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는 구원받기 어려운가 ? / 산들바람

by 나누리 posted Sep 0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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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들바람

1.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복음서에는 가끔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모진(?) 말씀으로 좌절감을 안겨주는 글이 등장합니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영생의 길을 묻는 젊은이에게 주님께서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셔서 근심하며 돌아가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19:16-30, 마가복음 10:17-31, 누가복음 18:18-30)


그리 길지 않은 이 본문에는, 지금까지 교회 역사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왔던 교리와 신학의 여러 주제들이 담겨있습니다.
예수의 신성과 인성, 원죄, 구원의 길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담고 있는 복잡한 본문이지만, 여기서는 재산 문제에 집중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재산이 꽤 많은 한 젊은이(마태복음에는 ‘청년’, 누가복음에는 ‘어떤 관리’라고 되어 있음)가 예수님을 찾아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여쭙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젊은이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너무나 평이했습니다.
“십계명 후반부의 계명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젊은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 같습니다.
그는 그 계명들을 어려서부터 모두 지켜왔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젊은이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며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고 나서 나를 따르라.”
고 하셨고, 젊은이는 “울상이 되어 근심하며 떠나갔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재산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이 말씀은 율법의 문자가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중심내용의 실천을 엄격하게 요구하는 초창기 예수운동이 얼마나 공정한 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었는지, 또한 그 목표를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이 얼마나 강렬하고 과격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서에 이런 기록들이 나타나기에, 복음의 원형은 종교적이기보다는 과격한 사회적 성격의 운동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특히 부자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과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깊은 애정은 그로부터 2천년 후에 발생한 공산주의 운동을 연상케 하며, 예수는 급진적인 빨갱이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세심히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부자들을 무조건 싫어하시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젊은이를 예수님께서
“유심히 바라보시고 대견해하셨다.”
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 ‘살부살조’와 ‘살예살서’


불교에서는 수행자에게 ‘살부살조’ 정신을 가르칩니다.
부처님이라도 수행을 방해하면 죽이고 조사(또는 선사, 앞서 깨달은 선생)가 방해하면 그도 죽이라는 뜻으로, 온전한 깨달음을 얻으려면 이전의 그 어떤 전제에도 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불교의 살부살조 정신을 본받아 우리 기독교도 ‘살예살서’(예수님이 방해하면 예수님을 죽이고, 성서가 방해하면 그것을 넘어서는) 정신을 꼭 가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이 ‘실제의 예수님’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거나 왜곡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건이 전달 과정을 거쳐 기록될 때는 필연적으로 전달자와 기록자의 시각과 해석이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예수님도 ‘실제의 예수님’이 아니라 ‘기록자에 의해 해석된 예수님’입니다.
하여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기록자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야 하며, 때로는 기록자의 한계와 해석을 넘어서야 될 때도 있습니다.


본문의 기록 안에 담긴 ‘실제의 예수님’은 어쩌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네가 율법을 모두 지켰다면, 그 안에 담긴 실제 정신을 삶으로 살아내야 하지 않겠느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뜻을 너의 삶 전체로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굶고 있는 네 이웃을 위해 네가 가진 재산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줄 수 있겠느냐?”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예수님은 여기까지입니다.
만일 그게 아니라, 정말로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야만 나를 따를 수 있는 것이라고, 본문에 기록된 그대로 확실하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저 역시 본문의 젊은이처럼 예수님 따르기를 포기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록된 예수님’ 안에서 더욱 따뜻하고 넉넉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근심하며 떠나가는 젊은이에게 달려가 그를 부둥켜안고
“그 정도도 훌륭하다. 부족한 부분은 나를 따르며 더 배워라. 네가 가진 재산보다 더 크고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내가 너에게 알려주겠다.”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는, 제가 만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피하여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고뇌하며 기도하신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소심하기까지 하신 예수님이 너무나 좋습니다.


그런 저의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복음 11:28~30)
고 지금도 항상 저에게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저의 해석에 교우님께서 반드시 동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교우님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렇게 문자에 매이지 않고 그 문자 안에 담긴 속뜻을 읽으려 노력하면 우리는 더욱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열린 신앙과 진지한 탐구를 계속 하신다면, 제가 본문에서 찾아내지 못한 더 깊고 중요한 뜻을 교우님께서 읽어내실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본문에서 계속 이어지는 제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중심은 분명합니다.

“자신과 가족은 사랑할 줄 알면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계명을 모두 지켰다 하더라도 그것은 형식에 불과하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한다면 가족이기주의에 매몰되지 말고 이웃과 더불어 누리는 행복을 추구하여라.
그래야 진정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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