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페르샤적 껍데기와 헬라적 탈은 무신론적 신앙
                                                                                  
                                                                              홍정수 LA
한아름교회 목사 / 전 감신대 교수


얼마 전에 한국 교회들의 장례식 예문집을 들춰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것들은 이교도들의 장례식 예문과 다를 바 없었다.

세계적인 칼빈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우리가 만일 생물학적 죽음의 극복과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교의학 개요})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따라서 바르트식으로 말하면, 한국 교회의 장례식 예문들 속에 나타나 있는 부활 신앙은 "이교도들"의 어리석은 욕망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예문집들은 하나같이 영혼불멸과 육체의 부활을 동시에 믿고 있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죽으면 그의 영혼이 '낙원'이나 '천국'에 들어감으로써 하나님과 더 친밀한 교제를 누린다.

이것은 바로 헬라적 신앙이다.
부활 없이도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라고 하는 구원의 종점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무엇이 모자라는지 하나님과 함께 있던 영혼은 공중이나 지상으로 되돌아와 낡은 옷과 같은 '육체'를 덧입게 되는, 소위 '부활'을 또한 믿는다.
 
이 두 신앙은 엄연히 서로 다른 두 체계의 신앙인데, 우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 둘을 동시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인간이 죽어 그 영혼이 하나님과 보다 깊은 관계를 누리게 된다면, 그것으로서 기독교적 구원은 완성된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 인간의 편에서 말하면, 임마누엘- 그것 외에 그 무엇이 더 있어야 인간의 구원이 완성된다고 믿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불신앙이다.

마치 선물을 들고 오는 아빠보다는 선물이 더 좋은 철부지 어린아이와도 같은 신앙이라고나 할까. 이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불로장생을 더 바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런 신앙을 가리켜 이교도적이라고 했지만,
필자는 이런 신앙이야말로 무신론적 신앙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한국 교회는 부활에 관한 한 무신론자들이다.

이같은 무신론적, 이교적 부활 신앙은 한국 교회만의 혼란은 물론 아니다.

가톨릭 신학자 발터 카스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부활 증언에 대한 해석학적 토론(의미 규정)이 별로 진지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주로 신앙의 증언을 단순하게 반복해서 전해 주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즉 기독교는 '그냥' 믿고 전해 주었을 뿐, 부활의 메시지를 알아들으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태만은 교회의 설교자들과 일반 신도들로 하여금 부활의 메시지를 제멋대로 상상하게 만들었다.

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는 채, 우리는 부활의 메세지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 믿어왔다. 용감하게도.... 

최근의 신학적 연구에 의하면, 기독교가 이렇게 큰 혼란에 빠져 있었던 사실의 배경에는 성서의 언어 세계에 대한 무지가 깃들어 있다.

성서의 언어 세계는 헬라 문화의 언어와 다를 뿐 아니라, 17세기 이후의 지구인들을 지배해 왔던 과학적 사고 방식(모더니즘)과도 현저히 다르다.
이러한 반성을 신학의 초점으로 삼고 있는 신학을 소위 '포스트모던 신학'이라고 한다.
 
포스트모던 신학의 지적을 충분히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우리는 성서의 언어 세계가 뜻밖에도 한국인의 일상적 언어 세계와 매우 유사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의 언어 세계의 골격이 유태민족사일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페르샤 문화와 헬라 문화에 의하여 오염된 세계에 살았다고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유태인이었다.
아니 그는 그 민족을 의식하며 살았고, 또한 목회했다.

따라서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 페르샤적 껍데기와 헬라적 탈을 예수와 그 제자들의 진정한 메시지로 혼동하는 일을 피하도록 유의해야 한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4 신앙에세이 : 주님. 우리 한인들이 기도하면 오클랜드의 하늘의 창을 열어 주셨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6.02.05 171
63 오클랜드 여기에서 지혜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제임스앤제임스 2016.10.01 170
62 신앙에세이 : 주님. 오클랜드의 삶 속에 우리 크리스챤의 믿음을 지키며 살아 가는 도리를 깨달았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6.09.25 170
61 신앙에세이 : 우리는 항상 예수님의 이름으로써 사탄의 틈새 전략을 물리칠 것입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6.07.02 170
60 신앙에세이 : 크리스챤들의 삶들을 변화가 없는 속박된 생활대신에 믿음생활로 살겠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9.12.11 169
59 신앙에세이 : 우리의 믿음생활에서 상투적인 기도와 예배를 벗어 나야 기적과 치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8.04.20 168
58 신앙에세이 : 우리는 뉴질랜드를 위해 간절하고 신실하게 기도합니다. (Our Prayer No. 1 : 우리의 기도 No.1) 제임스앤제임스 2016.08.14 167
57 신앙에세이 : 주님, 우리가 짝퉁 크리스챤들이 (Fake Christian) 되지 않도록 도와 주옵소서. 제임스앤제임스 2019.04.28 166
56 신앙에세이 :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것임을 알았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6.07.30 166
55 신앙에세이 : 우리가 사는 나라 뉴질랜드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Our Prayer No. 2 : 우리의 기도 No. 2) 제임스앤제임스 2016.08.26 164
54 신앙에세이 : 주님. 광야의 시험은 우리의 우상화된 삶을 깨뜨리며 살아 나게 해주셨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6.04.09 164
53 YWAM 세일럼 (Oregon) DTS 훈련생 모집 안내! ymsalem 2019.02.05 163
52 주님.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두려움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Lord. Our Prayers are better than our fears. 제임스앤제임스 2015.11.03 162
51 신앙에세이 : 주님, 이곳 우리의 삶 속에서 옳고 바르게 사는 참 크리스챤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20.05.06 161
50 제임스의 세상이야기 : 우리 크리스챤들은 간절하게 기도한 대로 살기로 했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9.08.04 160
49 신앙에세이 : The One and Only Jesus : 오직 한 분이신 예수님이시여. 제임스앤제임스 2015.12.25 159
48 신앙에세이 : 주님, 우리 크리스챤들이 속된 세상에서 초라한 삶들을 이렇게 계속 살지 않겠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9.04.14 158
47 신앙에세이 : 주님, 우리가 예수님을 체험하고 크리스챤의 품성을 만들어 가도록 도와 주옵소서. 제임스앤제임스 2019.03.03 158
46 신앙에세이 : 주님. 참 크리스챤을 위한 교회 안에도 죄인들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8.08.17 158
45 신앙에세이 : 주님의 놀라운 은혜로 영원히 동행하여 주심에 기다림의 감사함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제임스앤제임스 2016.05.19 157
Board Pagination Prev 1 ...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Next
/ 37

X