘 천(天). 하늘의 가락에 맞추어 춤추며 살아온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그처럼 고난의 역사를 살아오면서 견디어낼 수 있었던 힘은 추수를 끝내고 난 다음에 하늘의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며 살아온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산세가 험하고 평야가 몹시 비좁은 척박한 땅 압록강변에서, 개마고원에서, 그리고 김포평야와 김제평야에서 우리 조상들은 하늘 저편에서 들려오는 가락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그 고통을 이겨냈다고 믿습니다.

전염병이 돌아 한 마을에서 수 십 명씩 사람들이 죽어나간 해에도, 전쟁이 일어나 수천 명, 수만 명이 죽고 포로로 끌려간 가을에도, 홍수와 태풍이 몰아쳐 황금들판이 쑥대밭이 된 가을에도, 하늘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가락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면서 하늘의 위로와 새로운 힘을 얻었던 우리의 조상들이었다고 믿습니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역사적 예수에 대한 최근의 연구결과를 소개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힘이 들 때마다 예수님은 당시에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왜 그토록 굶주리고 병든 사람들이 넘쳐났을까? 로마제국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약소민족들을 정복하고 약탈하고 학살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빚에 쪼들려 결국에는 토지를 빼앗기고, 소작농이 되어 생산물의 70%를 지주에게 빼앗기고, 또한 각종 세금으로 인해 상당 부분을 빼앗겨 입에 풀칠하기조차 힘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성전의 제사장들은 어떠했는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사람들에게 성전세 십일조를 내도록 하고, 성전세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인과 세리들로 사회적인 낙인을 찍었던 제사장들. 영양실조로 인해 병든 사람들을 제사장들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병이 든 것이라고 속이고, 불결한 사람으로 상대를 하지 않거나, 아니면 그 병에서 낫게 되면 자신들에게 비둘기 한 마리라도 바치도록 만들어 깨끗해졌다고 선포하는 제사장들은 결국, 당시에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벼룩이 간을 빼먹는 악랄한 흡혈귀 집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주변 사람들의 가난과 굶주림 때문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인가?

예수님은 그 멋진 성전과 그 속의 강도들처럼, 열매맺지 못해서 말라 없어져야 할 제사장들에 대해 얼마나 자주 분노했을 것인가?

예수님은 얼마나 자주 답답한 가슴으로 하늘을 향해 간절한 기도를 드렸을 것인가?

스승이었던 세례 요한은 하느님께서 조만간 큰 일을 이루시어 로마군대를 쓸어내실 것이라고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특히 죄인들과 병자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예수님은 소매를 걷어부치고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어나가셨습니다.

세례요한에게 희망은 하느님의 극적인 역사개입이었지만, 예수님에게는 우리가 하느님의 희망이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하느님의 손과 발입니다. 피할 수도 없고 해결책도 찾기 어려운 오늘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만일 하느님의 기적을 바라고 있다면 우리는 세례요한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희망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희망을 만들어 나갈 때 우리는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희망이라고 믿을 때, 우리의 희망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가?

지금은 교회력에서 성령강림절 기간이며 하느님의 나라 절기입니다. 영어로 Kingdomtide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보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하느님의 제국입니다. 영어성경을 처음 번역할 당시가 왕국 시대였기에 Kingdom of God이라고 번역했지만, 보다 정확한 번역은 Empire of God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제국들에 맞서는 하느님의 제국이며,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에 맞서는 하느님의 제국을 위한 절기입니다.

내가 최근 들어 성경을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한 중요한 관점은 성경의 일차적 컨텍스트가 이 세상의 제국들의 지배전략에 맞서는 하느님의 대안전략, 평화전략이라는 관점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당시의 수퍼파워들, 즉 이집트 제국, 바빌로니아 제국, 페르시아 제국, 그리스 제국, 로마 제국에 맞서서 싸우는 가운데, 하느님의 반제국주의 전략을 발견하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제국들은 정복과 약탈과 착취와 학살을 일삼지만, 하느님의 제국은 서로 섬기며, 도와주고, 나누며, 생명을 북돋워줍니다.

이 세상의 제국들은 약자들에게 치욕감과 수치심을 안겨주어 비인간화, 노예화하지만, 하느님의 제국은 하느님의 사랑과 인정, 우리의 머리터럭 하나까지 세고 계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베풀어 인간화하며 주체화합니다.
 
이 세상의 제국들은 계급화와 연고주의와 패거리주의로 차별하고 배격하지만, 하느님의 제국은 철저한 평등주의와 아무나 참석하는 공동식사를 통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서로를 포용합니다.

이 세상의 제국들은 자기와 다른 남들을 정죄하지만, 하느님의 제국은 서로를 용서합니다.

이 세상의 제국들은 서로 무한경쟁하며 폭력적으로 투쟁하지만, 하느님의 제국은 서로 협동하며 폭력에 대해 비폭력적으로 맞섭니다.

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전에 예수 운동입니다.
예수운동은 하느님의 제국을 기다렸던 세례요한의 운동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운동은 하느님의 제국을 세워나가는 반제국주의 운동이며, 용서운동이며, 사랑의 운동이며, 정의의 운동이며, 나눔과 섬김의 운동이며 생명운동입니다.

교회는 예수운동을 위해 건물을 필요로 하며 조직을 필요로 합니다. 제국주의가 억압과 착취, 약탈과 학살을 강화할수록, 교회는 하느님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더욱 더 치열하게 세상 제국의 논리를 뒤집어엎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가 더욱 철저하게 예수운동에 참여하여, 이 세상 제국들의 논리와 횡포를 뒤집어 엎고, 교회를 제국들에 대한 하느님의 대항세력으로, counter-force, counter-community로 만들어내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아무리 예산이 몇십 억, 몇백억 원이 된다해도, 우리가 세상의 제국의 논리, 힘의 논리, 자본의 논리를 타파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교회는 결코 예수운동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계몽적인 설교를 듣고 사회봉사를 한다 해도, 이 교회 안에서 만일 사람들이 차별을 느끼고 아픈 사람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예수운동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특히 제도권 기독교가 지난 2천년 가까이 제국의 시녀가 되어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하면서, 혹은 세계 방방곡곡에 흩어져 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조상들의 힘겨웠던 역사를 기억함으로써 하느님의 은혜를 만났던 것처럼, 집을 떠나 타향에서 고생하며 살던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고 그 사랑을 기억함으로써 그 인생이 새롭게 태어났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의 피눈물나는 고난을 기억함으로써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기를 원하십니다.

그처럼 굶주리고 헐벗은 채 살았지만, 인생의 광야길을 힘겹게 걸었지만, 되돌아보면, 누더기일망정 언제나 옷을 입혀주셨고, 발이 부르텄을지라도 걸을 수 있는 힘을 주신 하느님의 은혜를 기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이처럼 넘치는 은혜를 기억할 때, 우리는 새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생활의 염려와 무게 때문에 여전히 지쳐있고 힘겹다고 느끼십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찬바람 몰아치는 만주 벌판에서 한 손에 돌칼을 들고 한 손에는 볏단을 들고 일했던 조상님들의 시련과 고생을 기억하고, 우리 조상님들의 뼈 속에 사무친 배고픔과 힘든 노동 앞에서
위로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가족들과 이웃들에 대한 섭섭함이 있고, 속만 썩이는 자녀들에 대한 우리의 마음 속에 응어리가 아직도 풀리지 않으셨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감자가 생살을 째어 생명을 나누어주듯, 그렇게 평생 당신의 생살을 째어내어 우리를 키워주신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 소리를 들으시며 새로운 힘을 얻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살아가는 현실이 너무 어두워 희망이 없으십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쟁으로 인해 죽은 시체들을 불태우기 위해서만도 몇 달을 보내야 했지만, 하늘 저편에서 들려오는 아리랑 가락소리에 맞추어 피눈물을 흘리면서라도 춤을 추었던 우리의 조상들을 기억하면서, “조상님들께서 그처럼 춤출 수 있었다면 나는 노래하리”라고 외치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세상의 제국에서 많은 혜택을 입고 성공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한쪽 발로 깽깽이춤을 추면서라도 서로의 아픔을 부둥켜안는 노력이 우리로 하여금 이 어둔 세상 속에서 희망을 만들어가는 예수의 제자들이 되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이 세상의 제국에서
희생당하고 실패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이 교회 안에서 여러분들을 보며 “그대 춤출 수 있다면 나는 노래하리” 하고 외칠 수 있는 하느님의 제국을 기쁨으로 만들어나가시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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