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종교와의 대화 / 정강길

by 나누리 posted Sep 3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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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강길  /  세계와 기독교 변혁연구소  연구실장 


종교다원주의에서 제기되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보통 보수주의 신학권에서는 주로 '일반계시'와 '특수계시'라는 이론을 펴고 있다.

예컨대 일반계시에서는 하나님이 자연을 포함한 모든 만물의 역사에 일종의 '선함'(Goodness)으로 역사하긴 하지만 실제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만큼은 성경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기원하는 특수계시에서 비롯한다고 보는 것이다.

즉 여기서 일반계시와 특수계시의 결정적 차이점은 바로 구원기능의 유무에 있다. 일반계시에는 구원의 역사가 있지 않으며, 특수계시는 특별히 택함을 받은 역사로서 나타난 것이라는 얘기다.


이 점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특히나 열혈 기독교인들일수록 기독교 아닌 다른 사람들은 죄다 죽어서 지옥 갈 불쌍한 영혼들로만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절로 나오지 않으랴.

기독교 외의 모든 다른 사상이나 학문들도 급수가 낮은 것으로 천시될 뿐이다. 성경 하나면 모든 것이 다 들어있고 죄다 통한다고 하는 '성경만능주의'를 표방하는 기독교인들도 알고 보면 꽤 많다.

이같은 구원에 대한 보수 진영의 기독교인들의 입장은 구약시대에는 인간의 죄사함이 동물들의 피를 통해서 속죄가 가능할 수 있었지만,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럴 필요 없이 이제는 예수의 피로써 단 한 번에 대체되었다고 본다.

예수께서 동정녀 탄생으로 오셔서 예수의 그 피가 나의 죄를 사해주심을 믿고, 또한 십자가에 달리셔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으면 나는 자동으로 죄가 사해지고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정말 간편하고 단순한 교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실로 못 배운 민중들에게도 더없이 잘 먹혀들어간다고 하겠다. 이는 어떤 면에서 일종의 주술적 원시신앙에 대한 적절한 대중적 현대화와 흡사한 맥락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기독교 구원의 유일성과 배타성을 지지하는 자들이 내세우는 성서 구절들은 다름 아닌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라는 구약의 십계명 구절이나 복음서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요한 14:6).

혹은 사도행전 4장 12절의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는 성경구절을 종종 그 근거의 레퍼토리로 내세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문자 그대로 이것이 수용된다. 아무런 의문 없이 말이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사정은 그렇지가 않다.
이 점은 사실상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는 맥락이나 예수에 대한 이해 그리고 성서를 보는 입장의 차이와도 관련한다.

구약의 저 십계명의 맥락은 고대 이스라엘의 야훼신의 성격과 모노야훼즘의 의미와 관련되며, 신약의 저 언급은 본문이 쓰이게 된 배경과 그 역사적 정황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작업과도 관련된다.
생각해보라. 오늘날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저러한 성서구절이 있는 줄도 몰라서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겠는가.


아닌 말로 예수께서 정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했을 경우, 만일 예수가 인간으로 오셨다면 그는 팔레스틴과는 동떨어진 다른 시공간에 있었던 고타마 싯달타의 가르침에 대해선 알고 있었을까를 생각해본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예수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히 다른 시공간에서 파생된 고등종교인 불교사상을 몰랐었을 점도 충분히 짐작해두자는 얘기다


혹은 예수의 그 말씀도 그 때의 '나'라는 표현이 겉으로 드러난 '나'가 아니라 '나'(예수)가 지닌 그 존재의 속성을 가리킨 것이라면, 사랑과 자비의 성질이 서로 통하는 것이라고 했을 경우 하등 문제될 것이 없는 성서구절이기도 하다.
즉, 예수가 '나'라고 할 때의 그 '나'의 본성은 싯달타의 가르침인 '자비'를 통해서도 충분히 표현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배타주의를 지지할 경우, 기가 막힌 문제꺼리는 또 있다.
지구 밖의 외계 생명체들의 구원은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럴 경우 독생자 예수는 그 외계 혹성에 가서 또 한 번 피 흘리고 죽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잖은가.


이 복잡한 문제 때문에 특히 뉴에이지 담론을 말하는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일수록 외계의 생명체 가능성을 절대 부정한다. 그들에게 대부분의 SF 영화들은 사탄의 영화일 수밖에 없다. 만일 외계인의 존재를 인정할 경우엔 그 문제는 더욱 골치 아프고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한때 중세시대에는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며,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돌고 있다는 '지구중심설'로서, 그리고 그 지구의 중심에 교황청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러한 얘길 믿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의 삶의 반경이 지구를 넘어서 저 광활한 우주 은하계까지 손쉽게 들락날락 하는 ‘우주촌 시대’가 도래한다면 기존의 소박한 보수 신앙과 가치관들은 분명한 혼란을 가져다 줄 것임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배타주의 입장 역시 지구중심설이 여전히 그 근저에 깔려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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