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오셨다 ? / 산들바람

by 나누리 posted Apr 2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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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들바람

1. 겉말과 속뜻에 대하여

가난한 농촌 마을에 세 식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시어머니를 모시고 어린 아들을 길러온 중년 부인이 가장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식이라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매일 술에 절어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어느 날 밤늦은 시간에 비척거리며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 어머니는 제 가슴을 쥐어뜯으며 "나가 죽으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소란에 놀라 잠에서 깬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달겨들어 "손자보다 네가 더 나쁘다."며 야단을 쳤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밉기로서니 어떻게 나가 죽으라는 말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소식을 들은 동네 어르신 한 분이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시어머니를 붙들고 이렇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며느님의 본심을 잘 헤아려 주시지요. 정말로 아들이 집을 나가 죽기를 바래서 한 말이겠습니까? 그만큼 독하게 마음 먹고 잘못을 고치라는 뜻으로 한 말이었겠지요."

말은 오해를 불러오기 쉽습니다.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본뜻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해서 오해를 빚기도 하고, 말하는 사람이 뜻을 제대로 드러내더라도 듣는 사람이 올바로 듣지 못해 오해를 빚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의 표면이 아니라 그 본뜻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시어머니가 "나가 죽으라."고 말할 때 흐느끼던 며느리의 속울음을 제대로 들었더라면, 가슴을 쥐어뜯던 며느리의 얼굴 표정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라면, 잠결에 소리만 들었을 때와는 달리 쉽게 그 본심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 글로 옮겨지면 말과 함께 전달되던 표정이나 어감, 어투가 모두 사라지고 글자만 남기에 오해의 소지가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성서에 담긴 하느님과 예수님의 음성도 그렇게 새겨듣고 가려들어야 합니다. 본심을 헤아리지 않고 문자 그대로 읽으면 끔찍한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네 손이 범죄 하면 손을 자르고 네 발이 범죄 하면 발을 자르라."고 하신 예수님의 겉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세상을 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정말로 죄를 짓는 순간 손발을 잘라버리라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죄를 미워하고 이겨내야 한다."는 뜻이었을 테니까요.



2. 속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경우

하지만 성서는 2~3천 년 전의 기록이기에 오늘날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당시의 배경이나 저자의 의도, 말씀하신 분의 본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 본문은 그런 이유로 곧잘 오해를 불러오는 성서 구절의 하나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마태오의 복음서 10장 34~39절)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2천 년 전의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시대상황이 어떠했는지, 예수님이 누구에게, 왜, 어떤 의도로 이 말씀을 하였는지 직접 현장에서 보고 들으면 그 분의 본뜻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본문을 읽는 우리에게는 당시의 상황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표정과 어감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청중이 누구인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이처럼 배경이 사라진 채 문자만 덩그러니 남아 본문을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읽는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열고 차분히 당시 주변상황과 예수님의 마음과 의도를 함께 읽으려 노력한다면 충분히 본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기성 유대종교의 테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큰 파문을 일으킬 것을 미리 알고 아픈 가슴을 억누르며 이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이 세상에 오지 않았다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갈등 없이 편안하게 지냈을 가정에 자신으로 말미암아 평지풍파가 일어날 것을 미리 예견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치 마을 사람 모두가 마약의 해악을 모른 채 그 환각을 즐기고 있는데 누군가 나서서 "그 약을 먹어선 안 된다."고 말하면 겉으로는 평화롭던 마을에 큰 싸움이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3. 예수님이 집안싸움을 부추기신 이유


"내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성격의 것입니다. 종교의 속박으로 인한 거짓평화를 폭로하고 극복하게 하여 바른 삶으로 인도해가는 일에 갈등이 없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이 교회 역사에 무수히 많았습니다. 교리로 인한 싸움이 예수님 이후로 지난 이천 년 동안 끊인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명목으로 기독교가 가는 곳마다 타문화와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명절마다 제사문제로 갈등을 겪는 가정이 적지 않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며 길거리나 전철 안에서 예수 믿기를 강요하는 무례한 일이 예사로 벌어집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갈등과 싸움은 교회 밖에서 뿐 아니라 교회 내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기독교 보수와 진보는 지금도 예수가 신인지 아닌지를 놓고 갑론을박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예언(?)은 지난 이천 년 동안 정확히 실현된 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집안싸움을 부추기신 진짜 이유는 싸움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조직의 규율을 잘 지키는 사람들만 있는 강도조직은 견고합니다. 조직 내에서 그들은 평화를 누리며 호의호식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조직 내의 평화'는 그대로 사회 불안이 되며 수많은 이웃들의 고통이 됩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 가운데 조직의 규율과 평화를 깨뜨리고 "강도짓을 그만 두자."고 외치는 조직원이 나오면 그 순간 조직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조직의 평화와 안녕을 깨뜨리는 이탈자가 한두 명에 그치지 않고 다수의 조직원이 그에 동조하게 되면 조직의 평화는 순식간에 와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강도조직의 와해는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오며 무엇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소시민들의 숨통을 트여줍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거대한 조직체가 되었습니다. 기독교 조직 안에 있는 사람들이 조직의 규율을 잘 지켜야 기독교는 내부적 갈등 없이 계속 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조직 내부에서 누리는 평화가 우리 사회의 불안이 되며 이웃들에게 고통을 준다면, 기독교는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기적인 조직체일 뿐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날의 기독교인이 새겨들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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